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바다 단상

등록일20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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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바다 단상

 

 

낮과는 전혀 다른 얼굴. 어둠에 몸을 숨긴 바다는 깜박이는 고깃배의 불빛으로 웅크린 고양이의 눈같이 번득인다. 피서지의 밤바다는 청옥의 신비를 두르고 낮게 엎드려 있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이 없어 좋다.

우리는 한낮의 명랑이 지나친 바다를 동경하는 피서객은 아니었다. 해 다 저물면 조용해 질 바다를 기다려 찾아온 것이다. 신을 벗어들고 바닷물에 발목을 적시는 정도가 고작이지만 해변을 끝까지 걸어보는 것으로 족하다. 잠든 바다의 뒤척임 같은 파도소리에 귀 기울이는 즐거움이 크다.

반들반들 까만 몽돌 같은 하늘이 갑작스런 폭음에 놀라 빛이 튀고 환해진다. 사위를 깨우는 폭죽놀이다. 몇 걸음 앞에서 청년 두 명이 뭔가에 열중해 있다. 환경오염이나 안전에 위해를 주는 정도가 아니라면 권장할 일은 못 되어도 폭죽놀이는 여름 밤바다에서 특별한 볼거리이기도 하다. 꼬리를 길게 끌며 하늘로 치오르는 것이 있는가 하면 타오르기도 전에 떨어지는 불꽃도 있다. 무엇이든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중도하차 하는 생은 안타깝다. 불꽃이 사라진 하늘은 다시 어둠에 잠긴다.

불꽃은 현실에서 잡으려 애쓰다 끝내는 놓쳐버릴지라도 포기하지 못하는 꿈 그것 같은 미련으로 남는다. 폭죽을 쏘아 올리는 청년들의 뒷모습에서 단순한 놀이 이상의 진지함이 비쳐 보였다. 청년들은 가슴에 간직해 온 아직은 설익은 꿈을 광활하고 어둔 바다에서 한 번 펼쳐 보았는지도 모른다. 손을 털고 일어서는 청년의 어깨가 가벼워 보인다. 오래전부터 손에 쥐어왔던 무르기 만한 내 손 안의 형체도 가만 쥐어본다. 사방이 깜깜해도 있는 힘껏 솟아올라 어둠을 몰아내던 불꽃처럼 열정을 다하면 희망은 잡히지 않을까.

헛나이만 먹고 사는 게 도무지 신이 나지 않아 바람이나 쐬자고 여동생과 둘이 나선 길이다. 가족에게 말 않고 나와도 어긋날 위인들도 못 되는지라 나선 곳이 고향 근처의 바다였다. 내 속이 아니어도 훤한, 자매지간인 것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한참을 걷다 보니 강물과 바닷물이 합수하는 지점에 놓여진 다리 위까지 왔다. 주변 경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구조물이 보기에 언짢다. 조화를 조금이라도 염두에 두고 건설했더라면 이 고장의 색다른 풍물 하나가 되었을 텐데. 개발을 발전이라 믿으며 다리를 놓았을 그 사람들의 수고가 빛이 덜 난다. 발끝을 툭툭 차며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다리를 건넌다.

태풍이 지나고 나면 마술처럼 지형이 달라지던 곳. 며칠 새 전에 없던 작은 모래언덕이 생기고 어른들이 풀쩍 건너 뛸 수 있던 강폭이 멀찌감치 멀어지기도 했다. 그 궁금증으로 비 개이기를 기다리던 나는 어른들의 한숨쯤은 관심 밖이었다.

하얀 모래톱에 찍힌 물새 발자국도 작은 갯벌에 까맣게 몰려나왔다가 잽싸게 달아나던 칠게들도 없다. 깜둥이 되어 멱 감고 놀던 여름 아이들도 흔들대며 졸고 있던 낡은 나룻배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다 가버렸을까. 내 동무 종애도 옥념이도 개구지던 동네 아이들의 얼굴도 생생한데…… 그들이 나를 떠났는지 나 혼자 너른 바다로 너무 멀리 와 버렸는지 지금 나는 왕따 되었다. 나룻배를 밀어낸 다리 난간에 기대어 꿈을 꾸었다.

하구를 거슬러 강가에는 방풍림의 솔숲이 어둠에 묻혔다. 수령을 셈하지 못할 만큼의 노송들은 나를 기억할까. 강과 바다가 무섭게 뒤집혔다던 사라호 태풍의 위력을 솔숲이 미친듯 울어대던 소리로 나는 들었던 것 같다. 동쪽 방파제 끝에 아버지의 유골을 뿌렸던 바다가 깊이 잠들어 있다. 아버지 생각에 눈뿌리가 아려온다.

병석에서 일 년여를 앓으셨던 아버지. 하루는 연한 생선회 한 점 입에 넣어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소주를 찾으시는 게 아닌가. 평소 술 좋아하시는 아버지가 싫기도 했지만 특히나 병중이라 냉정히 거절했다. 이래저래 약자이던 아버지는 눈꼬리로 말없이 눈물 한 줄기 주르르 흘리셨다. 입만 조금 축여보고 싶었을, 아버지의 그 작은 소원조차 들어드리지 못한 불효를 오늘따라 더 잊을 수가 없다.

바닷가 노천 테이블에 술잔과 홍합탕을 앞에 놓고 앉는다. 이심전심 아버지 생각에 동생과 나는 말이 없다. 거부할 수 없이 아버지를 닮은 우리는 맥주 한 병은 거뜬하다. 술을 통해 세상사 보고 느끼는 프리즘 하나를 더 갖게 해준 아버지가 이제는 고마울 따름이다. 동생과 나는 바다를 향해 술 한 잔을 뿌리고 철썩이는 파도소리를 섞어 술잔을 채운다.

나는 열 살 전후를 마지막으로 같이 뒹굴며 놀았던 바다와의 교감에서 멀어졌다.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마땅히 숨겨줄 그늘 없는 바다보다 찾을 때마다 아름으로 품어주는 숲이 좋았다. 소금기 끈적이는 해풍보다 산등성이를 달려내려 온 청량한 산바람에 반했다. 그때부터 바다는 데면데면 스쳐 지나는 그림일 뿐이었다. 언제부턴가 바닷가 마을을 지나면 비릿하고 짭조름한 갯내음을 일부러 맡곤 했다. 내가 돌아보지 않았어도 바다는 내 안에 조용히 살았던가 보았다. 내가 떠났거나 말았거나 한자리에 있어준 바다는 이제 아버지까지 담고 있다.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산란하고 엉켜 있을 때, 어깨를 감싸주는 밤바다의 어둠과 모래톱을 씻어대는 파도소리는 내 안의 수면을 잔잔하게 해준다. 밤하늘을 잠깐 동안 밝힌 불꽃처럼 보고 싶은 사람도 때 묻지 않은 기억들도 스치고 지나간다. 수도 없이 꺼내 보아도 닳지 않은 기억의 바다는 그래서 늘 푸른가 보다.

행복이 수많은 NG속에서 얻는 한 컷이라면 이 시간이 훗날에 기억될 소중한 그 한 컷일 것이다. 파도소리 잦아든 암묵의 바다는 아버지의 고른 숨결로 넘침도 모자람도 없이 출렁이고 있다.

 

김 정 자 l 수필가

 

□ 자료출처 : 海바라기 2009년 6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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