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다

등록일2020-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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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바다

 

 

나는 바다를 좋아한다. 잔잔한 바다에 크고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떠있는 남해바다도 좋지만 검푸른 송림이 우거진 해변에 넓게 넓게 펼쳐진 백사장 너머로 초록빛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동해바다는 더더욱 좋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한가로운 때면 초록바다를 찾는다. 수평선이 아련한 초록빛 바닷가에 나서면 세상사에 찌들었던 마음이 후련해지고 끊임없이 밀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내 젊은 날의 꿈을 되돌아보게 한다.

"너는 고향이 산골인 합천인데 왜 섬으로 발령을 희망하느냐?"

"?"

󰡒학생들은 모두 자기 고향이나 도시학교로 발령을 희망하는데 너만 왜 하필이면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남해섬으로 희망하느냐 말이다.󰡓

사범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은 초록빛 바다가 좋아서 남해섬으로 교사 발령을 희망하는 나를 교무실로 불러서 꾸중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발령 희망지를 고향인 합천으로 고쳐썼고, 해인사 부근 산골학교에 발령을 받아서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합천 산골에서 나고 자란 내가 바다를 처음 본 것은 중학교 3학년 때 남해섬으로 수학여행을 가던 길이었다. 그 때는 6.25 전쟁 중이라 진주에서 군용 트럭을 타고 남해섬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노량포구에 도착하니 꿈결 같은 초록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처음 보는 남해바다는 잔잔한 바닷물에 크고 작은 초록 섬이 옹기종기 떠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넋을 잃고 바라보고 섰는데 선생님은 그곳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싸운 최후의 결전장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음날 상주에서 본 바다는 더욱 좋아서 검푸른 소나무 숲을 지나면 하얀 백사장이 펼쳐져있고 그 너머로 초록빛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거기에다 갈매기는 노래하며 춤을 추고 고기잡이 돛단배도 한두 척 흘러가고 있었으니.

그런데, 학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각인(刻印)이란 용어를 배워서일까, 나는 그때 처음 본 초록빛 바다를 잊지 못하고 초임학교 발령지를 남해섬으로 희망했던 것이다. 이처럼 순진한 나는 사람은 물론이고 사물마저도 한번 정이가면 쉽게 잊지 못하는 순정파였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소망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질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던가. 합천 산골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내가 중등학교 교원 자격 고시 검정시험에 합격하자 문교부에서는 나의 소망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어느 날 섬마을 학교로 발령을 내버린 것이다.

책보따리를 둘러메고 섬마을 학교를 찾아간 나는 초록빛 바다가 좋아서 아침저녁으로 바닷가를 거닐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일요일이면 이순신 장군의 전승지인 옥포만을 찾아가 역사의 흔적을 더듬어보기도 하고, 구조라 넓은 백사장을 거닐다가 바다에 뛰어들어 물장구를 치기도 했으며 학동 몽돌밭에서 예쁜 조약돌을 줍기도 했다. 더구나 해금강 초록바다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그 높고 험한 바위를 타고 올라가서 동료 직원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노라면 신선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 중에서도 고현 앞바다에 떠있는 댓섬은 초록바다를 좋아하는 나의 보금자리였다. 겨우 한 집이 살고 있어서 무인도나 다름없던 댓섬은 기암과 괴석이 곳곳에 널려있는데다가 동백나무가 울창해서 온 섬은 낙원처럼 아름다웠다.

거기서 노닐다가 바다에 뛰어들어 해수욕을 하기도 하고 고기를 낚거나 굴을 따고 해삼을 잡아서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노라면 신선이 부러울 게 없었다. 생각해보라, 바다에서 술잔을 손에 들고 황새걸음을 걷다가 해삼이 보이면 술을 꼴깍 마시고는 해삼을 날름 집어서 안주로 먹었으니, 그 기분이 얼마나 좋았겠는가 말이다. 그러다가 흥이 나면 가고파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기도 하고 하모니카를 불기도 했으니.

그때 나에게 청춘은 영원한 것이었고 갈매기들이 노래하며 춤을 추는 초록바다는 에덴의 동산이었다. 바다안개가 하얗게 밀려오면 세상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태풍이 불어오면 산더미 같은 배도 순식간에 부서져 버린다는 사실도 나는 몰랐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는가. 갓 스물에 산골에서 햇병아리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시작한 나는 초록바다에 떠있는 섬마을 학교에서 초록빛 꿈을 꾸다가 대처를 떠돌면서 세속에 물들어 앞만 보고 달려가다 보니 어느새 이마에는 주름이 지고 머리카락은 백발이 되어버렸으니. 그런데도 나는 초록바다를 잊지 못하고 오늘도 태종대 바닷가를 서성이고 있다. 산책로를 따라서 걷고 있노라면 초록바다가 그럴 수 없이 시원하고 내 젊은날 초록빛 꿈이 서려있는 거제도가 수평선 너머로 아련히 바라다 보인다.

올 여름에는 거제도를 한번 찾아가봐야겠다. 내 마음의 보금자리였던 댓섬은 삼성조선소가 들어선지 오래되었다니, 벌거벗고 뛰어놀면서 물장구치던 구조라 해수욕장과 배를 타고 노닐던 해금강에라도 한번 다녀오고 싶다. 그리하여 그곳에 흩어져있는 내 젊은 날의 추억들을 주어모아 조개껍질처럼 엮어서 내 서재에 걸어두고 싶다.

 

강중구 ㅣ 수필가

 

□ 자료출처 : 海바라기 2012년 1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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