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있는 달빛 바투길, 달빛 가온 길(안효희)

등록일202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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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있는 달빛 바투길, 달빛 가온 길

 

부전역 10시 20분발 무궁화호 열차를 탄다. 작은 보따리를 든 중년의 사람들이 천천히 느리게 타고 내린다. 불국사를 거쳐 포항까지 가는 동해남부선이다. 동래역 수영역 해운대역 송정역, 고향마을의 기와집 같은 간이역을 하나하나 쓰다듬으며 열차는 도심을 빠져나간다. 작은 산을 에둘러 바다와 맞닿은 길. 길은 언제나 곡선이다. 달리다 쉬다를 반복하는 사이, 점점 자연의 색이 짙어지기 시작한다.

송정에서 내려 부산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맨발로 달려들고 싶은 옥빛 바다,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어촌 구덕포의 풍경은 평화롭고 조용하다. 구덕포는 약 300년 전에 함안 조 씨에 의해 형성된 동해안 최남단에 있는 소박한 마을이다. 저 멀리 간지등대가 보이고, 영화 <친구>의 촬영지이며, 가지와 줄기가 땅에 붙은 특이한 형상을 한 300살이 넘는 해송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매년 음력 정월과 유월 열 나흗날 자정이면 용왕제를 지내는 곳, 평생을 한 자리에서만 사는 따개비들이 바위마다 따닥따닥 붙어 이 오래된 마을을 떠나지 않고 있다. 오랜 세월로 시퍼렇게 멍이 든 바다를 왼쪽 옆구리에 매단다. 출렁출렁 철썩이는 해안길을 걷는다. 나도 휘어져 굽은 나무 한그루가 되기도 하고 굴러서 떨어진 돌멩이 하나가 되기도 한다. 너는 언제부터 너였으며 나는 언제부터 나였는지… 자꾸만 따라오는 파도를 향해 시의 한 구절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를 연신 뱉으며 뱉으며…

둘이서 셋이서 함께 걸어도 자꾸 혼자가 되는 바닷길을 걷다보면 청사포에 닿는다. 황홀한 일출로 유명한 “靑沙浦”, 즉 ‘푸른 모래의 포구’라는 이름이지만 원래의 한자명은 ‘푸를 청’에 ‘뱀 사’였다는 사실을 아는가! ‘고기잡이 나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는 여인이 있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용왕이 푸른 뱀을 보내 부인을 용궁으로 데려와 죽은 남편과 상봉시켰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오솔길이 있는 숲 속으로 들어선다. 이제부터 우리를 반기는 것은 달빛 바투길, 달빛 가온길. 해운대 달맞이 언덕 아래까지 해안등선을 따라 걷는 산책로에 든다. 문탠 로드(Moontan Road), 햇볕그을음(Suntan)과 대칭되는 <달빛그을음>이라는, 사전에도 없는 말을 가진 길이다. 햇빛이 아닌 달빛으로도 살갗이 그을어질까! 아니면 투시카메라에 의해 드러나듯 감추어둔 마음이 수면으로 드러나 그을리는 길일까! 일몰시부터 밤 11시까지, 새벽 5시부터 여명까지 달빛과 함께 조명이 밝혀지는 길이다. 저 멀리 맞닿은 하늘과 바다 그리고 사람이 삼각형 모양을 이루며 서로 손잡고 걸어가는 곳이다.

비탈진 바위 언덕에도 유월이 피고 칠월이 핀다. 별처럼 달처럼 하얀 찔레꽃 한 잎 떼어 입에 넣는다. 죽을 때 죽더라도 꽃잎을 보면 먼저 입에 넣어보는 습성! 냄새와 맛을 동시에 느끼며, 꽃잎이 가진 소리와, 간밤의 꿈까지 들여다보고 싶은 내면의 욕구를 막을 수 없다. 그러다 온 몸에 꽃잎의 붉은 독, 노란 독, 푸른 독이 천천히 퍼지기를 바라며… 나는 늘 중독 상태로 살고 있는 것이다. 철썩이는 바다, 푸른 숲길이 있는 작은 오솔길의 입구에 설 때마다, 나도 이런 곳에서 살다 죽을 수 있기를… 어부와 해녀가 바다에서 죽는 것이 자연사自然死이듯 나의 자연사는 그렇게 자연 속에서 죽는 것.

먼 수평선을 보다 발부리에 툭! 돌이 차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옆엔 두 개의 영원한 평행선, 철도가 나타나 있다. 지금은 모두 통행금지구역이 된 기찻길. 저쪽 모퉁이에서 기차가 달려올 것만 같은 설렘과 두려움을 밀어내며 잠시 금지된 길을 걷는다. 마음은 벌써 이 철도를 따라 영동선을 바꿔 타고 정동진, 속초를 향하여 달리고 있다. 단단하고 미끄러운 선로 표면을 만져보고 디뎌본다. 양팔 벌린 어린아이가 된다. 줄줄이 늘어선 왕벚나무, 단풍나무가 웃는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파릇파릇 상추밭을 지나자,

“와아! 자주감자꽃이다.”

흔히 볼 수 없는 자주감자밭, 할머니 한 분이 풀을 뽑으며,

“아주 맛있는 감자라우!”

땅 속 주렁주렁 매달린 할머니의 자주감자를 생각하며 발을 내딛는 그때, 아악! 저 앞에서 들리는 비명. 뱀이다. 60~70센티미터나 되어 보이는 뱀이 바닷가에서 산 쪽으로 길을 건넌다. 나는 ‘용왕이 보낸 푸른 뱀’을 생각한다. 여기 또 한 남자가 죽어 또 한 여자를 단장의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단 말인가! 멀리서 들려오는 서걱이는 울음을 듣는다.

바람에 바람을 실어 보내며 접어드는 길은 달맞이 고개의 끝자락인 해운대 미포다. 달맞이 고개가 있는 와우산은 소가 누워있는 형상으로 미포는 이 소의 꼬리 부분에 해당된다. 언젠가 시골 바닷가 첫 번째 집에서 밤을 보냈다. 베갯머리까지 다가와 철썩이는 파도소리에 쓸려 갈 것만 같아 마당으로 나왔다. 교교한 달빛아래 비친 바다와 섬과 고깃배, 그리고 바다 위에 뜬 하늘과 별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몇 개의 별이 반짝이는 말을 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높지도 않은 곳에서 고산병 같은 어지럼증이라니! 그것은 행복으로부터 발생하는 불안, 안헤도니아(aanhedonia)현상이다. 기쁨이나 설렘, 행복이 크면 클수록 더 커지는 불안이나 염려다. 등을 맞대고 사는 샴쌍둥이와 같이 바닷가의 해와 달, 별의 찬란함 속에서 나는 언제나 수많은 울음을 듣는 또 하나의 주파수를 가졌다. 그 울음에 재갈을 물리고 헤엄쳐 온 물고기들의 눈빛은, 모딜리아니 그림 속에 있는 15도 슬픔의 각도를 닮았다. 그동안 내가 걸어온 길 바람 속에 든 것들을 양 팔 벌려 품에 안아 본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읽고 있다. 내가 창조해야 할 침묵의 말을 찾아 헤매고 다녔다. 파도는 하루에 칠천 번을 다가와 철썩이며 침묵의 소리를 들려주고 침묵으로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었지만, 무수히 내뱉은 나의 말들은 순간마다 바위에 부딪쳐 산산조각, 하얀 포말로 사라지고 있다. 세상은 그렇게 철썩이며, 지저귀며, 서걱이며 다가오는 것. 쉽사리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맹세할 수 없는 나는 산 너머의 바다를 향하여 앉아 있다.

바다가 일어선다. 바다와 함께 사는 법을, 바다처럼 사는 법을, 훨훨 날아가는 바다가 되는 법을 노래하려는가! …………………(하략)…………………

 

□ 안효희, 1999년 계간 ≪시와사상≫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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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해양과 문학> 11, 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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