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간 한국 영화(김희진)

등록일202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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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간 한국영화 1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대양이여, 너는 나의 형제가 되겠는가? 내가 너를 신의 복수에 비유하기를 바라거든, 맹렬하게… 더욱… 더욱 더 맹렬하게 네 몸을 뒤흔들라. 너 자신의 가슴 위에 길을 트면서, 납빛의 네 발톱을 뻗쳐라…” <말도로르의 노래-로트레아몽>

 

1992년 개봉한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홍기선 감독)는 한국영화사에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가진 작품이다. 5.18 광주를 다룬 독립영화 <오 꿈의 나라>의 각본에 참여했던 홍기선 감독은 비제도권 영화의 상징적 존재였다. 그런 그가 제도권 영화의 영역에 도전장을 내민 작품이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로 당시 제도권 상업 영화에서 다루기 어려웠던 민중의 밑바닥 삶을 철저히 독립영화 제작 방식으로 만든 작품이다.
그때 시기엔 검열의 칼날이 영화를 제단하고 제작자나 감독을 쉽게 구속하던 일이 많았기에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와 같은 영화를 제작하고 일반 상영관에 개봉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자 혁신적인 도전이었다. 대중 극장의 배급망을 통해 전국적으로 개봉되진 못했지만 일반 관객과의 만남을 위해 영화 상영이 가능한 장소를 물색하여 대안적 상영을 감행한 것도 이 영화의 의미를 더욱 가치 있게 만들었다.
더욱 이 영화가 의미를 가지는 점은 한국영화에서는 보긴 드문 해양영화라는 데 있다. 해양영화는 다른 영화에 비해 그 제작 과정이 쉽지 않고 그에 따른 제작비도 만만하지 않아 제도권 영화에서 해양영화는 제작을 기피하는 장르에 속했다. 당시 일반 상업 영화가 지향했던 영화는 일반 대중이 쉽게 즐기며 볼 수 있는 풍속적 오락 영화로 흥행이나 제작비 마련에 어려움을 줄 것 같은 해양영화의 제작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고 하겠다. 그 때 상업 영화에서 떠올릴 수 있는 해양 영화란 <포세이돈 어드벤처>나 <죠스>와 같은 할리우드 영화였기에 그러한 영화를 만들 만한 기술적 능력도 가지고 못했고, 동시에 막대한 제작비 부담을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홍기선 감독은 이런 상업 영화와는 생각과 입장이 달랐다. 그는 삶을 위해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길 원했고, 그 생각은 곧 시대의 아픔을 바다를 통한 은유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가 선택한 방법 또한 뜻을 같이 하는 독립영화인들과의 협력 작업을 통하여 열악한 제작 여건을 열정과 품앗이 정신으로 해결해냈다. 할리우드 해양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멋진 풍경과 첨단 기술이 만들어내는 비주얼을 그는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굳건한 주제 의식으로 사실적인 바다 이야기를 인간 중심으로 풀어내고자 했다. 결국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는 영화에서 보여 지는 답답한 환경만큼 바로 그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의 본질에 충실히 다가갈 수 있었다.

 

어스름이 아직 남은 새벽의 목포항에 한 남자(재호)가 다리를 절며 나타난다. 떠돌이 행상의 제호가 찾고 있는 것은 뱃일이다. 국밥과 소주 한 병으로 허기와 추위를 달래고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해진 지폐와 동전 몇 개를 추슬러 값을 지불하는 재호는 인생의 마지막에 와 있는 인상이다. 가게 주인에게 뱃일을 묻고 심드렁한 반응에 식당을 나선 제호의 앞엔 비릿한 푸른 생선 냄새가 대기를 적신 눅눅한 풍경이 삭막하게 놓여 있다. 이 영화의 첫 도입부의 한 장면에서부터 우린 바다의 냄새에 깊이 물든다. 차갑고 푸른 풍경은 시종 이 영화를 지배하는 배경이다. 재호가 바다에서 일을 하는 몇 장면과 사공 제안을 선주로부터 받는 장면을 제외하고 이 영화의 대부분 시간은 어둠이 지배하는 밤과 어스름의 새벽, 그리고 황혼 무렵이다. 막막한 어둠의 공간과 실체를 잘 분간하지 못하는 어스름의 시간에 갇혀 있는 재호는 시대의 어둠 속에서 갈 곳을 찾고 있다.
재호는 한 호객에게 뱃일 알선을 주선해 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그가 불러들인 사람들을 따라간 제호는 배를 태워 주겠다는 약속에 그들이 제공해 주는 숙소에 머문다. 험한 인상의 그들이 어르고 협박하는 동안 재호는 불안을 느끼지만, 도망치지 않는 것은 어떡하든 뱃일을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밤이 되고 그들이 제공한 술자리에 가지 않은 재호의 방에 바닷가 창부 생활로 인생을 다 보낸 듯 보이는 여인이 찾아온다. 연민으로 관계를 맺고 마는 재호. 다음 날 그들은 배가 마련되었다며 그간의 경비를 계산하는데, 호객꾼에게 준 알선비에 식대며 숙박비, 거기다 지난밤에 찾아 온 여인의 화대와 시쿠미[仕入] 비용까지 재호에게 빚을 안긴다. 게다가 제호가 타야할 배는 멍텅구리배이다.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첫 상황에서부터 분명해 진다. 다리를 저는 데다 막판일이라는 뱃일을 찾은 재호에게 다가온 것은 힘과 농간을 앞세운 무리의 억지스런 폭력이다. 그들은 자본이라는 매개를 통해 한 인간을 옭아매는 술수에 능하다. 인신매매라고 불릴 이런 일은 당시 우리 사회에 만연했던 폭력이다. 착취는 노동을 필요로 하는 현장에선 언제나 발생하고 이를 정당화 시키는 것은 언제나 자본을 통한 지배 논리이며, 그 배후에는 가지지 못한 자를 협박하고 구속하는 힘의 패거리가 존재한다. 이 불합리한 현실이 어떤 배경 속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리고 그러한 현실에 놓인 인간들의 역학관계는 어떠한지를 영화는 차분히 따라가기 시작한다.
섬을 오가는 여객선에 끌려 탄 재호는 죽을 결심으로 그들에게 대항한다. 허나 수에 빌려 재호는 제압당하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경찰들은 오히려 그들을 비호해준다. 결국 멍텅구리배 까지 끌려 온 재호는 망망대해에 떠있는 그 배에서 마저 다리를 저는 병신 소리를 들으며 환대 받지 못한다. 멍텅구리배란 동력이 없는 배를 일컬어 부르는 말로 지정된 어장에 닻을 내리고 섬처럼 묶여 있는 배를 말한다. 그 곳에서 일하는 이들을 끌고 온 배를 가진 이들이 이른 바 동력을 가진 자들이라면 그 곳에 붙잡혀 일하고 있는 이들은 동력을 가지지 못한 곧 멍텅구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비롯되는 이분법은 이 영화에서 결국 말하고자하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이면서 사회에 만연된 억압 관계의 은유로 작용한다.
개구리와 안강망을 타 본 경험이 있는 재호는 뱃일을 곧잘 해나간다. 하지만 멍텅구리 새우잡이배 내에서도 지배자가 있고 피지배자가 존재한다. 선주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사공의 지시에 굴복해야 하는 것이다. 재호가 탄 배에는 사공 외에 네 명의 어부가 있다. 노인 천씨, 원양어선을 타러 왔다가 속아서 끌려온 길재, 사기 전과로 수배를 받고 있는 정복춘, 가출 소년 장민성, 이들이 가진 각각의 배경은 이 멍텅구리배가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인상을 준다.
배에서의 일상은 단조롭다. 새우를 건져 올리는 일 외엔 짧은 수면과 함께하는 식사, 그리고 가끔 나누는 잠자리에서의 농담들이 전부다. 그들을 바깥세상과 연결지어 주는 것은 낡은 트랜지스터라디오 한대와 며칠 간격으로 새우를 옮기러 와서 부식을 내려 주고 가는 선주의 동력선이 전부다. 이들이 갖는 작은 희망은 사공이나 선주에게 잘 보여 육지 구경을 나가는 것과 맘껏 술을 마시는 정도다. 여기서 트랜지스터라디오의 역할은 꽤 중요하다. 라디오를 통해 관객은 이들이 처한 시대적 배경을 깨닫게 된다(앞서 국밥집에서 재호가 밥을 먹을 때 켜져 있던 텔레비전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하는 장면이 보여 지는데, 라디오에 앞서 시대적 정보를 알려 주지만 이때의 인식이 단지 시간적이라면 배에서의 라디오는 의미적이고 더욱 은유적이다).
1987년은 한참 우리나라가 소란스러웠던 시기로 영화는 군부정권 말미의 변화상을 멍텅구리배라는 은유의 공간에 그대로 대입해 놓는다. 라디오는 어부들 뒤편에서 자연스럽게 뉴스를 흘려보내며 망망한 바다의 풍경을 정치적 현실에 빗대어 놓는다. 대중가요를 듣자며 주파수를 돌리는 정복춘의 행동처럼 멍텅구리배에 갇힌 이들에게 바깥세상의 변화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삶의 밑바닥을 살아가는 이들과 분리된 채 흘러 온 정치사회현실은 얼마나 덧없는가. 영화의 결말에 그들이 맞는 죽음이 결국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잘못된 일기예보와 관계있음을 인식할 때 이 점은 더욱 강조된다. 이 거짓되고 현실에 밀착되지 않은 라디오-전파는 결국 누구의 소유인지가 이 영화의 중요한 메타포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결국 영화는 동력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과 동력을 소유한 자들, 그리고 그들 위에서 전파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는 데 까지 나아간다.
선주의 선심으로 섬에서 하루를 쉬게 된 그들은 선주가 제공해 준 술이 모자라 결국 외상을 달고 빚이 늘어 날 것을 알면서도 술을 들이 붓는다. 공중전화를 찾은 재호는 섬에서 유일한 전화기가 고장 나 있는 걸 알고 화가 치민다. 술에 취한 재호는 그날 밤 섬에 팔려와 몸을 팔고 있는 순영을 만난다. 순영은 앞을 보지 못한다. 재호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시대의 어둠에 갇혀 있다.
다음 날 마도로스를 꿈꾸던 길재는 야밤에 물로 뛰어들어 도주를 하고 생사가 모호해진다. 계속해서 탈출을 꿈꾸던 재호는 천씨 노인이 배에 계속 남아 있는 이유를 궁금해 한다. 천씨는 이런 말을 해준다. “자네는 저 넓은 바다가 아직까지 바다로 남은 까닭을 아는가, 힘이 없어 그런 게 아니여, 바다는 지 자신을 아는 법인께” 천씨 노인은 이미 지배 권력으로부터 굴복한 그 시대 기성인의 전형을 보여주며 시대에 안주하여 사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시든 육체를 대표한다.
길재의 빈자리를 매우기 위해 새로 잡혀온 달수는 정신적으로 조금 문제가 있는 청년이다. 조금 덜 떨어진 달수는 배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다. 조금 더 모지란 이는 조금이라는 나은 이들에게 억압을 받는다. 재호는 동력선을 탈취하여 탈출할 것을 동료들과 모의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고자질로 재호는 심한 매를 맞는다. 고장 난 전화와 눈먼 순영처럼 세상은 소통이 차단되어 있고 암흑으로 가득함을 재호는 점차 깨닫는다. 천씨처럼 바다에 물들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재호는 태도를 바꾸기 시작한다. 순종적으로 변해 버린 재호는 사공과 선주의 총애를 받으려고 애쓴다. 결국 재호는 앞 사공의 뒤를 이어 새로운 사공의 역할을 맡게 된다. 사공이 된 재호는 이전과는 달라져 억압적이고 폭력적이 되어 동료들의 미움을 사게 된다.
재호의 변화는 영화에서 인간의 본질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려는 태도와 연결된다. 억압받던 자가 힘을 얻어 억압할 수 있는 자로 바뀌어 태도가 변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다양한 현상들 중 하나다. 흔히 군대 사회에서 계급의 변화가 주는 태도 변화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일반화된 사회는 폐쇄적일 수밖에 없다. 마치 바다를 어디든 나아갈 수 있는 희망적 대상으로 보느냐 배나 섬을 고립 시키는 강제적 대상으로 보느냐의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 재호의 선택은 희망을 잃은 자의 태도로 보아진다. 하지만 영화는 열린 공간으로 나가고자 하는 희망을 완전히 버리진 않는다. 그건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가 이 사회에 던지고자 한 메시지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조금 더 깊이 있게 이 사회의 부조리를 지적하고자 한다.
어느 날 밤 재호는 천씨로부터 사과를 받는다. 바로 이전에 재호의 탈출 모의를 고자질 한 것이 자신이라는 것이다. 재호는 이 때 배신감 보단 새로운 자각에 이르게 된다. 바로 지금 이 배에서의 아옹다옹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강제하고 억압하고 있는 것은 배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가 아니라 그들을 여기까지 내몬 세상이기 때문이다. 재호는 모두를 모아 함께 육지로 나가자는 제안을 한다. 그들이 뜻을 모으고 탈출을 하기 하루 전 라디오에서는 태풍 셀마의 소식이 보도된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가지 않으며 셀마는 비켜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탈출을 앞 둔 밤 그들은 들 뜬 채 잠이 들고 뉴스와는 달리 태풍 셀마가 그들을 덮친다. 동력이 없는 멍텅구리배에서 그들이 태풍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재호는 단 한개 있는 구명조끼를 소년에게 입히고 잠들지 않을 것을 당부한다. 태풍이 지나가고 다시 잔잔해진 바다엔 소년만이 부유물에 몸을 싣고 살아남는다. 소년은 육지를 향해 팔을 저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이미 태풍 속에 사라져 버린 멍텅구리배를 황혼의 배경위에 유령처럼 떠 있게 한다. 그 화면 위로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크레디트에 새겨진 이름들은 사회의 관심 밖에서 죽어간 이들의 이름 마냥 처량하게 보인다.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는 1987년 7월 우리나라를 강타한 태풍 셀마의 영향으로 피해를 입은 낙월도 주변의 멍터구리배와 죽어간 선원들의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이후  더 이상 새로운 선원들이 모이지 않아 멍텅구리배는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데 당시 정부에서는 앞으로 새우잡이배로 무동력선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선주들에게 지시하고 동력선을 구입할 수 있는 자금을 지원해 주게 된다.
비록 태풍이라는 자연 재해로 비롯된 일이긴 하지만 그 이면에는 비인간적이고 부조리한 사건들이 있었음을 우린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를 통해 알게 된다. 단지 풍문으로 들리던 많은 소문들이 실제로 존재했었음을 영화는 사실적으로 재현해서 보여준 것이다. 가진 자들의 관심 밖에서 처절하게 생존을 위해 살아갔던 이들이 존재 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분명 가치가 있다.
홍기선 감독은 10년 후 <선택>이라는 작품으로 또 한 번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살아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비전향 장기수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애썼던 이 영화에서도 그들이 몇 십 년을 살았던 좁고 차가운 감옥이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의 멍텅구리배와 전혀 다르지 않은 고통과 억압의 공간임을 보여준다. 동력을 상실하고 소통의 수단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 사회의 한 편에서 고통을 겪고 있다. 홍기선 감독의 영화는 이 땅에 아직도 사람이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고립된 섬과 같은 수많은 멍텅구리배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일깨워 준다. …………………(하략)…………………

□ 김희진, 독립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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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해양과 문학> 11, 12호 합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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