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란만에 눕다(곽민호)

등록일202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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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란만에 눕다

 

윤삼월의 봄 바다. 새벽 해무(海霧)를 가르며 내가 탄 배는 이제 막 솔섬을 지나고 있다. 자란만에 드문드문 떠 있는 뗏마 위로 지난 밤을 꼬박 새웠을 낚시꾼들의 실루엣이 천천히 드러났다. 잔잔한 파도만큼이나 정제된 낚시꾼들의 등 뒤로 어느새 일출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 바다 한가운데서 일출을 보다니? 육지에서 이십여 분밖에 나오지 않았건만 내가 있던 곳에서 아주 멀리 와 버린 느낌이 들었다. 평생 육지에 발붙이고 살다 이렇게 직장 동료 상수의 감성돔 낚시에 선뜻 따라나선 것도 이 순간의 감동을 얻기 위함이었던가? 휴대폰을 꺼내 산등성이를 붉게 물들이며 솟아오르는 오늘의 태양을 찍었다. 생애 처음으로 이렇게 바다 위에서의 하루가 시작됐다.
우리 일행이 뗏마로 옮겨타자 선장은 몰밭이 듬성듬성 보이는 양식장으로 배를 몰아 우리의 뗏마를 단단하게 고정시켜주고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 갔다. 너울이 심할 때는 어김없이 좌우로 흔들리며 바다 위라는 것을 실감나게 했지만 이내 평온을 되찾는 뗏마 위에서 뭍에서 가졌던 바다에 대한 단상들이 잘게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끝없이 파도가 넘실대거나 폭풍우가 몰아치곤 하는 상상 속의 바다는 여명의 햇살을 받으며 반짝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 사이 상수는 채비를 갖추고 감성돔을 향한 끝없는 기다림을 시작했다. 몇 번의 입질이 시작되고 보리멸과 황복 몇 마리가 긴장감을 더해주기도 했지만 기다리던 감성돔은 아직 나타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어신(魚神)”이라고 했을까? 들물과 날물의 경계지점을 유유히 돌아다니며 미끼를 덥썩 물었다가 이내 뱉어버리곤 한다는 그 영리함이 낚시꾼들에겐 마치 신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기다림은 낚시꾼에게 배워야할 덕목 중 하나였으리라. 수 백 수 천 번의 챔질 끝에 누리는 ‘손맛’이 있기에, 그 희열을 느껴본 사람이어야만 그렇게 또 느긋하게 낚시대를 드리우는 것이리라. 몇 물이나 지났을까? 해가 중천을 지날 동안 그나마 있던 입질도 사라지고 무심한 초리 끝을 몇 시간째 바라보고 있자니 지난 밤의 피곤이 몰려왔다. 뱃고물 사이로 찰랑찰랑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가는 것도 모른 채 아주 깊이 잠이 들었다. 출렁이는 뗏마가 마치 내 어머니의 자궁처럼 편안했다. 눕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었던 편안함은 이내 꿈으로 이어졌다.
“캄캄한 숲속인지 바닷속인지도 모를 공간에서 허우적거리던 내 발밑에 툭 떨어진 기이한 물체, 쉽사리 분간이 되지않는 외모는 오히려 사람을 더 불안케 했다. 애써 용기를 내어 만져보니 따뜻했다. 따뜻한 생명이 느껴졌다.” 경계없는 바다 그 경계를 뚫고 내 발 밑에 뚝 떨어진 물체 그것은 유인(遊刃)의 바다를 유영하던 감성돔은 아니었을까?
장자(莊子)의 가르침 속에 ‘유인(遊刃)’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뜻은 ‘칼을 가지고 자유자재로 매우 잘 쓴다’는 뜻이다. 옛날에 소를 아주 잘 잡는 백정이 있었다. 그는 소를 잘 잡기로 칭찬이 자자했고 어느날 왕에게까지 그 소문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왕은 어떻게 하여 그가 소를 잘 잡는지를 보려고 푸줏간으로 갔다. 그 백정은 소를 잡아 살을 뜨고 뼈를 가르는데 마치 곡조에 맞추어 춤추듯 하여 그 모습은 하나의 예술로 승화되는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왕은 감탄한 나머지 그에게 칼을 멈추게 하고 어떻게 하여 소 한 마리를 그렇게 잘 가르는지를 물었다. 그는 처음에 백정이 되었을 때는 소가 한 덩어리로 보였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소 한 마리가 살과 뼈로 완전히 분해되어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소 한 마리를 잡을 때 완전히 분해된 상태에서 텅 빈 공간과 공간 사이를 지나면서 칼질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완전한 음악의 동작에 맞추어 텅 빈 공간을 춤추듯 칼질한다고 해서 ‘유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유인’의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 한 마리의 진짜 모습은 무수히 많은 공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즉, 존재의 실상은 꽉 차 있어서 아무 빈틈이 없는 것이 아니라 텅 빈 공간을 무수히 많은 것으로 보라는 뜻일 것이다. 그렇게 감성돔 역시 꽉 찬 바다의 텅 빈 공간을 가르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형! 뜰채, 뜰채!”

 

상수의 다급한 소리가 잠을 깨웠다. 놀란 눈을 부비고 일어나니 잔뜩 긴장한 초리 너머로 그렇게 기다리던 감성돔이 드디어 걸려들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몇 번의 줄다리기 끝에 드디어 나타난 감성돔은 그야말로 어신의 자태였다. 이젠 뜰채 안에 갇혀버린 감성돔의 싯푸른 등이 황홀하게 내 눈을 찔렀다. 내 손에서 팔딱거리는 ‘생명’에서 느끼는 이 거대한 경외감은 어디서 온 것일까? 경계없는 바닷속 경계를 뚫고 내 눈 앞에 나타난 이것이야말로 조금 전 내 꿈에 나타났던 바로 그놈이 아니었을까? 자란만 한가운데서 오수(午睡)를 즐기던 나는 그렇게 감성돔에게 오수(午睡)의 자리를 물려주고 다시 뭍으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하략)…………………………

□ 곽민호, 2004년 ≪시와 반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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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수록 지면 : <해양과 문학> 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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