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북전쟁과 장갑선 메르맥 vs 모니터 호(김성준) -바다와 문학, 그리고 영화(7)

등록일202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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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문학, 그리고 영화 (7)

 

미국 남북전쟁과 장갑선 메르맥 vs 모니터 호

 

1. 미국의 발전과 남북전쟁

 

1789년 4월 조지 워싱턴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출발할 당시 미국은 대서양 연안에 자리잡은 3류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70여년이 흘러 링컨이 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1861년에 이르면 미국은 북미 대륙을 영토로 하고 경제가 급성장하는 강대국으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 운하가 전 국토를 가로지르며 내륙과 대서양 연안의 항구들을 연결시키고 있었고, 미국의 실용적이고 창의적인 사람들이 새로운 이기들을 속속 발명해가고 있었다. 1834년 맥코믹이 말이 끄는 수확기를 발명하였고, 휘트니는 목화 따는 기계를 부품 교체가 가능하도록 개량하고 북부에 공장을 세우고 대량생산에 들어갔다. 모스는 1843년 의회가 볼티모어에서 워싱턴까지 전신로를 가설하기 위한 예산을 승인하자 곧 전신시설을 설계를 완성하고 전신 부호를 고안해 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창의적 성과들로 말미암아 미국은 1851년 즈음에는 시계와 자물쇠, 자동권총, 재봉틀, 곡식 수확기, 철도 등에서 대량생산체제를 구축해갔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미국은 독립선언서에 의해 하나로 통일된 연방이 아니라 남부와 북부로 분열되어 있었다. 남부는 농업과 노예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남부에서 생산된 면화는 영국과 북부의 공장으로 팔려 나갔고, 노예들은 면화와 담배, 쌀, 옥수수 등을 생산하는 주된 노동력이었다. 이미 1807년에 노예수입이 법으로 금지되었으나 노예인구는 계속 증가하였다. 1790년 70만명이던 노예인구가 1860년에는 350만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동안 남부의 인구는 거의 증가하지 않았는데, 이는 남부가 해외의 이주민들을 거의 흡수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뒤늦게 개척된 북부는 산업화를 거치면서 공장제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체제를 구축해갔다. 농업이 여전히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철도, 운하, 기선회사, 은행, 공장 등이 경제의 주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1845년 시작된 아일랜드의 감자기근으로 이후 수년 동안 1500만명의 아일랜드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860년 미국의 인구는 약 3200만명이었는데, 이 중 1/8이 외국 태생이었으며, 이들의 대다수는 로드 아일랜드, 코네티컷, 뉴저지, 펜실베니아 등의 북북 공장지대에 정착하였다.

노예제가 금지된 지 반 세기가 더 지난 시점까지 노예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체제가 한 사회 내에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을 안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연방의회는 노예제에 대한 남부와 북부간의 갈등을 몇 차례의 타협으로 억누른 바 있었다. 1820년 연방의회는 ‘미주리 타협’(Missouri Compromise)으로 서부에 신설되는 주가 하나씩 노예주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상원의석과 대통령 선거인단의 표에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주가 성립함으로써 세력 분포가 북부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이 되자 연방의회는 ‘1850년 타협법안’을 제정하는 데 동의했다. 이 법에 따라 캘리포니아는 자유주로서 연방에 가입되었고, 워싱턴에서는 노예매매 행위가 금지되었으며, 연방정부는 도망한 노예들을 소유주가 잡아들이는 일을 지원해야 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탈주 노예들에 관한 법>이었다. 이 법으로 노예잡이들이 도망간 노예를 추적하여 체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체포한 노예를 원 소유주에게 돌려보내는 데 들어간 비용을 연방정부가 부담하도록 했으며, 심지어는 도망자를 숨겨주거나 도와준 사람은 벌금형이나 체형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 법으로 북부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영유하던 노예출신 흑인들이 언제 체포되어 남부로 송환될 지도 모르는 상황에 직명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저항이 거세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노예제 폐지운동의 본거지였던 보스턴에서는 노예 출신 윌리엄 크래프트 부부를 노예잡이들로부터 보호하려는 운동이 일어났고, 샤드라크라는 도망 노예를 체포하려던 기관원들을 군중이 빼내 탈출시킨 일도 있었다. 뉴욕 주에서는 감금당한 노예 윌리엄 매켄리를 구출해 캐나다로 보낸 일이 일어났고, 펜실베이니아 주의 크리스티에서는 도망 노예 몇 명이 주인을 죽이고 캐나다로 도망가기도 했다.

1854년 노예 문제에 대한 새로운 분열의 씨앗이 파종되었다. 1850년 타협안을 성사시킨 바 있던 일리노이 출신의 민주당 상원위원인 스티븐 더글러스는 대통령에 출마할 야욕에서 남부의 민주당 의원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 1820년 미주리 타협안을 폐기하는 데 동의하였다. 미주리 타협안에 의하면, 캔사스와 네브라스카는 자유주로 성립될 수 있는 지역이었지만, ‘캔사스-네브라스카 법’은 해당 주민들의 투표로 주의 성격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자유로운 노동력이 필요했던 서부와 북부의 주민들은 이 법에 반대하였다.

1854년에는 미국의 정당 체제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전통적으로 휘그당과 민주당의 양당체제였던 미국에서 남부에 기반하고 있던 민주당 내에서 입지가 축소되어 가고 있던 북부 세력이 1854년 5월 9일 30명의 의원들로 공화당을 결성한 것이다. 공화당은 노예제 반대노선을 천명함으로써 옛 자유주의 민주당원들과 반노예주의자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공화당이 노예제 반대 노선을 채택한 것은 도덕적인 동기에서라기보다는 정치 경제적인 이유가 더 컸다. 공화당의 기본적인 주장은 서부를 백인 자유 노동자들에게 개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화당은 노예제 도입에만 반대한 것이 아니라 흑인들의 서부 유입 그 자체에도 반대했던 것이다. 1854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은 100개 의석을 차지하였고, 1960년 11월 6일 선거에서 링컨 후보가 다른 3명의 경쟁자를 물리침으로써 창당 6년만에 정권을 차지하였다.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선거 제도 덕분이었다. 링컨은 최남부에서 거의 득표하지 못했고 일반투표에서도 40%가 못 되는 표를 얻었지만, 표가 나머지 3명에게 분산되었기 때문에 선거인단 투표에서 압승을 거둘 수 있었다.

노예제 반대론자인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지 수일 만에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의회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였고, 1861년 2월 앨라마바, 플로리다, 조지아,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등 남부의 5개 주가 연방을 탈퇴하여 총 6개 주가 ‘남부연합’(Confederacy)을 결성하고 미시시피 출신의 상원의원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1861년 3월 4일 링컨이 비밀리에 워싱턴에서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남부연합은 각주의 권리를 강조하고 노예제를 합법화하는 새 헌법을 채택하였다. 이제 미국의 분열은 현실화되었으며, 전쟁은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었다. 4월 12일 남부군의 뷰리가드 장군이 찰스턴 항구의 연방군 요새를 포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텍사스, 버지니아, 아칸소, 노스 캐롤라이나, 테네시 등 5개 주가 남부연합에 가입하였다. 이로써 미국의 남-북부간의 내전인 남북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2. 델버트 맨 감독의 ‘장갑선’(Ironclads)

 

델버트 맨(Delbert Mann) 감독이 1991년 텔레비전 용으로 제작한 ‘장갑선’은 미국 남북전쟁기의 버지니아 호와 모니터 호간의 해전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알렉스 화이트가 게츠비 대령 역을, 버지니아 매드센이 베티 역을, 리드 다이아몬드가 하몬 역을 각각 맡아 연기하였다. ‘철갑선’은 주로 북부 연방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에 남부 연합이 이후 버지니아 호로 개명된 메리맥 호가 시종일관 메리맥 호로 등장한다.

 

[줄거리]

1861년 4월 20일, 남부 버지니아 주 고스포트(Gosport).

버지니아가 남부연합에 합류하자 연방 정부는 고스항이 남부군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메리맥 호를 포함한 모든 전함과 고스항을 폭파하기로 한다. 고스항 폭파의 임무를 맡은 수병 레슬리 하몬이 고스항이 폭파될 경우 민간인들에게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하여 고의로 도화용 화약을 잘못 뿌려 고스항이 폭파되는 것을 방해한다.

연방정부의 수도 워싱턴의 해군본부에서는 링컨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남부연합이 메리맥 호를 보수한 뒤 철갑선으로 개조하고 있다는 정보에 대한 대비책을 논의한다. 고스항 폭파를 고의로 방해하여 교수형에 처할 위기에 빠진 레슬리 하몬에게는 남부로 잠입하여 메리멕 호에 대한 정보를 빼내 오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버지니아의 노포크로 넘어온 하몬은 베티의 소개로 만난 정보장교 길포드 대위에게 남부연합의 해군에 입대하고 싶다고 의사를 표명한다. 남부 버지니아 출신으로 북부의 볼티모아에서 대학을 다닌 베티는 인간을 노예로 삼는 것이 비인간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연방정부 편을 위해 스파이로 활동하고 있었다. 고스항 폭파를 방해하여 결과적으로 남부측을 도왔던 하몬은 남부에서 영웅으로 대접받게 되어 어려움 없이 메리맥 호에 관한 정보를 얻게 된다. 하몬은 메리맥 호에 관한 정보를 베티의 하녀 오팔을 통해 연방 정부에 보고하고, 남부의 해군에 입대한다.

한편, 연방 정부에서는 선박설계가인 에릭슨이 메리맥에 대항할 수 있는 장갑선을 만들어 내겠다고 제안한다. 해군 내에서는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맞섰지만, 메리맥의 출항이 4~5개월 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90일 안에 철갑선을 건조할 수 있다는 에릭슨의 말에 북부 해군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최종 결정권자인 링컨 대통령은 장갑선 건조에 찬성하고, 배 이름을 모니터라고 짓기로 한다.

남부 연합에서는 철갑의 성능 시험을 위해 3 인치 철판에 대포를 발사한 결과 철판이 뚫려버린다. 그러나 이는 북부 연방에 가짜 정보를 흘리기 위한 거짓 실험이었고, 실제로는 2인치 철판 2장을 덧댄 철판에 대포를 쏜 결과 대포알이 튕겨져 버렸다. 베티 집안의 흑인 하인에게 이를 확인한 하몬은 통상의 대포로는 메리맥의 철갑을 부술 수 없다는 사실을 연방 정부에게 알리는 문제를 베티와 상의한다. 정보 장교인 길포드 대위가 북부에 거짓 정보를 흘리기 위해 오늘 철갑 성능 실험에 간첩 용의자를 초청했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 베티와 하몬은 자신들이 간첩으로 의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정보를 북부 연방에 보내기로 한다. 베티는 자신은 버지니아가 고향이니 하몬에게 그날 밤 해안을 통해 북부로 떠나도록 한다.

그날 밤 애인 게츠비와 산책을 하게 된 베티는 그가 메리맥 호의 부함장으로 승선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란다. 자신이 준 메리맥 호에 관한 정보 때문에 자칫하면 자기가 사랑하는 애인 게츠비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 베티는 서둘러 해안으로 가 하몬에게 북부로 가지 말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하몬은 “메리맥 호를 막지 못하면 남군이 북군의 모든 걸 박살 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영국과 프랑스가 남군을 도우러 들어올 거요. 그것을 막아야 한다”면서 북부로 향한다.

한편 메리맥 호의 철갑이 4 인치나 되고, 남부 연합의 대포가 9 인치 두께의 철판도 뚫을 수 있다는 정보를 접한 연방 정부의 해군에서는 이에 대한 대비책을 찾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모니터 호 제안자인 에릭슨은 메리맥 호의 철판을 뚫기 위해서는 30 파운드 대포를 사용하면 된다고 해군 제독들에게 제안하지만, 대포가 터져버릴 것이라는 일부 해군 장교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결국 에릭슨은 대포의 성능시험을 한다는 데 동의한다.

한편 남부에 남게 된 베티는 애인인 게츠비에게 자신이 메리맥 호에 관한 정보를 주었다고 고백하면서 모니터 호에는 메리맥 호를 능가할 비장의 무기가 있을 것이라고 귀뜸해 준다. 사랑하는 애인인 베티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게 될 첩자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게츠비는 아무 말 없이 메리맥 호로 귀선한다.

1862년 3월 8일. 메리맥 호는 햄프턴 로즈에서 연방 정부군의 전통 범선 컴버랜드(Cumberland)호에 접근하여 함포 공격으로 격침시키는 데 성공한다. 컴버랜드 호 격침 후 본부로 귀항하려던 차에 북군의 콩그레스(Congress)호가 메리맥 호에 근접하여 함포로 공격하지만 대포알이 튕겨져 나가고, 도리어 메리맥 호의 반격에 함장이 치명상을 입어 사망하자 부함장이 백기 투항해 버린다. 2차에 걸친 해전에서 승리한 메리맥 호가 서서히 자기 진영으로 회항하던 차에 북군의 해안 진지에서 총격이 시작된다. 이에 메리맥 호의 함장이 직접 갑판 위로 올라가 대응 사격 하던 중 총상을 입게 되어 게츠비 부함장에게 지휘권이 넘어간다. 한편 북군의 기함격인 미네소타 호가 강 바닥에 얹혀 걸려 옴짝달싹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를 발견한 게츠비 부함장은 근접하여 공격하고자 하지만, 부관은 너무 근접하다가는 메리맥 호도 진흙에 묻혀버릴 것이라며 만류한다. 결국 메리맥 호는 그곳에 머물며 밤을 지샌다.

다음날 연방정부의 스탠튼 비서관 앞으로 ‘컴버랜드에서 125명 사망, 콩그레스 호의 백기 투항’이라는 전문이 날아든다. 북부의 연방으로서는 메리맥 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모니터 호뿐이었다. 링컨 대통령은 ‘모니터 호가 잘 해낼 것이고, 모니터 호가 출항하면 메리맥 호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며 희망을 가진다. 한편 남부에 남아 있던 베티는 간첩 혐의로 길포드 대위에게 체포된다. 첫날의 해전으로 메리맥 호는 바닥에 물이 새고 연통이 박살났으나, 그럭저럭 버틸만한 정도였다. 한편 갯벌에 얹힌 미네소타 호에 승선하게 된 하몬은 버지니아에서 2년간 복무한 덕에 모니터 호의 연락병에 임명된다.

1862년 3월 9일. 메리맥 호가 기동을 시작하여 미네소타 호로 접근하려 하지만, 미네소타 호 뒤편에서 모니터 호가 나타난다. 메리맥 호가 선제공격을 하고, 모니터 호가 반격을 시도하지만, 두꺼운 장갑 덕에 포탄이 튕겨져 나가 버린다. 교전이 진행되는 사이 메리맥 호의 선저가 갯벌 위에 얹히고 만다. 모니터 호로서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였지만, 선회 포대가 바닷물에 녹이 쓸어 회전이 안되어 근접하여 포격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게츠비 부함장은 기관을 전속 후진하여 메리맥 호를 이탈시키는 데 성공한 뒤 모니터 호에 포격을 가하고, 모니터 호도 포격을 계속한다. 포격으로 아무런 타격을 입히지 못하게 되자 게츠비 부함장은 충돌 전법을 구사하려고 시도한다. 메리맥 호의 충돌 시도에 놀라 모니터 호가 주춤하는 사이에 메리맥 호의 포격에 모니터 호의 함장이 실명한다. 이에 모니터 호는 메리맥 호가 추격하지 못하도록 수심이 얕은 곳으로 피하고, 메리맥 호도 미네소타 호를 공격하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썰물이어서 수심이 얕고 강 바닥에 얹히게 될 경우 선저가 갈라질 염려가 있고, 연료도 충분하지 못하여 결국 고스항으로 회항한다. 미네소타 호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한 모니터 호도 메리맥 호를 추격하지 않아 역사적인 두 철갑선 간의 교전은 중단된다.

교전 결과에 대해 북부와 남부는 각각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한다. 남부에서는 메리맥 호가 북부측 전함 2 척을 파괴했으니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하고, 북부에서는 3 척을 목표로 했던 메리맥 호가 2 척 밖에 파괴하지 못하도록 막았으니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한다. 링컨 대통령이 ‘서로 비겼다’고 말하는 찰나에 모니터 호를 건조한 에릭슨이 ‘메리맥 호의 철갑을 뚫기 위해서는 30 파운드 대포를 사용해야 하는데 15 파운드 이상을 사용하지 말라고 명령한 이유를 해명해 줄 것’을 요청하며 들어온다. 대포가 터질 것을 염려하여 30 파운드 대포의 시험발사를 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에릭슨이 크게 화를 내자 링컨 대통령이 건조자금을 지불해 주겠다며 진정시킨다.

한편 남부에서 간첩혐의로 체포된 베티는 게츠비에게 제공한 정보 덕분에 메리맥 호가 승리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석방된다. 그러나 사실은 게츠비가 모니터 호에 15 파운드 대포를 쓰지 않은 것이 베티가 준 거짓 정보 때문이라고 거짓 보고를 내린 덕분이었다. 게츠비는 사랑하는 애인 베티가 처형되는 것을 막기 위해 거짓말을 했지만, 그녀가 빼낸 정보 때문에 남부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며, 결혼할 수 없으니 북으로 가라고 말한 뒤 마차에 오른다. 베티는 떠나가는 게츠비를 쓸쓸히 지켜보고 있다. 햄Ⅱ톤 로즈의 해전 이후 메리맥 호는 남부군이 노퍽을 포기할 때 불태워졌고, 모니터 호도 1862년 12월 월밍턴 전투에 참전했다가 폭풍으로 침몰하였다.

 

델버트 만 감독의 ‘장갑선’은 역사적 사실과 재미를 동시에 추구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여자(베티)와 두 남자(게츠비와 하몬)의 삼각관계와 한 여자의 존재(남부출신)와 이상(북부의 노예제 폐지 지지) 사이의 갈등을 통해 역사 영화의 지루함을 이겨내려고 시도하는 한편, 남북 전쟁기의 버지니아 호와 모니터 호의 역사적 사실을 전개시켜 가고 있다. 영화의 제목이 주는 역사 영화라는 선입견을 갖고 이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영화의 주제와는 관계없을 것 같은 애정 문제가 영화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에 불만일 것이다. 실제로 아마존에 영화평을 남긴 평자 4명 중 3명이 이것이 영화의 가장 큰 흠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베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애정 전선과 베티의 내면의 갈등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지리한 역사 다큐멘터리가 되었을 것이 뻔하다. 델버트 만 감독은 전쟁 속에서도 비교적 평온하게 지내온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내어 남북전쟁 중의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고, 철갑선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정보 탐색전과 해전의 양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아마존의 평가에서는 별 세 개를 얻었다.

 

 

3. 남북전쟁과 해전 : 모니터 호와 버지니아 호의 대결

 

남북전쟁은 육전 위주로 전개되었고, 해전이 전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역사상 처음으로 철갑선간의 해전이 치러진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남북전쟁을 이야기할 때 해전을 빼놓고 기술할 수는 없게 되었다.

미국은 독립전쟁기에도 영국과 크고 작은 해전을 치러야 했고, 나폴레옹전쟁기에도 영국 해군과 싸운 바 있었다. 특히 1812~1815년 사이에 치러진 나폴레옹전쟁기에 미국의 해군이 대서양에서 영국 해군을 1 : 1로 싸워 이긴 통상파괴전의 경험과 기억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해군의 존재 의의를 인식시킨 계기였다.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뒤인 1816년 연방 의회는 매년 100만 파운드를 지출하여 74문급 전열함 9척, 44문급 프리깃함 12척, 증기추진식 전함 3척을 6년간 건조하는 법안을 제정하였다.

1861년 남북전쟁 개전 시점에서 해군의 대부분은 북부의 연방에 속하게 되어 남부연합은 매우 불리한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해전은 주로 북부 연방이 주도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남북전쟁기의 해전은 크게 세 가지 양상으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연방의 함선이 육군과 연합하여 미시시피강이나 테네시강을 따라 남부의 주요 도시나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북부 연방 해군은 미시시피강 종단작전을 구사하여 데이비드 포터가 지휘하는 범선 전함들이 미시시피강의 북쪽에서 하류로 진출하고, 멕시코만의 하류 쪽에서는 패러거트가 지휘하는 함대가 상류 쪽으로 압박하였다. 북부 연방의 두 함대는 남부의 하천 함대를 격파하고 마침내 1863년 7월 미시시피강에서 오하이오강에 이르는 수로를 확보하였다.

두 번째는 남부연합이 주도하는 통상파괴전이다. 개전 초기에는 남부연합의 사나포선 다수가 활약하였으나 북부연방의 해안봉쇄가 강력해지자 점차 사라지고, 정규 전함들이 이를 대체하였다. 남부연합은 이러한 목적에 활용하기 위해 유럽에서 비무장 범선을 구입하여 아조레스제도나 바하마제도에서 전함으로 의장한 뒤 실전에 투입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통상파괴함은 셈스(Semmes) 함장이 지휘하는 앨러바마 호였다. 앨러바마 호는 1862년 9월부터 1864년 4월까지 북대서양의 통상파괴전에 투입되어 북부측 상선 71 척을 나포하여 북부 연방의 대유럽 무역에 타격을 입혔다.

세 번째는 새로운 무기와 전함이 실전에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어뢰, 어뢰정, 기뢰, 잠수함 등이 비록 실험단계이긴 하지만 실전에 사용되어 성과를 올렸고, 장갑함이 건조되어 해전에 투입되었다. 남부연합은 부르크(J.M. Brooke)라는 조선 기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고스항에서 포획한 배수량 4000톤급, 전장 275.5피트인 증기 프리깃함 메리맥 호를 장갑선으로 개조하였다. 메리맥 호의 수선부로부터 2 피트 위의 선체 부분을 철거하고, 그 위에 2인치 두께의 철갑을 두 겹으로 설치하였다. 그리고 9인치 포 3문과 6인치 포 2문을 설치하여 무장하였다. 당시 남부연합은 제철공업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서 철판의 조달이 수월치 않아 예정보다 많이 늦어져 1862년 2월에야 취역하였다. 이로써 북부 연방 소속이었던 메리맥 호는 남부 연합의 버지니아 호로 재탄생하였다.

 

북부 연방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1861년 9월 연방의 웰즈(Wells) 해군장관은 해군위원국 내에 장갑함 위원회(Ironclad Board)를 두고 봉쇄작전에 사용할 연안용 장갑함 건조 문제를 검토하도록 했다. 장갑함 위원회의 검토 결과 3 가지 유형의 장갑함이 북부 조선소에 발주되었고, 그 중 하나가 에릭슨(Ericsson)이 고안한 모니터 호였다. 스웨덴 출신의 기사인 에릭슨은 스티븐슨과 와트 등과 더불어 증기 시대를 주도한 기사이자 발명가였다. 그는 1829년 영국의 리버풀 앤 맨체스터 철도 회사가 공모한 증기 기관차 콘테스트에 노벨티(Novelty) 호를 출전시켜 1분에 1 마일을 달리는 데 성공하였으나 고장으로 완주에 실패하여 스티븐슨 부자의 로켓(Rocket) 호에 패하고 말았다. 에릭슨은 1836년에는 이중 반전식 스크류를 개발하여 특허를 받고 영국 해군으로부터 4000파운드의 상금도 받았으나, 1839년 미국 해군의 스탁턴 대령의 권고로 미국으로 이주하여 스크류 추진 슬루프 함인 프린스턴(954톤) 호를 1843년 거의 완성하였으나, 스탁턴 대령이 설계한 12인치 포가 폭발하는 바람에 건조작업이 중단되고, 미국 해군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남북전쟁기에 북부 연방이 메리맥 호에 대항할 수 있는 장갑함 설계를 의뢰해오자 에릭슨은 해군과 상대하기를 거부하고 링컨 대통령에게 직접 설계도를 제출하고 100일 이내에 건조할 수 있다고 호언하였다. 1861년 10월 브루클린 조선소에서 착공된 모니터 호는 채 에릭슨의 호언대로 채 3개월도 지나지 않아 준공되었다.

 

배수량 987톤인 모니터 호는 11인치 포 2문을 갖춘 회전식 포탑 1개를 갖춘 장갑함으로 포탑을 제외한 선체가 수중에 잠겨있는 독특한 선형의 전함이었다. 하부 선체는 목제로 길이 124 피트, 너비 34피트, 깊이 5.8피트이고, 상부 구조는 길이 172피트, 너비 41.5피트, 높이 5피트로서 두께 5인치 철판으로, 갑판은 두께 1인치 철판으로 각각 장갑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모니터 호의 갑판상에는 포탑 이외에 선수에는 작은 조종실이, 선미에는 굴뚝과 환기통이 있을 뿐이었다.

 

모니터 호와 버지니아 호는 1862년 3월 9일에 마침내 운명적인 결전을 치를 준비를 마치게 되었다. 당시 북부 연방은 요크강과 제임스 강이 만나는 햄프턴 로즈(Hampton Roads)를 컴버랜드 호, 콩그레스 호, 미네소타 호 등을 동원하여 봉쇄하고 있었다. 3월 8일 햄프턴 로즈에 다다른 버지니아 호가 컴버랜드 호를 격침시키고 이어 콩그레스 호를 대파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다음날 버지니아 호가 미네소타 호를 공격하려던 찰나에 햄프턴 로즈에 도착한 모니터 호를 맞이하여 장장 6시간 동안 포격전을 전개하였지만, 서로 상대함에 치명타를 입히지 못하고 퇴각하고 말았다. 햄프턴 로즈의 해전으로 장갑의 효과가 입증됨으로써 이후 남부 해군은 모두 장갑함 건조에 주력하게 되었다. 하지만 공업 생산력이 절대적인 열세인 데다 유럽과의 해상로가 그리 자유롭지 못한 남부 연합이 해전에서 북부 연방에 맞설 수는 없다. 북부 연방이 승전할 수 있었던 것이 전적으로 해군에서의 우세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연방의 해군이 근해 수역에 대한 해양력을 장악하여 남부 연합의 대외 교역을 차단함으로써 그들의 전쟁 수행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 승전의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햄프턴 로즈 해전 이후 버지니아 호는 1862년 5월 남부 연합이 노포크를 포기하고 퇴각할 때 소각되어 침몰하였다. 낮은 건현 때문에 항해에 어려움을 겪었던 모니터 호는 1862년 12월 해터라스 곶(Cape Hatteras)에서 폭풍으로 장교 2명과 사병 12명 등과 함께 침몰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략)…………………

 

□ 김성준,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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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수록 지면 : <해양과 문학> 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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