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서 바다로 다시 바다에서

등록일20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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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바다로 다시 바다에서

김지희

 

 

海淑, 어머니의 이름에는 바다가 들어간다. 진도군 어촌에서 서귀포시 어촌으로 시집온 외할머니는 거기서 어머니를 낳았다. 바다 특유의 소금기 어린 거친 바람과 척박한 살림살이가 싫었던 어머니는 스물이 되자 곧장 서울로 떠났다. 그러던 당신은 스물아홉에 아버지를 만나 3개월 만에 결혼하고, 아버지의 일터를 따라 울산에 들어왔다. 부두 앞에 차를 일렬로 늘어놓고 배에 실어 나르는 도시로. 나와 동생은 울산 북구 구석에서 태어났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어머니는 어린 시절의 바다를, 집을 오가며 마주치는 바다를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바닷가 앞에 살고 싶어 하지만 당신은 바닷가에 오면 가난할뿐더러 을씨년스럽고 험난하기까지 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싫다고. 그렇게 말씀하는 어머니, 우리의 집은 지금 울산 정자 바다 뒤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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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는 한여름, 아이스크림과 튜브를 파는 슈퍼, 땡볕을 가리는 소나무밭, 그 너머로 펼쳐진 하얀 모래사장이다. 곳곳에 푸른 줄무늬의 파라솔과 샤워실, 수영장이 있다. 무더운 8월이 오면 우리 가족은 차로 산을 넘어 관성 해수욕장에 갔다. 튜브를 타고 파도를 따라 오르내리는 일은 언제나 신이 났다. 다리 위로 고운 모래를 덮어서 인어 놀이를 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러다 질리면 어린이용 수영장에 들어갔다. 거기서 물놀이만 한 번 같이 하면 모두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배가 고파지면 부모님이 쳐둔 텐트로 돌아와 라면을 끓여 먹었다.

여름이 되면 일간지에는 해수욕장으로 가는 인파가 얼마나 굉장한지, 차는 또 얼마나 막히는지를 다루는 기사가 항상 실려 있었다. 실제로 그 시절 나는 동네 개천과 계곡에서도 놀았지만 그 이상의 시간을 바닷가에서 보냈다. 집에서 구불구불한 산복도로를 넘으면 관성 외에도 두세 군데 해수욕장이 있었다. 바다에는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끝없이 튜브를 밀어주는 파도와 새로운 또래 친구들, 삼겹살, 라면, 수영장. 그러니까 어린 시절 바다는 어린 시절의 90년대생에게 커다란 놀이공원에 가까웠다. 나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바다를 놀이터 삼았다. 대학 동기들과 족구하고 막걸리를 마시기 위해, 주말의 데이트를 위해, 어린 자식들의 짜증과 힘을 빼기 위해 해수욕장으로 갔다.

방학 숙제를 한 적도 있었다. 여름 휴양지의 대표격인 계곡과 바다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비교해보는 탐구 과제였다. 나는 공책을 들고 입구 샤워실 앞에 선 채로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바보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왜 해수욕장에 오셨나요? 몇 박 며칠 계세요? 계곡이 더 좋은가요, 바다가 더 좋은가요?

사람들의 대답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텐트 말뚝을 땅에 박던 어머니의 얼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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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자라서는 더 이상 바다에 몸을 담그지 않았다. 같은 공간에 있는 낯선 또래들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수영복 차림으로 배가 튀어나온 맨살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웠고, 하루가 채 되지 않아 검게 그을리는 얼굴이 싫었다. 얕은 파도도 시시해졌다.

나는 사람이 만든 바다로 눈길을 돌렸다. 네온사인과 빌딩, 공연장, 식당, 인파가 몰아치는 도시의 바다를 꿈꿨다. 꼭 어머니가 그랬듯 멀리, 기왕이면 홍대거리와 연남, 경리단길, 강남 가로수길이 있는 서울로 올라가 살아가기를 꿈꿨다. 대학생이 돼선 서울에 있는 잡지 회사의 학생 리포터가 되어 주마다 서울에 올라갔다. 나의 놀이도 새로운 단계로 들어섰다. 나와 20대 친구들은 상품들로 가득한 미로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며 길을 잃었다.

그 와중에도 바다는 곁에 있었다. 종종 주말에 무료해하는 아버지를 데리고 드라이브를 나와 해변의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과 같은 식의 재미를 느끼진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바다에 뛰어드는 사람은 줄었다. 대신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이 늘었다. 스타벅스와 비슷한 카페들이 이웃하여 일렬로 늘어서기 시작한 해안선에서. 맥북과 아이폰, 영어교재를 든 대학생들과 아이를 안은 신혼부부, 교외에서 빙수 한 그릇 먹으러 온 도심의 일가족이 그 선으로 스며들었다. 20대, 그러니까 2010년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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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나는 바다를 떠나지 못했다. 서울 소재 잡지사의 학생 리포터 이력으로 서울 대신,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종착지가 되는 부산에 정착했다. 첫 직장에서 지하철로 세 역을 지나면 광안리에 갈 수 있었다. 그 회사를 그만두고서는 아예 해기사의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일자리를 얻었다. 새 회사 뒤로는 부두가 이어졌다. 아침마다 부산역에서 내리는 한 덩어리의 사람들이 크고 작은 해운기업으로 흩어졌다. 바다는 유년기의 놀이터에서 일터의 기원이 되었다.

이쯤 되니 심약한 내가 바다를 다른 방향으로 믿기 시작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바다는 나에게 타고난 운명과 비슷한 맥락으로 자리 잡았다. 외가의 피를 타고난 이상 바다에 터를 잡고 살아갈 팔자라는 일종의 미신이 굳어가는 것이다. 어머니의 이름에 들어간 바다. 그 속 파도의 조수력은 무엇을 어디까지 끌어 당겨오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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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에 들어서 친구 Y와 제주 여행을 갔다. Y는 서울에서 나고 자라 서울 소재 대학을 나와 서울에 직장을 얻은, 그야말로 도시 토박이다. 제주에 가자는 Y의 제안을 듣고 나는 잠시 망설였다. 제주도는 친가 없는 우리 집이 유일하게 명절을 보내는 7평짜리 주공아파트 방이었지, 관광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여행이 아니면 제주에서 자유로운 시간을 보낼 기회는 없었으므로 나는 한겨울에 제주로 뜨는 비행기 편을 잡았다. 렌터카 운전대를 잡고 둘러본 2박 3일의 제주는 낯설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여미지식물원을 산책했으며 오설록 박물관에서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고, 한라봉 농장에서 과실을 땄다. 그 경험은 내가 겪은 제주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하략………)

 
□ 자료출처 : <해양과 문학> 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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