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수 없는 배(나의 일, 나의 작품 20)

등록일2020-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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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수 없는 배(나의 일, 나의 작품 20)

 

 

 

바다 아닌 바다를 본다. 철새들의 발길을 담은 샛강 물줄기가 바다와 몸을 섞는다. 바다 갈매기와 늪의 고니가 어울려 살아가는 곳. 그러나 머지않아 갯벌을 묻고 육지가 될 바다. 수평선에 떨어지던 해마저 지평선 위에 곤두박질칠 이곳 해안. 서해의 돌출된 곶串에 자리한 작은 포구. 새만금 물막이 공사로 어장과 갯벌을 잃은 심포항이 생을 마감하는 중이다.

항구를 한 바퀴 돌아 나오면 바다였던 땅을 만나게 된다. 김제 만경 너른 들 옆의 거전 갯벌이 지평선과 맞닿은 채 고요하다. 몇 년 전만 해도 사시절 백합과 꼬막을 캐던 풍요롭던 뻘밭이 황무지가 되어 굳어 간다. 까칠해진 모래 위로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돌부리를 제치고 피어난 수초가 밟힌다. 폐사한 조개들의 마른 몸피가 붉은 칠면초 사이에 널브 러졌고, 소금기를 찾아 올라온 나문재나물이 자꾸만 옷자락을 잡아당긴다. 멀리 보이는 고기잡이 그물과 버려진 통발 따위가 지난날 왕성했던 시절을 말해주고 있다.

다시는 바닷물이 들지 않을 땅. 소금밭도 사라졌고 갈매기도 찾지 않는 모래톱. 이곳 갯벌은 이제 숨을 쉬지 않는다. 한때 생명의 터전이었던 수천 년의 갯벌이 개발광풍을 맞으면서 사라진 것이다. 바다에서 삶을 이어가던 어민들은 바다가 막히면서 생계도 함께 막혔다.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구불구불한 갯고랑은 어민들의 상처 난 가슴을 닮았다. 바다와 갯벌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그들의 한숨 소리도 갯골 따라 묻혀버렸다. 오가는 사람들은 이제 갯벌이 지켜주던 과거에는 관심도 없다. 대신 새로 생긴 땅의 경계를 긋는 일에 눈을 밝힐 뿐. 나는 지도가 변하는 기점에 서서 남은 바다 냄새라도 맡을까 하여 깊은숨을 들이켜 본다.

그때 목선 한 척이 눈길을 잡는다. 닻을 내린 배가 낮은 물길 위에 그림처럼 놓여 있다. 사막의 와디 같은 물줄기가 바다들판 위에 고여 있다. 그나마 인근에 있는 만경 강물이 잊지 않고 흘러온 것이다. 바다는 등을 돌린 채 다시는 몸을 섞지 않는데 강물만 낡은 배 곁에 매 달려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형국이다.

주인마저 떠나버린 고깃배는 물길 따라나설 바다가 없고 다시 들어와 정박할 포구도 없다. 할 일 없어진 배가 물때를 그리워하며 소금 바람에 흔들린다.

흐르지 않는 강에 갇힌 배. 우리는 종종 그러한 생을 만난다. 시골길을 걷다 보면 토담 옆에 그림자처럼 쭈그리고 앉은 노인. 백발이 성성한 야윈 노구를 하고서 지는 해를 하염없이 바라다보던 눈빛을 읽을 때가 있다.

삶의 거대한 파도에 밀려 들판이라는 강에 오래도록 정박 중이던 사람. 차마 고향의 논밭을 두고 갈 수 없고, 노인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심었을 늙은 감나무를 등진 채 돌아설 수 없다.

 

 

나는 이제 심장을 잃었어요.

닻을 내린 내 몸은 피돌기가 멈췄지요.

어판장에 드나들던

날품 같은 인생이었지만

강과 바다를 이어주던 나의 몸뚱어리에

물살과 함께 안아 들였던 온몸의 상처

비릿한 바다 내음 목판에 배어 있는데

강물이여 제발, 나를 바다로 떠밀어 주세요.

 

나는 이제 꿈도 잃었어요.

육신은 옛 모습 그대로인데

비워낸 속내는 소금기에 삭고

바람결로 야위어가요.

등댓불 깜빡이는 출어 때가 되면

첫 집어등 켜던 설렘을 잊지 못해

어부의 기침 소리 가슴으로 듣는데

바다여 차라리, 내 몸을 파도 속 깊이 묻어 주세요.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어린 자식들 웃음소리가 담긴 고향집을 버릴 수 없기에, 감히 도시의 물길을 찾아 나서지 못했을 게다.

닻을 올리고 훨훨 떠나고 싶은 것이 어찌 폐선뿐일까. 퇴락한 정자 옆에서 수백 년을 지키던 은행나무. 잎이 무성했던 젊은 시절을 뒤로 한 채 이제 열매 한 톨 맺지 못하는 서러움을 깊게 파인 나무 주름에서도 읽을 수 있다. 날 수 없는 작은 새. 그리고 바람마저 잠자는 빈집……. 고요가 이리도 가슴 저밀 줄이야.

그 옛날 번성했을 꼬막횟집 간판 사이로 고기잡이를 멈춘 낡은 배가 갯바람에 삐걱대고 있다. 언제 다시 힘찬 엔진 소리를 내며 바다로 나아갈 수 있을까. 갯벌 갈대숲에 백로의 울음소리가 깊어진다. 창해상전滄海桑田이 되어버린 땅에서 새들도 떠날 채비를 한다. 인기척에 놀란 백로 무리가 일제히 하늘로 치솟는데 휴선 한 척만이 남은 갯벌을 지키고 있다.

사람들이 떠난 빈자리도 이보다 적막할까.

 

김 정 화 | 수필가

 

□ 자료출처 : 海바라기 2011년 11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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