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헤아리는 시간

등록일20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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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헤아리는 시간

마강류 ㅣ수성선박 3항사

 

3등항해사가 되면 하늘을 보는 시간이 많아진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당직을 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된 이유는 역시 내 치기어린 감정을 갈무리하기에는 역시 하늘을 보는 것이 최고이기 때문이다. 하늘은 모든 것을 포용할 것처럼 넓다. 쪽빛이 세어 들어오는 방 창문에서도, 그리고 농밀한 해무로 잔뜩 뒤덮인 상태에서도 하늘만큼은 언제나 그 넓이를 측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하늘은 도화지처럼 어지러운 빛무리로 이지러져 있다. 낮보다는 밤이 더욱 그러하다.

바다에서 보게 되는 하늘은 왠지 도시에서 보는 것과는 조금 느낌이 다르다. 매연과 먼지 때문에 점점이 박혀서 별로 보이지도 않던 별이 바다에서만큼은 쏟아질 것처럼 많게 보인다. 하루의 시간을 온전히 별을 세는 데 쏟아 부어도 다 셀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엄청난 숫자들.

처음으로 배를 타고서 밤하늘을 보았을 때 그 숫자에 압도될 것 같았다. 거기에 짓눌릴 것 같다는 생각도 잠시, 나는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별들의 반짝임에 매료되고 만다. 물론 별의 밝기나 위치를 보고서 어떤 별자리에 위치한 별인지 알아낼 정도로 정통한 것은 아니지만, 왠지 내가 보고 있는 하늘에서 북두칠성이나 카시오페아 같은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한번쯤은 어줍잖은 지식에 의존해서 찾아보고 싶어진다. 3등항해사의 밤은 이런 소일거리를 하기에 매우 안성맞춤이다. 배가 없나 전후좌우를 살펴보고, 멍하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배의 움직임에 따라서 어지럽게 흔들리는 별들의 관측이 가능하다.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으면 다리가 풀리는 것 같은 가벼운 현기증마저 찾아오는데, 그러한 감각을 즐기는 것 또한 배를 타는 3등항해사의 특권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3등항해사의 밤은 그 정도로 호젓하다. 아직까지는 초임인 탓에 선장님과 같이 당직을 서곤 하지만, 선장님이 내려가는 잠시동안 만끽하게 되는 책임감과 방종 사이의 미묘한 줄타기는 왠지 아스라한 쓸쓸함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른하기까지 하다. 도시의 바쁘고 각박한 삶에서 괴리된 것만 같은 이 시간은 분명히 편안하고 즐겁지만, 슬프기도 하다. 천상 뱃놈이라는 무시와 조소에서 느끼는 자격지심 때문이 아니라, 연안임에도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앞에 두고서 나 홀로 배를 몰고 가는 것에 대한 고독감 때문이다.

남들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가족들과 즐거움을 만끽할 시간에 나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내가 한 번도 정붙인 적이 없는 타지를 향해서 배를 몰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타지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같은 항구를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생긴 약간의 업무적 유대감과 삭막한 공장지대, 그리고 냉혹한 야경뿐이다.

야경에 대해서 수없이 많은 미사여구를 붙일 수 있음에도 냉혹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공장 지대 특유의 소음과 황량한 먼지의 잔해 때문이다. 넓기만 한 부지에서는 사람 그림자 하나 찾기 힘들고, 하역 작업을 하는 긴 시간 동안 같은 뱃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볼 수가 없다. 정 찾아 온 것도 아니고, 놀러온 것도 아니건만 거기서 왠지 모를 비애감을 느끼는 것은 아직 앳된 티를 벗어나지 못한 젊은 나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직도 때때로 사춘기의 변덕 같은 것이 도지는지 밤이 되면, 어떤 날은 슬픔을, 또 어떤 날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양감을 느끼면서 뜬 눈으로 새벽을 보내게 된다. 별을 보면서도 그런 조울증 비슷한 변덕이 알게 모르게 찾아오는 것 같다. 압도감과 손닿을 수 없는 미지의 아름다움에 관한 갈급함, 그리고 친근감 같은 것 따위를 느끼는 것을 보면 말이다.

사실 21년이라는 세월을 지내면서 별이 이토록 가깝게 느껴진 적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었다. 천문학자가 될 것도 아니고, 하늘을 도로 삼아서 운전하는 비행기 조종사가 될 것도 아닌데, ‘아, 이러이러한 별이 있구나’ 하는 정도의 가장 기본적인 지식만 유지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인생이란 어떻게 흘러가는지 인간의 좁은 세계관으로는 결코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인지, 배를 타게 되었고, 결국 밤하늘을 보고 있다. 아니 밤하늘에 박혀 있는 별을 보고 있다는 말이 더욱 옳을 것이다.

천문학자만큼이나 별과 친한 사람이 있다면 아마 항해사들을 꼽을 것이다. GPS나 오메가 같은 기계들이 나오기 전에 항해사들은 별을 통해서 위치를 알아냈고, 세계를 누볐다. 항해사가 되어서 밥을 빌어먹고 있는 나도 천문항해의 복잡함 때문에 잘은 설명할 수 없지만, 아무튼 중세 시대의 사람들, 우리가 대항해시대라고 부르는 시대에 살고 있던 항해사들은 별을 그렇게 이용했다.

그런 별을 향해서 더욱 가깝게 다가가려 했던 사람들은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정확한 선위 측정을 위한 연구를 거듭하면서 친근함을 느꼈을까, 아니면 그저 자신의 연구 성과물을 밝히는 데 쓰이는, 그야말로 타인과 같은 어떤 것이었을까. 내 생각에는 전자일 것 같다. 만인에게 똑같은 빛을 흩뿌리는 것에 주저함이 없는 그들의 관대함이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을 것 같다. 역마살이 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뱃사람에게도, 한 곳에 정착해 있는 사람들에게도 별은 같은 빛을 흩뿌린다. 거기에 대해서 느끼게 되는 우리의 감상은 천차만별로 다르지만.

어쨌든 나는 밤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를 받곤 한다. 나와 같은 시간에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수백만, 수천만 명은 있을 것이라는 것에서도 심심찮은 위로를 받긴 하지만, 역시 내게는 별이 더 큰 위로가 되는 것 같다. 별은 왠지 인간의 군락 같다. 그래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심심하지가 않고, 과연 별과 인간 사이에는 보편적인 유사함이 있을 것인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그러다가 선장님의 물음이나 명령에 민첩하게 대응 못하면, 너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는 혹평을 듣기도 하지만.

내가 별을 보면서 인간과의 유사점을 찾아보기 시작한 것은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다. 어떤 별은 음습하고, 어떤 별은 타락한 것처럼 보인다는 식의, 나름대로의 품평도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다. 전부 다 배를 타면서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승선 생활의 막막함 같은 것 때문인 것으로 기억한다. 승선근무 예비역을 과연 온전한 정신, 온전한 몸으로 마칠 수 있을지에 대한 자문 같은 것으로.

물론 별은 해답을 주지 않는다. 한때는 신화가 모티브가 된 그노시즘과 점성술의 주역이며, 거대하고 밝은 빛으로 반짝이지만 전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대고 싶다고 여겼던 것은 왠지 거기에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줄 것 같은 낭만과 판타지 같은 것이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늘에는 항상 북극성이 떠있는 것처럼 나를 닮은 별도 하나쯤은 떠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했었다. 막연하게 아름답고 막연하게 희망적인 나의 별을 통해서 두루뭉실한 성공에의 지침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어린이의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나만의 별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다. 하늘에 떠 있는 것은 주피터니 마르스니 하는 학술적인 이름을 부여받은 것들이고, 거기에는 연구자의 권위와 자부심 비슷한 것만을 느낄 수가 있다.

항해사들이 천측항해를 할 때 이용되는 책자인 알마낙에서도 별은 인간과 낭만을 공유하는 매개체이기보다는 정밀한 계산의 한축이 될 뿐이다. 정 붙이기 힘든 계산의 향연 속에서 별은 마치 신비가 고사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아마 중세와 현재의 조금 다른 점일 것이다. 개개인의 사족이 없이 너무나도 정확한 결과만을 내고 있으니까.

한때는 항해사들의 친구였던 별이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쓸쓸해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무지와 순수를 동의어라 했던 몇몇의 사람들에게는 그 적절한 어휘의 사용에 대해서 엄지를 치켜들고 싶다.

알지 않는 만큼 보인다. 별은 왠지 그런 것 같다. 그들이 보여주고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려면 어떤 학술적인 접근보다는 개인의 직관적이고 단순한 감성에 의존해야 한다. 몇 광년 멀리 떨어져 있고 어느 정도의 밝기를 가지고 있다는 식의 분석보다는 밝게 빛나니 많이 가깝겠구나 하는 식의 단순함 말이다. 그래서 나는 천측항해 같은 머리 복잡해지는 것에 대해서는 깊이 파고들어간 것 같지는 않다. 누군가는 이것이 그저 내 무지와 게으름을 미화시킨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삭막해져가는 별을 보느니 그냥 내 자유로운 심사에 의해서 변질 되어 가는 별을 보고 싶다.

같은 별을 보아도 느끼는 감상은 항상 천차만별이고 나는 그것이 즐겁다. 10분 전에 봤던 별과, 10분 후에 보는 별이 같다면 그것은 왠지 지루할 것 같다. 시간의 흐름이 마모되어 가는 것 같은 반복적인 일상에서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라도 없다면 과연 무슨 생각으로 배를 탈 수 있을까.

항해가 길면 길수록 짙어지는 것은 그리움이라는 녀석이고, 그것은 마치 모든 항해사에게 숙명처럼 따라 붙는다. 개중에는 진심으로 바다가 좋고 집안에 진저리가 나서 도피하듯이 나온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돈과 관련된 이유로 배를 타고 있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일확천금까지는 아니더라도 꾸준하게 일하면 재기의 발판 정도는 마련할 수 있을 테니까. 이렇게 말하면 노년의 항해사들은 왠지 패배자들의 군상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이 욕을 내뱉고, 내가 돈만 벌면 배를 내리겠다고 입버릇을 달고 살면서도 내리지 않는 이유는 별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조울증 비슷한 감각 때문이라고 여기련다.

이 정도까지 설명하고 보니 별은 정말로 변덕쟁이 같다. 책자에서는 삭막한 이웃이지만 육안으로 확인되는 것은 친근하고 때때로 슬퍼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으니까. 그런 별을 보면서 혼란과 즐거움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나는 과연 어떤 것이 함유되어 있는 인간인 것일까.

무의식적으로 별을 헤아리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칠 때가 있다. 나는 아버지의 체액 몇 방울과 어머니의 난자를 통해서 만들어졌다. 다른 사람들에 말에 의하면 어떤 일탈도 없었고, 나름 효자 소리를 들으면서 자라왔다. 배를 타겠다는 결심에서는 꽤 많은 반목을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잘한 선택이라는 위로를 받을 때도 있다. 내가 느끼는 사랑과 분노, 흥분, 고양 같은 감정들은 과학에 의거하면 화학적인 반응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몸뚱어리 또한 화학적 분석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슬프지만 그것이 감수성이 있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칭해지는 인간의 본질이다. 하늘에 떠있는 무수한 별에 비하면 그야말로 티끌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존재. 그러나 별 또한 먼지와 같은 쓸모없는 것의 결정체라고 하니, 이 얼마나 인간과 유사한가. 별을 보면서 느끼는 해괴하기 짝이 없는 감정의 향연들 또한 이 별과의 친밀감에서 느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재밌기까지 하다.

나는 그러한 별을 항상 보고 있다. 모순된 충동과 내재되어 있는 본연의 광기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은 별을. 그 시간은 하루에 꼬박 꼬박 네 시간이고, 오늘로만 벌써 몇 백 시간에 이르렀다. 지금껏 헤아렸던 별들만 수천에 이를 것이고, 그만큼 많은 시간을 흘렀음을 절절히 통감했다.

지금도 별은 하늘을 흐르고 있고, 별을 헤아리는 내 시간 또한 흐르고 있다.

 

□ 자료출처 : <월간 海바라기> 2012년 11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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