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로(航路)

등록일2020-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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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로(航路)

주갑동

 

항로는 바다를 통로로 선박이 지나다니는 길을 말한다. 원칙적으로는 두 지점 간 최단거리를 택하지만 지형, 기상, 해상, 경제, 행해술 등 여러 조건에 제한을 받기 때문에 배의 통행이 가장 쉬운 항로가 선정된다. 항로를 분류할 때 해안에서 떨어져 있는 정도에 따라 연안항로와 대양항로로 나뉘고 연안항로는 해안에서 가까이 운행되는 항로이지만 대양항로는 세계 최대의 해상 수송량을 갖는 유럽과 북아메리카 사이의 북대서양 항로, 이외에 북태평양 항로, 남대서양 항로 그리고 아시아와 유럽, 항로 등이 있다. 그 밖에 선박의 크기나 종류에 따라 여러 항로가 구분되기도 한다. 물론 항로는 육로처럼 고정된 도로에 차선을 그어 운행하도록 되어 있지는 않지만 내해의 협수로나 교통량이 많은 곳에서는 입표(立標)나 부표(浮漂) 등을 설치하여 왕복 또는 횡단로를 구분해서 운항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항로는 아주 가까운 거리를 제외하고는 필요시 항해자가 해도에 항로선을 선정하여 긋고 침로를 정하여 따라가는 항정선(航程線)이다. 그래서 항로는 거의 고정된 길이 아니다. 항로의 상황은 해역과 계절에 따라 다르고 기상과 해상에 의한 외력을 이용하거나 또는 회피하는 경우가 있게 되어 예측항로대로 운항이 쉽지 않다.

흔히들 인생항로라는 말을 쓴다. 인생을 항로에 비유한 표현은 한마디로 인생길은 파란만장한 험로임을 의미한 것이리라. 물론 인생이 가는 길도 배의 항로처럼 정확히 지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격, 취향, 형편, 능력, 직업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저마다 스스로 판단해서 선정해야 하고 목표를 향해 나름대로의 노선 위를 진행해야 한다. 결코 탄탄 대로만이 아닌 험산준령의 가시밭길이기도 해서 가는 이의 각오와 능력 자세에 따라 그 성패가 좌우되는 것이 인생항로가 아니겠는가.

마치 항로를 운항하는 선박이 항해사의 상황판단 능력과 항해계획 그리고 항해술에 의해 그 선박의 안전운항과 소기의 목적달성 여부가 결정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배도 인생도 가는 길을 항로라고 하는 뜻이 통할 만하다. 배가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흘러가서도 안 되며 항해중 어떤 이유에서건 중단하고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이다. 아무리 사나운 폭풍과 노도가 휘몰아쳐도 항진을 멈출 수는 없는 것이다. 단념하고 방치하면 파선이요, 침몰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배는 연안을 떠나면 망망대해의 작고 고독한 일엽편주다. 북태평양 항로를 예로 들면 일본 동부에서 북아메리카의 서부까지 약 5천 마일의 먼 거리다. 섬 하나 보이지 않는 무변대해, 엄동설한 사나운 계절이면 대양 전체가 눈보라와 광풍이 포효하는 파도밭이다. 안개철이면 선수(船首)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속을 헤매며 항행하는 기간이 열흘도 좋을 때가 있다. 뱃전을 스치는 물소리만 들릴 뿐 속력도 없는 듯한 적막한 항해, 외롭고 견디기 힘든 길이다. 이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대양의 항로상에서는 배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물론 청명한 낮과 밤에는 태양과 달을, 조석의 박명시에는 별들의 고도를 관측해서 선위(船位)를 내는 천측항법과, 야간과 우천시에는 로란 무선방향탐지기 레이더 등을 동원한 전파항법에 의해서 배의 위치 확인이 가능했다. 지금은 인공위성항법장치(GPS)를 이용하여 더 쉽게 더 빠르고 정확하게 위치를 확인할 수 있어 옛날 항법장치들을 무색케 하지만, 그렇다고 항해사가 택한 항로선과 실제 항적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항로선을 벗어날 때마다 침로를 변경해서 마침내 목적항에 입항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항로도 요람에서 무덤까지가 고해의 길이다. 먼 길이다. 힘겨워도 가야하고 포기할 수도 없다. 세파에 지친다고 될대로 되라는 자포자기 인생은 파멸이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어떻게 인생항로선을 긋고 어떤 자세로 좇아가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올바른 선택과 진행으로 소기의 목표에 이르려면 우선 시간을 아껴야 한다. 시간은 곧 인생이다. 재물을 낭비하는 것보다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더 어리석고 위험한 짓이며 허송한 세월은 만회할 수 없고 그만큼 짧은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행여 남의 길을 비집고 침범하거나 방해하고 추월을 하는 것도 금물이다. 혼란과 충돌을 야기하게 될 뿐이다. 정진해야 한다. 어쩌다 계획한 진로를 벗어났더라도 한사코 정한 진로에 가까운 족적을 남기며 가는 인생항로라야 하리라.

그리고 세상에는 자기 재산이 따로 없다. 임시 맡겨진 것일 뿐이다. 자기가 피나는 고생으로 모은 재산일지라도 함부로 흥청망청 쓰면 죄가 되거늘 하물며 남의 돈을 협박과 사기로 수억도 모자라 두 자리, 세 자리수의 억씩이나 뜯어 사리사욕을 채우고 낭비하며 낯 뜨겁게 그런 것쯤은 관행이라고 하며 남의 탓만 일삼아 싸우기만 하는 정치쟁이들의 가련한 인생항로가 있는가 하면 독거노인이나 소녀 소년가장들과 노숙자들, 나아가 가난을 못이겨 애들과 함께 한 가족이 자살하는 처참한 인생항로도 있다. 그 중에도 스스로 살기조차 어려운 형편에 남모르게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며 아름다운 인생항로를 가는 부러운 사람도 있다. 인류 문명을 위해 크게 공헌하며 훌륭한 인생항로를 긋고 가는 선구자들과 함께 우러러 칭송해야할 경우도 많다. 그런데 인생항로는 한 번 가면 다시 고쳐갈 수 없는 길인데, 나는 너무 어리석고 무모했었다. 그리고 태만했다. 어렵사리 항해사가 되어 30여 년이 가깝도록 연안의 협수로는 물론, 오대양을 누비고 다니다시피 수만 마일의 항로를 항해했다.

그러나 한 번도 내가 그은 항로선과 실제항적이 정확히 일치하는 수가 없었다. 이유로 풍파와 해조류의 영향, 측정오차, 항해계기의 오차, 조타의 실수 등을 들지만, 되돌아 보면 너무 수치스러운 족적이요, 핑계도 많다. 억겁의 세월을 마다 않고 지치지도 않으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운행하는 우주의 무수한 별들의 항로는 감히 비유할 수도 없다. 하지만 지구의 극에서 극으로 하늘을 나는 철새들의 멀고도 정확한 여정, 육지와 바다에서 때를 따라 어김 없이 이동하는 동물들과 물고기들의 생사를 건 긴 항로에 비하면 내가 겪었고 가야할 항로는 얼마나 보잘것 없고 부끄러운 항로인가.

아쉽지만 남은 인생항로의 여정이나마 잘 마무리해서 언젠가 이승과 저승 항로의 전환점에 서는 날 그래도 󰡐애쓰다 가노라󰡑고 환송받는 고별이 되어야 할텐데…….

 

◇ 자료출처 : 해기 200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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