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의 '파도'

등록일202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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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아, 여기 누가

술 위에 술을 부었나

잇발로 깨무는

흰 거품 부글부글 넘치는

춤추는 땅- 바다의 글라스여.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언어는 선박처럼 출렁이면서

생각에 꿈틀거리는 배암의 잔등으로부터

영원히 잠들 수 없는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아, 여기 누가

성(性)보다 깨끗한 짐승을 몰고 오나.

저무는 도시와

병든 땅엔

머언 수평선을 그어 두고

오오오오 기쁨에 사나운 짐승들을

누가 이리로 몰고 오나.

 

아, 여기 누가

죽음 위에 우리의 꽃들을 피게 하나.

얼음과 불꽃 사이

영원과 깜짝할 사이

죽음의 깊은 이랑과 이랑을 따라

물에 젖은 라일락의 향기

저 파도의 꽃떨기를 7월의 한 때

누가 피게 하나

 

* ‘현대문학’, 1967년 10월

* 김현승

* 한국명시(최동호 편저) 상권 674면

 

 

'생명과 죽음'이라는 물의 심상에 잘 연결되고 있는 시이다. 두 개념의 혼재성이 첫 연부터 마치 포문을 열 듯 시작되고 있다. 그런 지금, 이 시가 해양문학 작품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시인은 뭍으로 몰려오는 파도를 보고 “아, 여기 누가 술 위에 술을 부었나? 이빨로 깨무는 흰 거품 부글부글 넘치는 춤추는 땅”이라고 세상을 향한 선언처럼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2연에서 시인은 파도에서 찾은 생명과 죽음의 혼재성과 그 모순에 장탄식하고 있다. 이처럼 영탄조로 흐르는 이유는 다음 연에서 분명해진다.

 

3연에서 시인은 현실과 세상을 ‘저무는 도시’, ‘병든 땅으로 규정하고 있다. 문명의 멸망을 선언하고 있는 시인에게 파도는 새 생명으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성(性)보다 깨끗한 짐승‘, 또는 ’기쁨에 사나운 짐승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 ’물에 젖은 라일락의 향기‘를 찾은 4연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 글, 심호섭(홈페이지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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