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미래로(유연희)

등록일20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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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미래로

유연희(소설가)

 

내 어머니는 바닷가 사람이었다.

외가가 영도에 있어 나는 수시로 버스와 전차, 통통배를 갈아타고 영도다리를 건너다녔다. 온천장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우리 형제들에게 영도는 바다이자 우리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기도 했다. 바다는 한두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거대하고 경이로운 어떤 존재였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생의 어떤 극점을 늘 ‘바다’와 연관지어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가령 자살을 한다면 바닷가에서 할 것이고 실연을 당해도 바닷가를 거닐 것이고 생의 가장 기쁜 순간도 바닷가에서 맞이하겠다는 식이었다. 내가 만일 ‘위대한 갯츠비’의 갯츠비라면 여자 주인공을 꼬셔낼 파티도 ‘선상(船上)’에서 했을 것이었다. 그래서였던지 어릴 때 나는 곧잘 ‘나중에 크면 마도로스와 결혼하겠다’고 읊고 다녔다. 그러나 운명의 신(神)은 조그만 계집아이의 허황한 말을 무시해 버렸다.

정작 결혼 적령기가 되어 친구들과 시내를 싸돌아 다니다 하얀 제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해양대 학생들을 만났을 땐 가슴이 뻐근하도록 설레긴 했지만 그들과 접선(?)할 통로가 내겐 없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맞선을 보고 결혼할 남자의 직장이 ‘영도’라 했다. 그와 살 신혼의 살림집을 구하기 위해 82번 버스를 타고 처음으로 영도의 산복도로로 들어섰다. 그전까지의 내게 바다라면 영도다리 인근의 선구점과 철공소, 선창에 빡빡하게 들어차있는 배들과 자갈치시장, 통통배가 닿는 지점에 있던 ‘승리창고’와 외가(外家)가 전부였다. 그리고 여름이면 완행열차에 시달리며 도착한 송정이나 광안리, 일광 등이 바다의 한계였다.

내가 알던 바다는 자연과는 거리가 멀었다. 차라리 일상의 한부분이었다. 그러나 그 일상에서 나는 국외자이거나 이방인이었다. 그러던 차에 82번 버스 안에서 나는 전혀 새로운 바다를 만났던 것이다. 일상과 저만치 떨어져 아직 태고적 호흡을 내쉬고 있는 바다. 버스가 곡각지를 돌면서 낮은 지붕들 사이에 푸르게 잠겨 있는 바다를 보는 순간 이상하게 가슴 밑바닥이 저려왔다. 오래 그리던 님을 드디어 만난 것처럼. 싯푸른 바다는 은빛으로 햇살을 튕겨내면서 말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랬다. 바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곳에 살면서 시인(詩人)이 되지 않은 게 이상해.”

일상이 아닌 자연의 바다를 처음으로 만난 놀라움을 나는 남편에게 그렇게 표현했다. 남편 역시 어릴 때 내 허황한 꿈을 유념해 주지 않던 주위사람들처럼 다행스럽게 내 말을 건성으로 들어넘겼다. 그 후 나는 이십여 년을 영도에서 살아왔다.

 

국민학교 3, 4학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우리 자매를 튜브에 태워 바다로 데리고 갔다. 여름 해수욕장이었다. 주변에는 피서객이 명절 전날 공중 목욕탕에 온 사람들처럼 들끓고, 하얀 파도가 연신 그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검은 고무 튜브 하나에 달라붙은 우리 세 자매는 수영을 잘하는 아버지만 철썩 같이 믿고 바다로 들어갔다. 주위엔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의 사람들 천지고 바로 곁에 바싹 붙은 언니와 동생도 곧이어 맛볼 즐거움에 대한 기대로 미리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발이 바닥에 닿지 않을 즈음 나는 문득 무서움을 느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의 무섬증과 상관없이 더 깊은 바다로 우리를 밀고 들어가 ‘파도 타기’를 시작했다. 언니와 동생이 기다렸다는 듯 하얀 하늘처럼 깔깔거리기 시작했고 덩달아 나도 입을 벌렸다. 그때의 느낌이 희열이었을까. 어쨌든 희열의 시간은 너무나 짧았고 다음 순간 나는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버지가 튜브를 뒤집어 버렸던 것이다. 우리 세 자매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렸고 저 멀리 백사장에 남아있던 어머니와 뒤늦게 태어난 막내 남동생이 갑자기 까마득히 먼 존재로 사라져갔다.

결국 우리는 모두 구조(?)되었다.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수영을 직접 배울 기회를 만들어주려 했고 실제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런 식으로 수영을 배웠다고 했다. 그러나 어린 내게 그건 죽음의 체험이었다. 지금도 나는 바다의 속살을 맛 본 경험을 죽음과 공포로 기억하고 있다. 그 날의 실습에 별다른 상흔없이 말짱하게 구조되었던 언니와 동생은 그런 탓인지 오래전에 바다를 떠나 서울에 정착하였고 나만 이곳에 남아 만성중이염에 시달리게 되었다. 요즘에는 워낙 어마어마한 병들이 많아 일견 사소해 보이는 귓병은 그 후로도 내 생(生)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며 바다와의 질긴 인연을 고집하고 있었다.

산복도로행 버스 안에서 바라본 바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착각은 어쩌면 어린 날의 그 충격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언제부턴가 내 아들의 꿈은 영도를 몽땅 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영도가 더 이상 개발되지 않도록 보존, 관리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리하여 어서 빨리 어른이 되지 않는 자신을 안타까워하곤 했다. 그런 아들이 어쩌면 평생 걸려서도 영도를 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현실인식을 하게 될 즈음 우리는 영도를 떠나왔다.

결혼 이후 줄곧 살아왔던 영도의 집을 두고 어느새 나는 출생지로 돌아와 있다.

누군가 내게 딸을 외항선원에게 시집보내자고 하면 지금의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철 없던 내가 외항선원에게 시집가겠다고 읊조릴 때 내 말을 묵살하던 어른들의 심정을 언제부턴가 알아버린 것이다. 지금의 나는 바다를 생계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과 이웃이거나 가족이 되어 있다. 소리없는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쓰러지는 바다는 이미 내 삶의 일부로 뗄 수 없이 편입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수영을 하지 못한다. 수영은 어느새 최후의 목표가 되어 버렸다. 내가 수영을 배워 바다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날, 나는 내 생이 완성(?)되는 거라 믿고 있다.

내 아들이 갈매기처럼 날개를 펼칠 때, 나는 바다로 돌아가 있을 것이다. 내가 경험하고도 못다한 바다 이야기는 내 딸의 가슴속에 유전될 것이다.

 

□ 유연희, 소설가

 

◇ 자료출처 : 해기 2003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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