낯선 자와의 긴 항해 2

등록일202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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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자와의 긴 항해 2

 

 

큰 새가 날아왔다.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와서는 몇 번 퍼덕이다가

항해실 창가 핸드 레일 위에 앉았다.

정오의 햇빛에 새의 흰 몸통이 눈부시다.

새는 고개를 수그리더니 부리로 이리저리 쪼아 댄다.

자세히 보니 가슴 부위에 피 같은 것이 나 있다.

상처를 입었나 보다.

새는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바람에 깃털이 나부끼고 있었다.

 

북위 07°, 서경 123°, 그리고 수심을 나타내는 숫자와 알파벳 기호들.

나는 이런 것들로 채워진 해도 위에

4B 연필로 침로선을 긋고 있었다.

나는 해 뜨는 시각과 해 지는 시각이 기록된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검은 잉크펜으로 항해일지에

오늘의 일들을 꼼꼼히 기록하고 있었다.

 

나는 항해실 바깥의 큰 새가 궁금해졌다. 나는 하는 일을 멈추었다. 그리고 큰 새에게 가 보았다.

새는 잔뜩 웅크린 채 앞만 바라보고 있다.

내가 큰 새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갑자기 새는 크게 날개짓하며 하늘로 치솟았다가

다시 갑판에 내려앉았다.

다시 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새가 나를 쳐다본다.

새의 얼굴이 사납다. 무섭다.

저 새는 이빨이 있을지도 모른다. 손갈퀴도 사나울 것이다.

 

그 자가 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 자는 새에게 손을 내밀었다.

새가 그 자에게 손을 주었다.

그 자는 호주머니에서 먹이를 한 줌 꺼내어 새에게 주었다.

무슨 열매 같은 것이었다.

새가 먹이를 열심히 먹는다.

새가 힘을 얻었다.

새의 가슴 부위 상처가 나아졌다.

새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항해실 위의 하늘을 빙빙 돈다.

나는 새와 새를 바라보는 그 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참 보기가 좋았다.

 

그러나, 새는 어디로 날아가는 것일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싸우러, 싸우러 가는 거요.

싸우다 상처를 입으면 또 이렇게 찾아올 거요.

 

갑판으로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새가 없다.

나는 새를 찾기 위하여 배의 가장 높은 곳인

나침의羅針儀 갑판으로 올라갔다.

사방으로 멀리, 하늘을 살펴본다.

보인다. 새가 보인다.

그 큰 새가 날아가고 있다.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다.

 

 

 

사각형입니다. 상사에 피곤해진 사람들이여, 불평불만 가득 찬 인생들이여, 바다로 오세요. 멀리 멀리 넓고 깊은 바다로 오세요. 잠시, 사랑하는 가족이랑 친구들이랑 놓아두고 파도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로 오세요.

 

거기서는 선원수첩과 비상금이 든 지갑, 작은 노트 하나만으로 견뎌 볼 만한 소중한 삶이 있답니다. 아아, 너무나 빨리 가 버리고 마는 우리들의 젊은 시절이여. 우리들의 눈과 귀는 너무나 이 세상의 넘쳐나는 풍경에 사로잡히지 않는가요? 이 세상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도시는 무엇인가요? 이 세상에서 가장 긴 기찻길은 어디 있나요? 이 세상에서 가장 더운 지방의 풀은 어떻게 생겼나요? 사막에는 안개가 끼나요? 언제부터 육지에 마을이 생겼지요? 언제부터 바다에 길이 열렸는가요? 바다에는 아직도 거대한 말향고래가 살고 있나요?

 

다이렌에서 화물을 싣고 멀리 남미의 푼타아레나스로 가는 화물선을 잡으세요. 미크로네시아, 폴리네시아의 열대 해역을 거쳐 남태평양의 섬을 지나 남쪽으로 남쪽으로 항진하면 바다의 귀족새 알바트로스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날개로 날개짓하며 당신의 화물선의 선교의 난간에 앉아서 그 고고한 목놀림으로 이리 저리 갸웃거리면서 선수의 수평선을 바라볼 겁니다. 지금 당신은 당신의 동료 조타수와 함께 흰 새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습니다.

 

 

자료출전 : 시집 '해류와 노동'

 

해설 : 심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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