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전에 안개가 진다

등록일20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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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전에 안개가 진다

마강류(수성선박 3항사)

 

어릴 적에는 안개 낀 날을 좋아했다. 딱히 특별한 사연이나 이유는 없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애 특유의 변덕이라거나 생소함에서 느끼는 호기심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

내가 8살 때까지 살았던 산곡동은 안개가 자주 끼진 않았다. 하지만 안개가 꼈다 하면 아파트 단지와 골목길 사이사이로 짙게 스며들고 물처럼 고였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내다보면 허리가 끊어진 채 마루만 남은 산이 보였다. 등하굣길에 이용하곤 하던 좁은 도로가 색다르게 느껴지고, 삐딱하게 주차되어 있는 트럭 짐칸에 쌓인 먼지가 유난히도 도드라져 보였다. 쾨쾨하게 묵은 먼지에서 노고의 세월을 찾기엔 그 당시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손가락 문대며 그림 그리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조잡한 해와 앙상한 나무를 그리면 검댕이 묻은 손이 나를 반기곤 했다. 지금도 도저히 표현할 단어를 찾아내지 못한 먼지 특유의 냄새를 맡아 보겠다고 얼굴을 들이 밀면 코 밑에 수염처럼 거뭇거뭇한 게 달라붙었다.

그것이 내가 안개 낀 날 아침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얻은 유일한 전리품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꽤나 의기양양하게 내가 왔던 길을 돌아갔다. 아파트 단지의 주차장을 지나, 슈퍼마켓 앞에 있는 작은 파라솔을 넘어 다다를 집. 지금은 불혹을 넘긴, 하지만 그 당시에는 앳된 어머니의 잔소리가 두렵지 않았다. 안개 밭을 돌아다니면 계속해서 보게 되는 새롭게 드러나는 건물의 모서리와 간판, 신축되고 있던 빌라 같은 것들과 비교할 때 왜소한 우리 집을 보는 게 조금 슬펐다. 그 품새도 멀찍이 서있는 아파트에 깔보여지고 있는 꼴사나운 모양이라 발등에 납이라도 쌓이는 것처럼 집으로 가길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나는 안개에 대하여 특별한 낭만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영화나 다큐멘터리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된다. 런던 시계탑 아래를 조용히 걷는 이국의 노인과 청년의 정장 입은 모습을 떠올려보곤 했었다. 마른 우산을 바닥에 치대며 우울하고 섬세한 얼굴을 할까, 아니면 찰리 채플린처럼 익살스러울까. 휘파람 부는 그들의 입술처럼 번듯한 모양새로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시계의 분침처럼 천천히 서행하는 자동차와 사람의 문서화되지 않은 규칙이 있을 것이다. 숨결처럼 퍼져있는 안개를 꿰뚫음에 거리낌이 없는 그들의 모습은 내게 묘한 감흥을 주었다. 멋진 목적지가 있는 그들의 모습이 부러웠던 것일 수도 있다.

부끄럽게도 고등학생 때까지 나는 안개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그 환상은 날이 갈수록 거대해지고 날카로워져갔다. 종국에는 이름만 들어보았던 성 요한 최고 십자회와 아르마다의 선수상이 안개를 사이에 끼고 침묵의 대치를 하는 것에 이르렀다. 서로의 이권 각축으로 첨예했던 대립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살을 붙여나갔고, ‘로도스 엑소더스’라는 짧은 습작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절제 없이 뻗쳐가는 망상이 멈춘 것은 실제로 배를 타서 안개를 보았을 때다. 선장의 신경질적인 태도와 VHF 청취를 잘 하라는 짜증이 유독 선하다. 매번 같은 곳을 지나더라도 시야가 다다르지 않는 곳에 위치한 물표가 불안하게 여겨지고 항해에 장해를 초래하는 안개에 예민해지는 항해사 특유의 성질. 시정이 좋지 않으니 어선을 주의해서 항해하라는 해상관제사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승선하였다는 실감이 나니 나도 꽤 별났다. 안개 많이 끼는 서해에서 고난의 단초가 존재함을 깨달았다. 괜스레 생각이 많아지고 복잡해진다.

때로는 자욱한 안개를 내달리며 화물을 목적하는 장소까지 안전하게 운반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낄 때가 있다. 마치 이 세상을 구성하는 기계적 요소의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태엽의 마모되지 않는 모서리라도 된 것 같다. 다만 이정표 없는 길을 걷는 듯, 물 밀 듯이 찾아오는 불안감을 느끼곤 한다. 선박의 목적지와 안개, 삶과 좌절 또는 그 밖의 부정적인 뭔가에 동의가 있으리란 찰나의 착상은 원고지 백 장으로도 밝혀낼 수 없는 미증유의 불안감 해소에 도움을 준다.

안개 끼는 날은 기시감을 느낀다. 어릴 적 향수를 동반하여 찾아온다하면 꽤나 정감 있게 들린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나는 달라진 게 거의 없다. 내가 불현듯 느끼는 열등감이나 불안함을 상상과 생각으로 해소하려 한다. 말초신경이라도 절단하려는 듯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뭔가에 몰두한다.

지금은 7월이다. 안개 걷힐 날이 많지는 않을 것 같다. 바다에서 맥동하는 안개의 근원적 흐름이라도 파헤쳐 볼 것처럼 항해는 계속될 것이다. 요즈음 선박의 연령은 갈수록 짧아진다는데, 그에 반비례해서 노익장을 과시하듯 내가 승선 중인 선박의 메인 엔진이 헐떡인다. 그녀 또한 안개가 낀 날에는 뭔가에 몰두한다.

뱃전에 안개가 진다.

 

□ 자료출처 : <월간 海바라기> 2013년 8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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