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해양실크로드 대장정(1)

등록일202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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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해양실크로드 대장정(1)

남 청 도 Ⅰ 한국해양대학교 기관공학부 교수

 

 

아래 글은 필자가 지난 9월 15일부터 10월 27일까지 한국해양대와 경상북도가 공동으로 진행한 “2014 해양실크로드 대장정” 탐험대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중세 이후 동서문명의 교역로가 되었던 해양실크로드 주변을 둘러보고 쓴 견문록이다. “2014 해양 실크로드 대장정” 탐험 프로젝트는 한국해양대학교와 경상북도가 힘을 합쳐 이루어졌다. 이번 해양실크로드 대장정은 실습선 한바다호(총톤수 6,687톤)를 이용해 포항을 출항하여 중국 광저우, 베트남 다낭,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말레이시아 말라카, 인도 뭄바이를 거쳐 이란 반다르 압바스항까지 왕복하는 항해이며, 탑승인원은 교수 및 승무원이 36명, 실습생 91명, 탐험대원 및 기타 24명 도합 151명이었다.

 

1. 들어가며

‘동아시아해를 주름잡았던 장보고 선단의 황해 해상루트를 따라가다’

인류문명은 동양과 서양이라는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발전해 왔다. 본래 실크로드(Silk road)란 태고 이후 동서 문명교류사의 근간을 이루는, 장구한 역사의 국제교역로의 명칭이다. 기원전 139년 한 무제(漢武帝) 때 장건(張騫)의 서역착공(西域鑿空)을 계기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후 7세기에 전성기를 맞아 당나라의 장안과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을 잇는 장대한 육상 실크로드가 완성된 것이다. 이 길을 통하여 중국에서는 주로 비단이 서방으로 수출되었기 때문에 독일의 지질학자 리히트 호펜(Richthofen)이 제창한 이후 이 국제교통로는 실크로드라고 불리게 되었다.

모든 국제교역은 이 루트를 따라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였는데 호탄의 옥(玉)과 아라비아의 향료, 아름다운 로마의 유리그릇 등이 캐러밴의 낙타 등에 실려 동방으로 들어오고, 중국의 비단이 로마의 궁정에까지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캐러밴에 의한 물동량 수송에는 한계가 있었고 또한 전쟁, 재해 등 육로가 가지는 갖가지 재난으로 인하여 수요와 공급을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8세기부터는 지중해와 중국 간의 중계무역에 눈 뜬 아랍 상인들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다. 일찍이 항해술에 밝은 이들은 해상항로를 개척하여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의 경주에까지 무역로를 확장시켰다.

한편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황해무역에는 미국의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 교수가 ‘동양의 해상왕’이라고 극찬한 장보고대사가 중심에 있었다. 그는 약관 15세에 당나라로 건너가 무령군으로 입대하여 당시 반당 번진에서 반란이 격화되자 토벌군 선봉으로 큰 공을 세워 무령군 소장이 되었으나 당나라에 끌려온 신라인들의 비참한 노예생활을 보고 귀국하여 청해진을 설치하고 서해에 들끓던 해적을 소탕하는 한편 나·당·왜를 잇는 삼각무역으로 큰 부를 일군 겨레의 선각자이다. 또한 중국 동남해안과 말라카를 거쳐 인도, 페르시아만, 홍해, 로마에 이르는 해상 실크로드는 일찍이 신라의 혜초(慧超)스님이 20세 때 구법(求法)을 위해 중국의 광저우(廣州)에서 배를 타고 당시 동천축국인 인도까지 가서 하선했던 길이다. 천축이란 당시 중국이 인도를 지칭한 나라로서 크게 5개국으로 분할돼 있었는데 남해에서 동인도로 상륙한 스님은 육로로 오천축국(동,서,남,북,중)을 차례로 순례하고 서역 여러 지방, 파밀고원과 곤륜산맥을 넘어 장장 4년(723~727)에 걸친 구법순례여행 끝에 중국의 장안으로 귀환했으며 세계 4대 여행기라고 불리는 불후의 진서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다.

이번 해양실크로드의 탐험목적은 약 1200년 전 혜초스님이 행하신 구법순례의 발자취를 더듬고 선각자 장보고대사의 글로벌 해양경영정신을 본받고자 함이다. 아울러 대한민국의 신성장 DNA로서 해양민족의 역사성과 세계로 뻗어나간 확산성의 뿌리를 찾아 새로운 문화융성 시대를 선도하고, 광저우, 말라카, 뭄바이, 반다르 압바스 등 주요거점 지역간 교류협력 강화를 통해 문화교류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경제협력과 통상확대로 창조적 산업화 방안을 모색하는 데 있다.

 

2. 중국 광저우

‘혜초의 구법순례의 길을 더듬어, 황포고항(黃浦古港)을 둘러 보다’

실습선 한바다호는 동지나해를 거쳐 9월 20일 새벽 3시에 황포강 하구 파일러트 스테이션에 도착해 파일러트 2명을 태우고 강을 따라 7시간가량 올라왔다. 파일러트가 승선할 때 대개 세관과 출입국 관리들도 함께 타서 수속을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곳 광저우에서는 입항수속관리들이 오지 않았다. 약간 황토빛이 감도는 탁한 강물 위에는 수초가 떠내려오고 있었고, 크고 작은 배들이 분주히 다녔다. 통항 분리선이 돼 있었지만 강폭이 조금 좁은 곳에서는 컨테이너 피더선, 모랫배들이 무수히 많아 마치 적벽대전이 전개되는 듯했다. 10시경에 부두에 접안하니 광저우영사관과 중국 측 여행사 직원, 교민들 그리고 중국 공안들이 부두에 나와 지키고 있었다. 입항수속을 끝내고 트랩을 내리자 본선 선장과 탐험대장 그리고 학생탐험대장에게 교민들이 환영 화환을 목에 걸어주며 환영해 주었다.

점심식사 후 학생들은 하얀 약복을 입고 개별 상륙을 실시하였고 탐험대원들은 버스를 타고 먼저 시내 중심가에 있는 광둥성박물관으로 향했다. 광저우시는 인구가 1,280만 명으로 서울과 비슷하고 중국에서는 북경, 상해 다음으로 큰 제3의 도시라고 한다. 광둥성 인구만 약 1억이라고 하며 중국 국내 세금수입의 약 50%를 차지하는 중국에서도 제일 잘 사는 도시이다. 연중 평균온도는 22C로 봄, 여름, 가을만 있는 3계절의 도시라고 한다. 박물관 건물도 현대식으로 크게 잘 지었지만 내부의 전시품들도 광둥성 2,800년 역사를 대변할 수 있을 정도로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전시돼 있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해상실크로드로에서의 광저우의 역할이었다. 4층에 당나라시대의 유물과 자료들이 상세히 기술돼 있었는데 워낙 전시공간이 넓고 구경할 것도 많았지만 우리는 다른 스케줄 때문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그 외 전시품들은 수박 겉핥기식으로 보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음 목적지는 광효사로 광저우에 남은 당나라 때 불교의 유일한 절로서 혜초스님이 당나라로 건너와서 머문 절이며, 금강지라는 스승을 만나 조언을 듣고 이곳에서 배를 타고 천축(인도)을 다녀와서 세계 4대 여행기라고 하는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긴 우리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절이다. 당시 아랍상인들과 교역을 하던 항구는 광주, 천주, 복주, 양주 네 곳이었으며 인도 바다로 나가는 뱃사람들은 광효사에 와서 무사안녕을 빌었다고 한다. 대웅전 우측 앞쪽에는 달마대사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처음 도착한 곳이 이곳 광저우이며 식사하고 물 마신 곳과 밥그릇 씻은 곳도 표시돼 있었다. 대웅전 뒤쪽에는 보리수나무 앞에 6조 혜능대사가 삭발한 곳이라며 자그마한 불탑을 세워놓았다.

다음 날(9월 21일)은 버스를 타고 약 네 시간을 이동해 양강시 해릉도 바닷가에 있는 해상실크로드박물관으로 향하였다. 1987년 한 어부의 신고로 송대(宋代) 해저 유물선(南海 1호)이 발견되었는데 전장은 30.4m, 폭은 9.8m였다. 영국 해양탐사회사와 중국정부가 합심하여 인양한 것으로서 해저 뻘 속에 파 묻혀 있는 목선을 건져올리기 위해 큰 철제 컨테이너를 만들어 둘러씌우고 그 위에 무거운 돌을 여러 개 얹어 하중으로 눌러서 바닥까지 완전히 떠서 크레인으로 인양하여 인근 바닷가에 지은 박물관 건물 안으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중국인들의 스케일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육상 건물 안으로 옮겨진 고대선은 아직 발굴 중에 있으며 그동안 출토된 유물 수만 6만점이 넘는다고 한다. 주로 도자기와 청자 접시와 사발 등 생활용품이 많이 나왔으며 금세공품도 나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신안선과 비슷한 송대의 선박으로 이 해저유물들을 전시하기 위해 새로 박물관을 건립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방문 기념으로 신라금관 모형을 기증하였다. 박물관장은 한국과 중국이 더 우호적으로 유대관계가 발전하기를 희망한다고 인사를 하였고 답례로 일행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하여 덕분에 인근에서 나는 해산물로 맛있는 저녁식사를 했다.

다음 날(9월 22일)은 버스를 타고 다시 광저우로 이동해 무슬림예배당인 청진사로 갔다. 무슬림원장으로부터 직접 안내를 받았는데 그의 조상도 아랍인이라 했다. 당나라시대에 많은 아랍인들이 무역을 하기 위해 광저우로 왔으며 이곳에서 특산물들을 교역하기도 하고 일부는 한족과 결혼하여 특정구역인 조차지에 거주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당시에 쌓은 등탑이 아직도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데 당시의 건축물이 파괴되지 않고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이 등탑이 유일하다고 한다. 이 등탑은 인근 앞바다를 지나다니는 배들에게 위치를 파악케 해주는 등대역할을 했다고 한다. 전시품 보관 장소 제일 안쪽 구석에 있는 비석 하나를 가리키면서 그 비석에는 고려인 “라마단”이라는 사람이 광저우에서 38세로 사망한 기록이 있다고 알려주었는데 그는 당시 무슬림의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았다고 한다. 청진사 건축물은 중국과 아랍문화가 약간씩 혼합된 형식의 특색을 갖고 있기도 했다. 청진사를 둘러보고 일행은 혜초스님이 구도의 여정으로 배에 오른 황포고항을 둘러보고 기념관 내에 전시된 전시품을 구경했다.

마지막 코스로 중산대학(中山大學)으로 갔다. 그곳에서 해양실크로드에 관한 국제학술대회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산대학은 광저우에 있는 26개 대학 가운데 하나로 중국 내에서도 유명한 대학으로 손문선생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대학이라고 한다. 학술회의장으로 들어가니 열띤 발표가 이어지고 있었다. 중국 측 발표자로는 원로교수인 양이평(梁二平) 교수를 비롯하여, 주제강연자인 하문대학의 양국정(楊國楨)교수, 집미대학의 최운봉(崔雲奉)교수, 중산대 위지강(魏志江)교수 등이, 우리나라에서는 주제강연자로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을 비롯해 동국대의 윤명철교수와 한국해양대 교수들이 다수 참석하였다.

마지막 날인 23일에는 오후 4시경 출항예정이었으나 황포강 수로가 좁고 통행하는 배들이 많아 위험한 탓에 낮시간 동안에 빠져 나가기 위해서 출항시간을 12시로 앞당겼다. 육룡사 등은 시간이 모자라 다음 기회로 미루어 놓고 일행을 태운 한바다호는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황포강을 서서히 빠져 나와 다음 입항지인 베트남 다낭항을 향해 힘차게 물살을 갈랐다.

 

3. 베트남 다낭

‘한 때 불교문화를 꽃 피웠던 후에 왕조의 궁궐터엔 잡초만 무성해 있었다’

광저우를 출항하여 채 이틀도 되기 전인 9월 25일 새벽 2시 다낭 외항에 닻을 내렸다. 부두가 공사 중이어서 접안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날이 새자마자 세관과 출입국관리들이 통선을 타고나와 입항수속을 해 주었다. 9시 첫 통선에는 탐험대와 실습학생 일부가 타고 시내로 나갔다. 통선은 탑승정원이 45명이어서 몇 차례 왕복해야만 하였다.

나는 우선 대리점에서 추천해준 다낭호텔로 가서 짐을 풀어 놓은 다음 시내부터 한번 둘러보기로 하였다. 자전거 릭쇼(rickshow)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다낭시는 베트남에서 호치민, 하노이, 하이퐁 다음으로 네 번째 큰 도시로서 면적은 1,256㎢이고 인구는 대략 90만명 정도이며 중부 최대의 상업중심지라고 한다. 시 가운데로 한강이 흐르고 있어 동서로 양분되는데 다운타운은 서쪽에 있다. 강 하구에는 추안푸옥 브리지라고 현수교가 놓여 있고, 중간에는 한 브리지, 상류쪽으로 드래라곤 브릿지라고 해서 노란색의 커다란 용모양의 구조물이 있다. 제일 안쪽에는 트란실리 브릿지와 구옌 반트리 브릿지가 놓여 있다. 다낭시 동해안은 남지나해의 멋진 해수욕장이 이어지고 있다. 시내 중심가로 들어갈수록 오토바이 숫자가 늘어났다. 시내 가운데는 행정센터 건물과 인근에 고층빌딩이 쌍둥이 건물처럼 서 있고 그 외에는 그리 높은 건물들이 보이지 않았다. 인력거(rickshaw)를 타고 가면 느린 속도로 이동하므로 사방을 구경할 수 있어서 좋다.

참(Cham) 조각 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먼저 다낭 대성당을 둘러보았다. 연분홍색을 칠한 이 성당은 1923년 프랑스인이 세웠다고 하며 건축은 중세유럽풍이 물씬 묻어났다. 참(Cham) 박물관이 처음 문을 연 것은 1919년이지만 그 후에 참 조각품들을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수집하였으며 일부조각품들은 파리나 하노이, 사이공 박물관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입장권을 사는 데 140,000동(베트남화폐)이나 주었는데 화폐단위가 너무 커서 금방 감이 오지 않았다. 한화로는 약 7천원 정도이다. 박물관은 내부 전시품 400점을 포함해서 약 2,000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었다. 몇몇 청동 조각작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화강석 조각품들인데 인도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았으며 10~11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춤추는 드루가(Durga) 여신상은 다리부분이 잘리긴 했으나 잘룩한 허리와 풍만한 가슴이 섹시해 보였으며 7~8세기 작품으로 코끼리 두상의 가네사(Ganesha) 작품은 인자한 아저씨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10세기 작품으로 좌상 부처모양의 바루나(Varuna)신상과 바유(Vayu)신상은 목 위의 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익살스러운 사자상도 다수 보이고 팔이 네 개 달린 춤추는 시바(Siva)상도 눈길을 끌었다. 조각작품에 흥미가 있는 사람이 디자인이나 섬세한 선의 굴곡 등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하루 종일 보아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았다.

참 박물관을 나와선 다낭에서 남쪽으로 30여㎞ 떨어진 호이안(Hoi An)으로 가 보기로 하였다. 호이안 구시가지는 호아이(Hoai) 강 북쪽 3블록에 이어져 있었고 서울의 인사동처럼 옛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프랑스 건축양식과 일본 건축양식을 조금씩 가미한 독특한 양식으로 지금도 성업 중이었다. 호이안은 강이 옆에 있어 16~17세기경에는 남부 베트남에서는 국제무역 중심지였으며, 매년 4~6개월간 상업박람회가 열렸다고 한다. 이 도시 오른쪽에는 중국인, 일본인, 네덜란드인, 인도인 무역업자들이 그들의 영구 거주지를 건설했다고 한다. 호이안의 구시가지는 다양한 형식의 건축양식, 살림집, 의회당, 탑, 사원(절), 우물, 다리, 시장, 부두 등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도본강 남쪽인 안호이(An Hoi)섬과는 안호이 다리가 놓여 있었고 그 뒤쪽 샛강에서 흘러나오는 곳에는 옛날 일본인들이 살았던 마을로 지붕이 덮인 내원교(來遠橋)가 놓여져 있었다. 내원교에서 동쪽 강하구쪽 직선으로 찬푸(Tran Phu)거리이고, 그 오른쪽이 구엔타이호크(Nguyen Thai Hoc) 거리 그리고 강을 따라 바크당(Bach Dang)거리가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손님들과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몇몇 건물에는 간판이 한문으로 돼 있어 베트남도 한자문명권에 속했음을 알 수 있었다. 구시가에서 그림엽서 몇 장을 구입했다. 무역도자기 박물관에 들어가 보니 8~9세기 주요 교역품이었던 도자기와 파편들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당시 호이안은 베트남 남부의 최대 상업항으로서 북으로는 하노이와 광저우, 남으로는 오케오와 자바섬 그리고 서쪽으로는 방콕과 인도 아라비아를 잇는 주요 거점 도시였다고 한다. 호이안은 1999년 12월 4일에 구시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고 한다.

이튿날은 다낭에서 북쪽으로 약 110㎞ 떨어져 있는 후에(Hue)를 다녀왔다. 후에는 응우엔조(阮朝:1802~1945)가 왕도로 삼은 베트남 중부의 도시로 후에왕조의 성(城)과 역대왕의 묘(廟)가 남아 있는 역사유적지이다. 왕성은 자론황제가 19세기 초에 건설했는데 중국 자금성을 많이 모방한 양식으로서, 오문(午門), 장생전(長生殿), 태화전(太和殿) 등의 여러 가지 건축들이 약 500ha의 성 안에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태화전 안에는 황제가 앉았던 의자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데 실내에서 촬영이 금지돼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후에시에서 가장 큰 티엔무 사원을 둘러보고 비석에 새겨진 비문과 6층탑을 구경하였다. 또 시내에서 약 10km 떨어진 차이구 구릉지구에 있는 카이딘 황제릉도 둘러보았다.

마지막 날은 호이안에서 서남쪽으로 40여km 떨어진 미손(My Son)을 다녀왔다. 미손은 4세기로부터 14세기에 이르기까지 베트남 중부로부터 남부에 걸쳐서 거대왕국을 건설한 참파(Champa)왕국의 정신적인 성지였다. 유적지는 울창한 열대림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분포돼 있으며 특히 서양관광객들이 이른 아침부터 줄지어 몰려들었다. 이 유적지는 약 110년 전인 1898년에 프랑스 파리스(M.C Parice)라는 학자가 발견했는데 발견 당시에는 큰 계곡의 하상과 언덕에 사원탑을 쌓았던 수많은 벽돌조각을 발견했었다고 한다. 출항시간에 구경할 시간이 짧아 무너진 탑 앞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 건물내부로 들어가서 전시해 놓은 당시의 조각품들을 구경한 후 길을 돌아 나왔다. 날씨가 더워 온 몸에서는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9월 25일에 다낭항에 입항하여 2박3일간의 일정이나마 옛 참파 왕국의 해상실크로드 거점도시였던 호이안을 구경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4.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보로부두르 불교유적지의 조각 예술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다낭항을 출항한 지 나흘 만에 적도를 통과(9월 30일 09:15)하였다. 적도를 통과하며 기적을 ‘붕~’하고 울리면서 안전항해를 기원하는 적도제를 지냈다. 돼지머리와 약간의 제물을 마련해서 브릿지에 상을 차려놓고 선장을 비롯하여 여러 사관들과 탐험대원 그리고 학생대표들까지 용왕님께 술잔을 올리면서 절을 하였다. 적도제는 범선시대에 적도를 기준으로 남, 북위 15도 이내는 무풍지대여서 선원들이 바람을 불게 해달라는 취지로 제사를 지내면서 비롯된 된 것이다. 적도부근은 바람이 없어 수면이 그야말로 거울 같았다.

다음 날에는 인도네시아의 수도인 자카르타항 컨테이너 부두에 접안했다. 자카르타 외항에는 하역을 위해 접안을 기다리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선박들이 닻을 놓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선사가 배에 올라와 한바다호를 부두에 접안시키자 많은 교민들이 플랜카드와 태극기를 손에 들고 나와 흔들며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학생들은 하약복을 착용하고 맨드레일로 거수경례로 답례했다. 접안하자마자 수속관들이 올라와 입항수속을 신속히 처리해 주었다.

입항수속이 끝나자 쇼패스와 여권을 받아 밖으로 나갔다. 호텔에 도착하여 다음날 족자카르타(Jogjakarta)에 있는 세계 최대의 불교사원 유적지로 1991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보로부드르(Borobudur)사원으로 가기 위해 항공편을 예약했다. 자카르타에서는 상당한 거리여서 비행기로도 한 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새벽 3시에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서 족자카르타행 첫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하얀 구름 위로 나를 때는 높은 산봉우리가 까만 삼각김밥처럼 구름 위에 고개를 내밀고 띄엄 띄엄 솟아 있어 마치 선경 속을 나르는 것 같았다. 자카르타공항을 이륙한지 꼭 한 시간 만에 족자카르타에 착륙했다. 족자카르타는 인구 300만정도의 아담한 교육도시로 대학만 28개 정도라고 한다. 거리도 깨끗하고 교통혼잡이 자카르타보다는 훨씬 덜했다.

8시경에 보로부드르에 도착했다. ‘보로부드르’란 산스크리트어로 보로는 언덕이란 뜻이고, 부드르란 사원이란 의미라고 한다. 입장료가 어른이 24만 루피아(한화 2만원 정도)다. 티켓팅을 하고 사원 안으로 입장하려고 하니 관리원이 보자기 같은 것을 허리에 둘러 주었다. 입구 팻말을 따라 들어가니 저 멀리 약간 언덕같이 보이는 곳에 사진에서만 보와 왔던 거무스레한 탑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관광객들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지만 유럽에서 온 듯한 몇몇 서양인들 그룹이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미술관의 명화 앞에 선 듯한 전율이 느껴졌다. 이 사원은 싸일렌드 왕조시대 전성기인 AD 760년경에 시작하여 대략 830년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약 천년동안 흙더미 속에 파묻혀 있다가 1814년 이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504개의 부처불로 구성된 정방형의 사원은 7층으로 축조되었는데 기단 둘레에는 석가의 탄생, 출가, 득도에 이르는 과정을 정교한 조각으로 묘사해 놓고 있었다. 목이 없는 부처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는데 소중한 문화유산이 어떤 이유로 파괴됐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안타까웠다. 제일 위층에는 종모양의 탑이 배치되어 있는데 불교에서는 종은 극락세계를 상징한다고 한다. 하단 둘레에 배치되어 있는 종탑 속에는 부처가 모셔져 있는데 탑의 꼭대기에 있는 제일 큰 종 속은 비어 있었다. 국립박물관으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단 조각 그림에는 배의 모양이 여럿 보이는데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을 골라서 2003년에 실제로 배를 만들어 띄웠다고 한다. 그 실험선이 인근 선박박물관에 전시돼 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시간이 없어 들어가 보지 못하고 다음 행선지인 힌두교 사원유적지 프람바난(Prambanan) 사원으로 향했다.

프람바난 사원은 보로부드르 사원과는 반대방향으로 15㎞ 정도 떨어져 있었다. 죽순모양으로 생긴 이 탑들은 주탑 옆에 양쪽으로 두 탑이 있고 앞쪽에도 3기가 배치돼 있다. 탑 속에는 부처와 비슷한 신상이 모셔져 있었다. 탑 아래쪽 둘레에는 보로부드르 사원과 비슷한 모양의 조각들이 빙 둘러 부조돼 있었다. 그 외에도 많은 유적이 있었지만 비행기 스케줄 때문에 더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사흘째는 자카르타에 있는 국립박물관과 해상 실크로드시대 당시의 옛 항구, 동인도회사의 건물로 사용되었다는 해양박물관 등을 둘러보고 다음 기항지인 말라카를 향해 자카르타와 아쉬운 이별을 하였다.

 

□ 자료출처 : <월간 海바라기> 2014년 12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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