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가는 길

등록일2020-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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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가는 길

이용희ㅣ수필가

 

 

신호대기하려고 정차중이다

앞쪽으로 보이는 인도에 한 여자가 걷고 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원피스 허리에 둘러맨 널따란 리본이 나의 이십대를 떠올리게 한다 나도 저런 원피스가 있었는데.

나도 저렇게 젊은 날이 있었는데. 그때가 몇 살이지? 거꾸로 세어보니 사십여 년 전이다. 문득 그 날로 돌아가고 싶다. 어르신들께서 좋은 나이야 하시는 말로 위로 받기에는 이제 너무 나이가 들었음을 자각한다.

나도 저 나이가 되어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다시 저렇게 고운 원피스를 입고 날씬한 허리에 리본이 달린 허리띠를 두를 수 있다면. 누구인가가 나를 그렇게 되돌려 준다면 나는 곧 돌아가겠다고 할 수 있을까?

오늘 나는 바다로 떠나는 길이다. 해마다 여름이면 바닷물이 그립다. 풀어 버리고 와야 할 더미가 쌓여서 내 속은 터져버릴 것 같다. 몸을 한 번은 바닷물에 담가야 일 년 동안 필요한 물을 흡수한 듯이 싱싱해지는 나를 발견한다.

어제까지 내 몸과 마음 영혼까지도 가뭄에 말린 옥수수 잎마냥 비틀어졌다. 뽑아 던져진 쇠비름 잎마냥 시들어버린 듯했다. 맹물로는 갈증을 지울 수 없어 이온수라도 마셔야 하는 전해질 불균형의 환자처럼 심한 바다에의 갈증을 느꼈다.

그렇게 떠난 바다로 향하는 길에서 스물세살 적 나를 돌이켜보게 되는 한 사람이 눈에 띈 것이다. 조물주가 옛날로 돌려주신다고 하시면 어떻게 할까? 나의 이십대 시절로 돌아가는 대신 이제까지의 모두를 버려야 한다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보니 머리가 저절로 흔들어진다. 이제껏 낳아서 키워 온 내 아이들이 가장 먼저 인식되는 보물 일호다.

지난주에 저희들 끼리 바다에 다녀 온 아이들이다. 삐지고 화가 나서 아직도 노여움과 서운함이 가시지 않은 상태다. 그런데도 이런 맞닿은 생각 속에 들어서니 가장 귀한 보물로 생각된다. 그렇다. 돌아갈 수 있다 해도 난 젊어지기 위해 버려야 한다면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그동안 저희를 위하여 빨은 기저귀 수를 세며 가볍게 털고 바다로 갔다. 물거품은 나의 옛날로 만든 조각들이 되어 철썩이는 파도소리에 실려 온다.

남편과 둘이 물속에 목까지 담그고 서서 할 수 있는 얘기란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언제 처음 바다를 보았을까? 분명 초등학교 때는 아니었다. 엄마 따라 서울 다니던 기차에서 내다본 강을 바다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이 ‘바다에 갔다 온 사람 손 들어봐요.’ 했을 때 손을 번쩍 들고 ‘서울 가는 곳에 있는 바다요.’ 했던 적이 있으니까.

미래에 대한 막막함 때문에 내 인생의 막을 내리겠다고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달려갔던 열여덟 살의 바다였던가.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생각나지 않는다. 대학 수학여행 때도 설악산에 들려 바다 구경을 한 적은 있었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은 언제 바다를 갔었을까? 남편이 술이 취하여 호기를 부리며 ‘얘들아 내일은 바다로 간다.’ 하고 잠이 들었다. 그 다음날 아빠가 깨어나기를 머리맡에서 기다리던 아이들의 보챔으로 우리는 느닷없이 동해바다로 내달린 적이 있었다. 물에 들어가기에는 이른 철인데도 아이들은 바닷물에 몸을 적시고야 돌아왔다. 그 후 수도 없이 많이 드나들던 바다 여행 그리고 해수욕, 조개잡이 그 속에서 아이들은 자라고 그 많은 포말처럼 이야기도 많이 만들었다.

모래알만큼 많은 언어들의 나눔은 또 얼마나 많이 쌓고 허물었을까? 파도는 드나들고 모래는 쌓였다 허물어진다. 물거품은 만들어졌다 또 흩어지고 아이들의 함성도 커졌다 작아진다. 사라지고 흩어졌다고 생각했던 그 모두가 지금까지 고스란히 쌓여 있음을 느낀다.

이제 돌아간다면 미래가 아무리 화려해도 이제까지 쌓아놓은 바다의 추억만큼 아름다울까? 다시 쌓기 시작하려고 이 아름다운 성을 허물겠다고 할 자신은 없다. 뭍이 보이는 이곳까지 온 파도가 앞에 보이는 정경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되돌아가려 할까? 오면서 겪은 모두를 물거품으로 돌리겠다고 할까? 이렇게 바다의 추억 하나만으로도 셀 수 없이 많은 앨범을 만들 수 있다.

지나온 시간들을 바다에 다 쏟아버려 물보라처럼 흩어야 한다면 너무 아깝다. 다 버리려 나선 바닷길은 나에게 더욱 간직하고픈 소중한 추억이 된다. 바닷물에 모두를 버리고 온듯한데 나를 따라온 파도 소리에 몸도 마음도 왈츠를 춘다.

 

□ 자료출처 : <해양과 문학> 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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