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착장

등록일20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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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착장

 

 

순구네 집이 보인다. 동네 첫 집이다. 낡은 함석집이 헐리고 그 자리에 양옥이 아담하게 앉았다. 장미넝쿨이 담장 위로 쭉쭉 뻗은 것이 예전의 울타리를 보는 듯하다. 계절 따라 목련이며 함박과 장미, 국화가 만발해 꽃집이라 불렀다.

순구 조부는 편안하신가 모르겠다. 별일 없다면 오늘도 낚시를 갔을 것이다. 소식이 없는 남편을 기다리며 자식 뒷바라지에 한평생을 보낸 순구 조모가 병으로 앞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돌아온 순구 조부는 낚시로 세월을 보냈다. 생선을 팔아서 푼푼히 모은 돈은 손자 학비가 되고 며느리의 용돈이 되기도 했다.

면목이 없어서라고 다들 말했다. 먼저 간 아내에게 손 한 번 따뜻하게 잡아주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했고, 또 아비 노릇 제대로 못한 죄책감이 가슴을 파고들었을 것이다.

새벽부터 바다에 나가 해질녘 돌아올 즈음 순구는 선착장에 마중을 나와 있었다. 도시락이며 낚시도구를 챙기는 손자가 기특했다. 아니, 순구에게 마중을 내보내며 속으로 걱정하는 아들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겉으로는 무덤덤한 부자지간이었지만 속으로 흐르는 정을 서로 모를 리 없었다.

새벽녘에 잠이 깨면 순구 조부의 마른기침 소리와 선착장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순구 조부는 노를 저어 소리 없이 바다로 나가고, 밤새 쳐놓은 그물을 걷은 어부들은 통통배를 이끌고 선착장을 향해 들어섰다. 가까울수록 뱃소리는 커져가고 사람들은 그것이 신호인 양 모여들었다. 굵고 싱싱한 생선을 먼저 사기 위하여 앞 다투어 배에 올랐다.

아낙들은 이웃 동네를 돌아다니며 생선을 팔고, 힘이 센 장정들은 읍내에 내다 팔았다. 작은 항구에 사람들이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돌아가면 산위로 해가 높이 솟아올랐다. 이른 아침의 왁자지껄한 일상이 지나가면 마을은 고요를 되찾았다.

선착장에 앉는다. 오늘 따라 바다가 잔잔하다. 물고기가 보이고 해조류의 움직임이 선명하다. 오염되지 않아 다행이다. 동네 앞은 썰물 때 갯벌이 훤히 드러나지만 선착장은 여객선과 어선들이 드나들 만큼 수심이 깊다. 여름에는 이곳이 놀이터였다. 몇 되지 않는 친구들과 어울려 잘 지냈었는데.

숙이 생각을 한다. 그녀는 두 살이나 위인 내 친구로 옆집에 살았다. 학교를 파하면 모여들어 놀이에 여념 없었다. 여름에는 바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숙이는 깊은 곳에서 자맥질도 하고 남자아이들을 이길 만큼 헤엄을 잘 쳤다. 겁이 많은 나로서는 여간 부러운 게 아니었다.

숙이를 비롯하여 친구들과 갯벌에서 조개도 줍고 해수욕을 즐겼다. 햇볕에 피부를 태워 온몸이 허물 벗듯 벗겨져도 틈나면 바다에 나갔다. 숙이는 키도 컸고 힘이 세어서 큰일이나 어려운 일도 척척 해결해냈다. 그런 만큼 대장이 되어서 우리를 이끌었다. 가끔 싸우는 일도 일어났다. 주로 숙이와 나의 다툼이었다. 다른 애들은 고분고분했지만 의견이 다를 때면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는 일이 신나서 하루를 버티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름 어느 날 신나게 놀다가 집으로 오니 숙이네 마당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숙이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이다. 갑작스런 사고였다. 좁은 선착장에 서 있던 트럭이 숙이 어머니를 미처 발견하지 못해서였다. 어린 동생을 부여안고 목 놓아 통곡하는 숙이 옆에서 같이 울었다. 숙이네는 조그만 가게를 했다. 그 날도 장사할 물건을 받기 위해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어머니를 땅에 묻고 서울로 떠난다고 했다. 여객선에 실려 이곳을 떠나던 날 동네 사람들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배가 안 왔으면 했고, 정작 배가 왔을 때는 기계 고장이라도 나길 바랐는데 여객선은 제 시간에 뱃고동을 울리며 떠나고 말았다. 눈이 퉁퉁 붓도록 서럽게 울었다. 한동안은 숙이가 보고 싶고 허전해서 밤마다 눈시울을 적셨다.

그 후로 전혀 숙이 소식을 듣지 못했다. 한 번쯤 어머니 묘소에 다녀갈 법한데. 그립다. 싸웠던 기억마저도 소중히 가슴에 담겨 있다. 변변한 위로의 말도 못하고 친구를 보냈으므로 마음이 아프기만 하다. 한 번만이라도 만났으면 좋겠다. 고향을 찾아와 내 소식을 물어온다면 버선발로 달려가 얼싸안을 것인데.

텅 빈 선착장이 넓어 보인다. 만남과 이별이 공존하는 곳이다. 마중 나온 사람들은 흥분과 설렘으로 환해지고, 이별하는 사람들은 아쉬움과 걱정스러움이 얼굴에 나타난다. 누군가 나의 얼굴을 본다면 필시 진한 그리움이 배어 있음을 느끼리라.

숙이가 떠나고 나서부터 선착장은 기다림의 장소가 되었다. 다시 돌아올 것만 같아 마중을 나갔다. 온다는 기별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매일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오리라 믿으며 선착장 한켠에 서서 내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곤 했다. 다들 환한 웃음을 보이며 손을 맞잡고 돌아간 사람들 뒤에 홀로 남아 복받치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토해냈다.

이제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 한다. 어둠이 선착장을 덮어온다. 숙이 어머니의 죽음도, 그로 인해 떠나버린 숙이네도, 순구 조부의 착잡함도 어둠 속에 묻힌다. 지금은 텅 비었지만 내일 새로운 해가 떠오르면 또 다시 바쁜 사람들의 일상이 시작될 것이다.

떠나보내는 이와 찾아오는 이들이 어우러진 이곳에서 나는 숙이를 기다릴 것이다. 순구 조부가 돌아온 것처럼 숙이도 고향을 꼭 찾을 것이라 믿는다. 떠나간 벗이 찾아올 곳이고 나 역시 그녀를 기다리며 서 있는 곳, 이곳 선착장에서 우리는 유년을 떠올리며 긴 회포를 풀 것이다.

 

심 인 자 ㅣ수필가

 

□ 자료출처 : 海바라기 2010년 10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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