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선 체험기(진명주)

등록일2020-06-27

조회수60

 

범선 체험기

 

변신의 귀재 조니댑이 나오는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은 해적에 대한 새로운 장르를 개척, 전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한동안 잊고 지내던 해적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는 평을 받았다. 잭 스페로우 선장으로 분한 다양한 표정연기의 조니댑이나 올랜드 블룸, 키이라 나이틀리 등 화려한 출연진들이 볼거리인 이 영화에서 정작 내 눈을 끈 것은 돛을 높이 올린 채 바다를 가로지르는 배, 바로 범선이었다. 영화 속 커다란 돛을 편 범선이 주는 상상의 울림의 폭은 크고 깊어 저 신화 속 세계로 나를 안내할 것 같아 영화를 보는 내내 범선의 움직임을 주시했었다.

모임에서 김길녀 시인이 범선 체험 승선이란 말을 했을 때 귀가 번쩍했다. 앞뒤 잴 것 없이 무조건 가마고 약속을 한 것도 범선에 대한 환상 때문이었다. 돛을 높이 올린 채 바람에 따라 길을 바꾸며 파도와 싸우며 저 멀리 미지의 세계에 한 발 들여놓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신이 났다. 하이얗고 커다란 돛을 펴고 망망한 바다를 헤쳐 나가노라면 그곳엔 분명코 있을 것 같은 무엇, 바로 그 무엇을 향해, 가자. 돛을 높이 올린 범선을 타고 잭 스페로우처럼 망망한 바다를 건너 모험의 세계에 빠져들자. 일이든 사람살이의 관계든 부침이 심한 삶에서 한 걸음 벗어나 해조음의 장엄한 화엄이 울리는 시간 속으로의 여행, 야릇한 흥분을 느끼며 기꺼운 마음으로 동참했다

 

여름의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 20일, 남천동 메가마트 앞에서 나여경 소설가를 만났다. 우연한 자리에서 만나 부산이 타향이라는 공통점과 서로 살고 있는 집이 가깝다는 것만으로 이무럽게 지내고 있던 터라 승선체험 사진을 부탁할 겸 그녀의 차에 동승한 것이다. 설레임에 일찍 나섰건만 점심 자리가 길어져 출발이 늦어졌다.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태종대 못 미처 그 언저리 어디쯤이라고 쉽게 생각한 것이 나를 느긋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부산 영도구 청학동 미창석유 선석지.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녹녹히 열리지 않을 때가 있듯, 정작 길을 나서고 주소를 인식하지 못하는 네비게이션을 마주하자 두 여자 아차, 싶었다. 그러나 어쩌랴. 길눈이 어둡긴 그녀도 나도 매일반이니.

살아갈수록 미욱함은 왜 정도를 더하는 것인지. 분명 이정표를 보고 방향을 틀었는데 들고 보면 아니다. 영도의 뒷골목이 갑자기 커다란 아가리를 벌린 식인상어 같다. 백상아리의 출몰 기사를 본 적 있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 마음이 급하니 더 거기가 거기 같다.

 

범선 승선체험 행사는 선주의 배려로 한국해양문학가협회에서 주최 부산의 문인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다. 배 안으로 들어서니 일행들이 꽤 많다. 정겨운 얼굴들, 낯선 얼굴들. 부산작가회의, 부산문인협회, 부산시인협회까지 근 80여명의 문인들이 초청되었다고 한다.

배의 이름이 누리마루호라고 알려주는 단단한 체구에 구리빛 피부의 박천섭 선장은 전형적인 바다사나이 모습이다. 배에는 선장을 비롯 김춘택 기관장, 항해사, 기관사 등 총 4명의 인원이 있다. 길이 42.58m에 너비 1,000m 정원 360명을 태울 수 있는 총 톤수 358톤의 배를 일본에서 도입해 153톤으로 수리한 누리마루호는 부산을 대표하여, 5월, 8월 여수와 인천 세계범선 축제에 다녀오기도 했단다.

박천섭 선장을 따라 조타실로 들어선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선실 모습과 그다지 낯설지는 않다. 해양문학 심호섭 회장이 따라 들어선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뭐가 뭔지 모를 장비들을 보고 있는 내 모습에 선장보다 앞서 심호섭 회장이 하나하나 설명을 해준다. 해박한 그의 지식에 감탄했다. 심회장은 한국해양대학교 항해과를 졸업하고 다년간 외항선의 한해사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지금은 해양인을 양성하는 해사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다. 시계 옆 작은 추가 움직인다. 선박 안전을 측정하는 경사계이다. 지향점을 잃고 이리저리 요동치는 우리 삶 어디에도 저런 경사계가 있어 어느 한쪽으로 쏠릴 때 자리 잡아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난데없는 생각을 했다. 선장실 안을 이리 저리 훑어본다. 아하, 구석진 쪽에 선상일지가 있다. 호기심이 발동 허락없이 슬쩍 들춰본다.

 

범선이란 풍력을 이용하여 항해하는 돛을 가진 배를 말한다. 돛과 기관을 함께 갖추고 있는 배는 기범선機帆船이라고 하며 기범선이 돛을 펴고 바람에 의해 항해할 경우에는 항법상 범선과 동일한 규제를 받는다고 한다. 요즈음 추세는 소형어선이나 요트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범선들이 돛과 보조용 동력기관을 갖춘 기범선으로 순풍에만 돛을 이용하고 그 외는 동력으로 항해하고 있다고 한다.

서구 열강제국의 시대, 신대륙 발견이나 식민지 경영으로 힘의 상징인 범선은 그 수가 자연스레 늘어나게 되었고, 19세기 세계무역의 급성장에 발맞춰 수많은 대형 범선이 대양을 누비고 다니며 여객과 우편물, 식품 등의 수송을 전담하였다. 그러다 바람에 의지하는 돛에서 진일보한 기선이 등장하게 되면서 범선의 수는 차차 줄어들게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뒤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러나 개발도상국이나 연안해운에서는 지금도 범선이 사용되고 있으며 최근 에너지 위기를 배경으로 다시 상업범선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삶이 여유로워지면서 새로운 여가생활을 찾는 사람들이 스포츠용 범선Sailing yacht에 눈을 돌려 상업범선의 퇴조와는 달리 스포츠용 범선은 날로 그 인기가 더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집 근처에 수영 요트경기장이 있다. 날이 흐린 날 하이얀 요트들이 정박해 있는 것을 바라보면 물 속에 잠긴 백합 같기도 하고 날개를 접고 앉아있는 고니들의 무리 같기도 한 착각에 빠진다. 그곳에서 몇 년 전 요트를 탔었다. 쎌을 펴느라 힘을 쓰던 사람들과 함께 돛이 올라갔을 때의 흥분이란, 하이얀 쎌을 펴고 수영 요트경기장을 벗어나 아득히 멀리 광안대교를 바라보며 환호성은 오래 지속되었었다. 요트에도 흥분하였으니 대형범선에 대한 기대는 당연스레 상상 이상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이 배는 돛을 펼 수 없는 이미지의 배라니. 쿵. 마음이 가라앉는다.

 

14시 05분, 뱃고동소리와 함께 누리마루호가 움직인다. 영혼의 길안내를 하는 듯 나즉한 소리를 낸다. 배에서 울리는 기적소리를 이승과 저승, 중음세계로까지 문 열기를 시도하는 듯 착각을 하는 것은 범선에 대한 내 신화적 뇌 구조가 작동한 탓이리라. 마음 속 푸른 사이렌을 울린다. 머지않아 나는 오르페우스처럼 몸을 저 뱃머리에 결박하리라. 머리를 풀고 나타나는 미혹의 여신들이여. 내 맘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노랫소리여. 몸을 결박당한 채 나는 저 노래터널을 빠져나갈 것인가 망설이리라. 푸른 물줄기의 노랫소리에 홀려 뱃머리를 그 노랫소리가 들리는 언덕으로 향해 부딪혀 죽은 신화 속 이야기를 떠올린다. 한국해양대학교를 가리키던 뱃머리가 좌측으로 방향을 튼다. 드디어 출발이다. 와~. 함성이 동시다발로 일어난다. …………………(하략)…………………

 

□ 진명주, 1996년 ≪문학도시≫ 등단

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작품 수록 지면 : <해양과 문학> 13호

 

g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