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지킴이 안용복장군

등록일202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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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지킴이 안용복장군

남청도 I 수필가

 

 

작년에 우리나라 해양조사선이 독도해역의 조사하는 것을 일본 정부가 당장 그만두라고 떼를 쓴다는 기사를 보았다. 참으로 소가 웃을 일이다. 남의 제사에 미주알고주알 간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긴 그런 빌미를 제공한 우리 정부에도 잘못은 있긴 하다.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리 라인(Lee Line)’이라 하여 독도 바깥까지 우리 해역이라고 선언했었고 당시에는 한·미동맹으로 일본 측보다 우리가 미국에 더 가까웠으니 독도에 대해 일본은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그러던 것을 5·16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한일국교정상화라면서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오면서 ‘리 라인’을 양보했던 것이다. 그다음에는 한일어업협정인 EEZ를 정하면서 독도를 공동수역 안으로 넣는 우를 범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측 협상 주무관은 사전에 6개월간 어민들과 숙식을 함께 하면서 예상 문제점을 파악하는 등 만반의 대비를 한데 비해서 우리 측 담당자는 탁상공론만 하다가 막상 협상에 들어가자 ‘쌍끌이, 외끌이’란 용어조차 몰랐다고 하니 결과는 보나마나 뻔할 뿐이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는 손자병법(孫子兵法) 모공편(謀攻篇)에 나오는 말로 자신과 상대방의 상황에 대하여 잘 알고 있으면 백번 싸워도 위태로울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닌가?

 

역사적으로 보면 독도는 서기 512년(신라 지증왕13년)에 우산국(于山國)이 신라에 병합될 때부터 한국의 고유영토가 되었다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열전에 나와 있다. 당시 우산국은 동해바다 가운데 울릉도와 독도(우산도) 두 섬으로 구성된 고대 해양 소왕국이었다. 삼국사기 외에도 우산국이 울릉도와 독도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세조실록지리지(1432), 동국여지승람(1481), 신증동국여지승람(1531), 만기요람 군정편(1808) 그 밖에도 각종 고문헌과 지도에도 기록되어 있다. 울릉도와 함께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사실은 일본은 물론이고 서양에도 잘 알려져 있었는데 서기 1737년에 프랑스의 유명한 지리학자 당빌(J.B.B. D’Anville)이 제작한 조선왕국전도(Royaume de Coree)에도 독도가 조선왕조 영토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일본이 임진왜란(1592~1598)을 일으켰을 때 왜군은 독도를 거쳐 울릉도를 침략하여 주민들을 학살하고 노략질을 하였다. 이에 주민학살을 막기 위해 조선 조정에서는 공도(空島)정책으로 울릉도를 비워 두었는데 이 틈을 타서 일본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 조정 몰래 어부 2 가문에게 1618년 울릉도에 상륙할 수 있는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와 1656년 독도에 상륙할 수 있는 송도도해면허(松島渡海免許)를 발급해 주었다. 이로 인하여 울릉도로 건너온 일본 어부들과 안용복 등 조선 어부들 사이에 1693년 큰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부산 지하철 2호선 수영역 3번 출구 부근 벽면에는 ‘수영좌수영 어방놀이’ 모자이크가 돼 있는데 그 옆에 안용복 도일 지도가 들어 있는 2개의 액자가 걸려 있다. 며칠 전 나도 우연히 눈에 띄어 '안용복이 왜 거기서 나와?' 하는 생각을 했다. 알고 보니 안용복 장군을 모신 수강사(守疆祠)가 수영 팔도시장 사적공원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적공원 안쪽 수령 500년 이상 되는 푸조나무 옆에 가면 사당과 동상 그리고 충혼탑이 서 있다.

그렇다면 우선 ‘안용복이 어떤 인물인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안용복은 1654년 부산 좌천1리 제14경 3호 출신으로 일찍이 동래 수군(水軍)으로 들어가 능로군(能櫓軍)으로 복무, 부산 왜관(倭館)에 자주 출입하여 일본말을 잘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능로군이란 임진왜란 발생 이후 군사 확보책으로 천인(賤人)에게도 군역을 부과함으로써 생겨난 양인(良人)과 천인의 혼성부대를 말한다. 그는 1693년(숙종19) 3월 15일 동래 어민 40여 명과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고기를 잡기 위해 침입한 일본 어민을 힐책하다가 부하 박어둔(朴於屯)과 함께 잡혀갔다. 이때 그는 호키주(伯耆州:지금의 돗토리현) 태수와 에도막부(江戶幕府)에게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하여 막부로부터 조선영토임을 확인하는 서계(書契)를 받아오던 도중 나가사키에서 대마도주에게 그 서계를 빼앗겼다. 이미 17세기 초 광해군때부터 조선정부에 울릉도로 옮겨 살게 해달라고 요청한 바 있는 대마도주는 안용복을 소환하면서 조선의 어민이 일본 영토인 죽도(울릉도)에서 고기 잡는 것을 금지시켜 달라는 억지를 쓴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울릉도를 죽도라 칭하며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대마도주의 잘못을 지적하고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분명히 하였다. 한편 그의 영향으로 에도막부는 1695년 일본 어선의 독도 왕래금지와 돗토리 성주는 독도는 호키주에 속하는 섬이 아니라고 표명하였다. 그다음 해인 1696년 1월에는 에도막부에서 이전에 발급했던 죽도도해 면허와 송도도해 면허를 취소하고 울릉도 도해 금지령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 후 1696년(숙종22) 봄 그는 승려 뇌헌과 흥국사 상선을 타고 울릉도에 출어하여 마침 그곳에서 어로 활동 중인 일본 어선을 추격하여 “우리 영해를 침범하여 고기를 잡아서는 안 된다”라고 문책하였으며 자칭 조울양도감세장신안동지(朝鬱兩島 監稅將臣 安同知)라고 하여 일본 오키주에 가서 태수에게 범경 사실을 항의하여 다시는 울릉도와 독도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사과를 받고 돌아왔다고 한다.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온 그는 이 사실을 비변사에 알렸으나, 조정에서는 함부로 벼슬을 사칭하고 양국 간에 외교 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그를 체포하고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전 영의정 남구만과 전 좌의정 윤지완의 사형 반대와 영의정 윤상운의 간언으로 귀양으로 감형되었다, 나라에서도 해결하지 못한 중요한 영토 문제를 해결한 공은 3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빛을 발할 만큼 큰데도 도리어 귀양을 보내어 그 후 소식조차 알 수 없으니 실로 통탄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민간인의 신분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 땅으로 문서화하는 등 울릉도. 독도 수호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익도 󰡔성호사설󰡕에서 안용복의 배짱과 용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안용복은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강적과 겨뤄 그 간사한 마음을 꺾고, 여러 대에 걸친 분쟁을 그치게 하였다. 계급은 일개 졸병에 불과해도 행동한 것을 보면 진짜 영웅호걸답다.”

나는 아직 울릉도에는 가 보지 못했지만 안용복 추모비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에도 세워져 있다고 한다. 1964년 경상남도 안문종친회와 경북 해군본부가 공동으로 건립했다고 한다. 추모비 앞면에는 ‘안용복장군충혼비(安龍福將軍忠魂碑)’란 글귀와 이은상 시인의 시구가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동해 구름 밖에 한 조각 외로운 섬 아무도 내 땅이라 돌보지 않을 적에 적굴 속 넘나들면서 저 임 혼자서 애썼던가. 상이야 못 드릴망정 형벌 귀양 어인 말고. 이름이 숨겨진다 공조차 묻히리까 이제 와 울릉군 봉하오니 웃고 받으소서.”

 

최근 전개되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보듯이 국제사회는 약육강식의 세계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강대국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나라의 힘을 기르지 않는다면 언제 먹히게 될지 모른다. 특히 중국은 지난 해 6월17일 세 번째 항공모함인 푸젠함을 진수하여 만약 한반도나 남중국해에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 해당 수역으로 언제든 급파될 수 있다고 하며 중국과 러시아의 전투기들이 우리나라의 방공식별구역(KADIZ)까지 수시로 넘나들고 있지 않은가? 나라를 지키는 데는 개인이나 국가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안용복 장군이 유배를 떠나면서 남겼다는, “내 몸이 죽어서라도 우리 땅을 찾으려는 것이었는데 귀양쯤이야 달게 받겠노라!” 이 한마디만 미루어보아도 그분의 우국충정과 국토수호 의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자료출처 : <해양과 문학> 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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