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지기를 꿈꾸며(나의 일, 나의 작업 16)

등록일2020-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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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지기를 꿈꾸며(나의 일, 나의 작업 16)

 

 

◉ 지하철 역의 등대

등대가 바다에서 성큼 걸어 나왔다. 인천 지하철 󰡐예술회관󰡑 역에서 󰡐한국의 등대건축 드로잉 전󰡑이 열리고 있다. 󰡐드로잉󰡑 전시회라지만 사진이 대부분이다. 저자거리로 나온 등대는 이젤에 세워진 액자 속에서 행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발걸음을 찍는데만 열중이다. 일터를 향해 총총히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은 단호하다. 내 갈 길만 가겠다는 듯 등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들의 걸음걸이에는 도심으로 나온 등대의 마음이 전해질 여유가 없는 것인가. 어제의 피로도 풀지 못한 채 저마다 섬이 되어 힘에 버거운 하루를 시작하는 도시인들은 그렇게 무심히 지나친다.

전동차의 굉음이 지축을 흔들자 등대들이 움츠린다. 저음低音의 뱃고동이 벌써부터 그리운 모양이다. 사람 냄새를 찾아 바다를 떠나왔건만 인파 속에서 외로움은 더해 보인다. 파도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도심의 싸늘한 역구내에서 등대는 겉돈다.

등대 앞에 서면 갯내음과 파도 소리가 들릴 듯 하여 횡재라도 한 듯 출근도 잊고 바다를 만난다. 갯바람이 짭짤하다. 사진 속의 등대는 대부분 흰 빛의 원통형이다. 비슷해 보이는 그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같은 모양은 없다. 같은 점이라면 모두 바다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최초라는 팔미도八尾島등대를 바라본다. 100년이 넘는 역사의 의미가 읽혀지고 외세의 침략을 꿋꿋이 지켜낸 희고 둥근 몸이 고풍스럽다.

 

◉ 등대지기를 꿈꾸는 청년들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기사가 떠오른다. 무인도의 등대원 모집에 전국에서 지원한 청년들이 40:1이 넘는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는 보도가 그것이다. 해당 기능사 자격을 보유한 이로 자격이 제한되었고, 1차 서류 전형을 통과한 이들이었으니 당초 지원자들은 그보다 훨씬 많았으리라. 고학력자의 취업난을 반영하는 뉴스였으나, 바닷새를 벗삼아 항로를 밝히는 일로 청년기를 보내려는 이들이 그토록 많다는 사실이 의외였다. 한 달에 고작 5일 가량만 뭍으로 나올 수 있는 근무 여건에 외딴 곳에서 대부분 홀로 지내야 하는 특수성은 그들이 선호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 때문인지 예년에는 결원 시에도 충원조차 힘든 형편이었단다. 그만한 각오라면 뭍에서의 일자리도 어렵지만은 않았을 텐데….

등대지기로 산다는 것은 많은 것들로부터의 격리를 의미한다. 그들이 원했던 것이 단순한 일자리였을까. 정확한 직함은 󰡐항로 표지원󰡑으로 일제 강점기부터 전해온 󰡐등대지기󰡑라는 어휘가 담고 있는 애잔함은 그들의 고된 업무에 비해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어쩌면 그들은 󰡐관계󰡑에 지친 이들인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회와의 관계 맺기에 많은 좌절을 경험했다면 낭만적인 어휘에 숨어있는 등대지기의 고충과 외로움 정도는 기꺼이 감수할 각오가 되어있으리라.

 

◉ 통하였느냐?

사람들과의 소통에 관한 의문을 풀어준 이야기가 있다. 󰡐페란라몬 코르테스󰡑의 소설《등대》에서 광고 전문가인 주인공은 자신의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다. 고민 끝에 스승 막스에게 조언을 구했으나, 막스는 메너르카 섬으로 가서 다섯 개의 등대를 관찰해 보라고 했다. 그 섬은 스페인 남부의 작은 섬으로 작가가 어린 시절 이후 여름 휴가를 보내곤 하는 고향같은 섬이다. 스승의 조언이 의외였으나 그는 섬으로 가서 등대와 주변 풍경을 지속적으로 관찰한다.

그곳에서 주인공이 만난 등대는 매번 같은 일만을 계속하는 것이 아닌가. 하룻밤에도 수천 번 씩 반복해서 보내는 똑같은 신호에는 세련된 기교나 기술도 없었다. 그러나 항해사들은 한결같은 그 빛에 의지해서 안전하게 항구로 돌아오곤 했다. 등대는 밝은 빛을 비추며 뱃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쉽고 단순한 언어로만 통하고 있었다. 창의성 있는 광고로 대중을 겨냥한다 해도 통하지 않는 것은 일방적인 자기 만족일 뿐이었다.

등대에서 쏘아주는 불빛은 항해사에게 뱃길을 인도하면 그 뿐이다. 현란한 폭죽이나 레이져 쇼를 한다 해도 그것은 과잉 소통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등대의 역할은 항해사들이 항로를 찾을 수 있도록 간단하고 명확한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랬다. 주인공이 찾게 된 커뮤니케이션에 필요한 가치도 현란한 불빛도 근사한 소리가 아니었다. 칠흙의 밤바다에서도 자신의 역할에 오차가 없는 단순함만이 유용한 메시지였다. 상대방의 언어로 감동을 담아 전달해야 하는 소통의 기본은 등대만의 것일까. 누군가 갖가지 논리와 유창한 말솜씨, 현란한 수식어와 화려한 매너를 구사할 수 있다고 하자. 감동이 없다면 그것이 진정한 소통에 무슨 도움이 될까.

 

◉ 지쳐버린 나의 부리여

등대를 두고 가던 길을 걷는다. 횡단보도의 신호에 주춤하던 이들이 지루한 하루에 출사표를 내던지며 울컥 쏟아져 나온다. 가벼운 현기증이 인다. 저들은 오늘도 수많은 말들을 매개로 그것들이 만들어낸 관계 속에서 하루를 채울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내게도 학부모들의 상담 업무가 이어진다. 아마 오늘도 몇 번의 만남이 이루어지겠지. 일상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타인에게 보내는 나의 프레젠테이션 또한 나만의 도취는 아니었을까.

지친 나의 부리에 며칠만이라도 휴식을 주고 싶다. 이참에 등대원 공개모집에 지원해 볼까. 내가 홀연히 떠나도 큰 이변이 없을 일상의 분주함을, 하늘을 나는 바닷새와 바위를 파고드는 파도, 방파제를 느리게 걷는 이들의 뒷모습과 바꾸고 싶다.

오늘도 피할 수 없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 부질없는 말들이 떠돌겠지. 국물에 뜬 기름기처럼 둥둥 떠다니는 겉치레의 말, 말, 말…. 오늘은 불필요한 수식을 걷어낸 담백한 말로 소통하고 싶다. 단순하고 진실함에서 멀어진 립 서비스와 부유浮游하는 무의미한 말들을 피하고 싶다. 이런 아침에는 입김을 날리며 꺼이꺼이 노래라도 불러볼까.

 

엄 현 옥 l 수필가

 

□ 자료출처 : 海바라기 2011년 7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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