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는 길이 있다

등록일20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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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는 길이 있다

 

 

바다를 본다. 물 위와 물속을 구분 지어준 채 의연하게 중심을 잡은 바다를 본다. 완장을 차지도 무기를 들지도 않았으면서 강을 항복시키고 섬을 점령한 바다. 배는 띄워 주고 물고기는 가라앉혀 평정시키는 바다를 본다. 바다를 보는 일은 나를 찾아 나서는 길이다.

 

“바다는 내 삶”이라며 의기양양하게 소리치는 사람들이 부럽다. 일출과 일몰의 바다, 적도의 바다와 지중해의 바다, 보름달이 뜨는 바다, 초승달을 삼킨 바다에 대해서 위풍당당하게 말을 잇는 고향 선배가 있다. 해양 관련 대학을 나와서 이십여 년 동안 선원 생활을 하던 그가 바다이야기를 꺼내는 날이면 나는 감히 맞장구조차 치지 못한 채 숨죽이며 경청한다.

 

떼배를 타고 다니며 평생 미역밭을 가꾸는 공수 댁 아주머니를 만나도 “요샌 잠수병 때문에 머구리질도 어렵고 늙어지니 실게질도 힘들고…….”라는 말의 절반도 이해 못하는 내가 갑갑하다 못해 면구스럽기조차 하다. 해변 산책길에서 만난 낚시꾼도 바다와 사람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고기를 만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조류의 빠름과 파도의 세기며 달의 방향과 물때 주기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무명의 낚시꾼도 바다 앞에서는 한없이 우러러보인다.

 

생각해보니 매운 해풍을 맞으며 뱃길 다녀본 적 없고, 짠물에 발 담가 물미역 한번 건지지 않았으며, 방파제 끄트머리에 앉아 밤바다에 던진 야광찌라도 지켜본 일 없다. 기껏해야 청사포 앞바다에 밀려온 피뿔고둥 서너 개 주워 올렸거나, 변산반도에서 낙조를 바라보며 탄성 지르고, 여름날 해변의 수평선을 배경으로 사진 몇 장 찍은 일 정도이다.

 

바다를 좋아한다는 말을 노랫말처럼 하고 다니면서도, 바다가 좋아서 이기대 바다 곁으로 덜컥 이사를 했으면서도, 매일 아침 한 시간여 바닷길을 걸으면서도, 누가 나에게 바다이야기를 해보라면 청맹과니처럼 눈만 끔뻑일 뿐 아는 것이 없다. 결국, 나의 바다는 관조의 바다에 불과한 것을.

베푸는 바다의 심성을 헤아려 본다. 해국이 가득한 바닷길을 사람에게 내어주고 뭍으로 솟아나길 희망하는 암석은 경계에 자리를 만들어 준다. 묵상을 원하는 돌은 해심석으로 가라앉히며 ‘여’라는 이름의 바위까지 물살로 보듬는다. 하늘새에게 길을 터주어 쉬어가게 하고 산 그림자 내리면 말갛게 씻어주기도 한다.

 

때로는 해일에 밀려 살점이 떨어지고 암초에 부딪혀 시퍼렇게 멍이 들어도 꿈쩍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장마에 젖지 아니하며 한풍에 얼지도 않고 폭설마저 감싸 안는 속성을 지녔다. 마치 모든 연주에 귀 기울여야 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바다는 물과 바람과 세월의 소리에도 귀를 모은다. 그 여여한 기운은 세파에 흔들리는 인간의 마음까지 고르게 다독인다. 이러한 바닷소리를 오래도록 듣게 된다면 사람도 중심을 잡고 등대처럼 우뚝 설 수 있을까.

 

배가 지나간다. 하얀 물살을 가르며 나아간다. 길 없는 바다에 물길 만들어 제 몸을 싣고 떠난다. 닦인 길로 다니는 사람과는 달리 배는 스스로 길을 만들어나간다. 뱃길이 쉬이 열리는 까닭은 바다가 제 몸 기꺼이 내어주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글의 길을 찾아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바닷길을 찾고자 해풍 앞에 섰을까. 김영랑은 “꿈꾸는 바다를 깨울 수 없다.”라고 조심스레 고백했으며, 김기림은 순진한 나비가 바다를 보고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라며 수심을 알 수 없는 바다에 마음을 내비쳤다. 섬에서 태어나고 자란 소설가 한승원 선생은 “바다는 내 문학의 자궁이다.”라고 밝혔고, 최진호 수필가는 “바닷물이 눈물과 섞이면서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해 짠맛을 내고 있다.”라며 생명의 바닷길을 노래했다.

 

농바위에 앉은 바닷새 한 마리가 등대처럼 고요하다. 그 아래로 문학의 바다가 펼쳐져있다. 출항을 알리는 출발지와 항해를 위한 도정과 정박의 목적지가 될 문해(文海)가 출렁인다. 나의 문학도 출항을 위해 뱃전에 기대어 본다. 해안선을 돌아나가는 고깃배 한 척이 파도를 가르며 지나간다.

 

바다에는 길이 있다.

 

김 정 화 ㅣ수필가

 

□ 자료출처 : 海바라기 2009년 5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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