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의 바다, 인간의 바다

등록일20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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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바다, 인간의 바다

이 충 호

 

바다와 인간의 관계, 그것은 아마 인간과 인간의 관계만큼이나 깊고 오래되었을 것이다. 태초이래 인간은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로부터 삶의 자양을 받아왔다. 때에 따라서 바다는 극복의 대상이기도 하였지만 인간의 삶이 펼쳐지는 생활의 장이며, 융화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바다는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막연한 기대나 몽상이 아니라, 바다의 광활함과 거친 물결 속에 우리의 보편적인 일상의 모습과는 다른 삶의 양식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물화된 안온한 일상이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 바다와 인간의, 그리고 삶과 죽음의 대결이 보다 치열하게 펼쳐지는 현실이 거기에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문 직업인으로 바다에 나가 본 적은 없지만 80년대초 상업 포경이 금지되기전 자료 취재차 마지막 포경선에 동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다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8월 중순 서해 흑산도 인근으로 가는 포경선이었다. 그때 비로소 내 마음 속에 꿈꾸어 왔던 바다와 현실의 바다가 얼마나 다른가를 알 수 있었다.

망망 대해의 고적감 속에서 나는 비로소 바다에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밤이 되면 수많은 별들이 바다에 몸을 담그던 시간 속에 나는 모래알 보다 작은 내 삶의 실체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육지에서 꿈꾸었던 헛된 욕망과 아집의 끈도 놓을 수 있었다.

바다에는 끝이 없었다. 돌아보고 돌아 봐도 거기엔 시작도 끝도 하나가 되어 돌아오는 바다의 실존뿐이었다. 빛은 어둠으로 어둠은 빛으로 바뀌는 시간의 순환 속에서 바다는 늘 그렇게 채워진 또 또 비워졌다. 거기 치솟는 물결의 감성과 무너지고 이성의 난류 뒤에서 또 몇번의 낮과 밤은 찾아왔다. 물결 속에서 한갖 해초와 같았던 나의 삶에도 출출히 밤은 찾아 와서 가난한 영혼의 마을마다 흔들리던 불빛들. 그러나 내가 꿈꾸었던 불빛은 더 멀리서만 깜빡거렸다. 다가가면 갈수록 더 멀어지는 이상의 별, 그것이 바다였다.

그날 찬바람에 응고되어 그 길고 긴 상념의 터널 속에서 오한에 떨던 초라한 내 삶의 언어나 거기에 비하여 너무나 싱싱하던 바다의 풀잎도 하나씩 어둠에 묻혔다. 밤이 되면 내가 처할 바다의 상황은 딜레마였다. 하늘과 땅, 그리고 우리의 운명마저 어둠에 섞여 바다는 한 치의 비젼조차 허용하지 않는 캄캄한 현실의 딜레마였다. 나의 사랑과 이성, 그리고 나의 철학과 인식이 육중한 어둠에 눌러 고통받는 딜레마였다. 그러나 바다는 어둠을 통해서 다시 태어나는 고통과 인내를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 바다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바다를 알기 위해서 여기에 왔다. 멀고 먼 원형의 바다를 찾아서 말이다. 오랫동안 뱃전에 서서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바다의 불빛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인고의 뜨거운 악수를 나누며 명멸하던 그 불빛들. 그래서 내일이면 다시 태어나는 바다의 위용 앞에 나도 당당히 서고 싶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안락한 삶의 방식과 문명의 이기들에 짓눌려 끝없이 침몰하는 시대의 황무지에서 인간이 구할 수 있는 것은 자연이라고 믿어 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콘크리트 숲이나 온갖 허욕과 삭막한 언어의 모래밭에서도 자연은 인간에게 유일한 희망이며 구원의 실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다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끝난 곳에서도 새로운 시작을 열어 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인간인 내가 살아오면서 인간에게서 받은 실망과 분노가 얼마나 컸으며, 인간인 내가 인간을 울린 적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는 양심과 진실이 왜곡 당하고 참담히 짓밟힐 때 얼마나 외로웠던가. 그러나 인간인 내가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길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길은 결국 인간에게 있다는 명제는 그때 바다를 통해 얻은 나의 깨우침이다.

온갖 물리적 사조가 범람하는 메카니즘의 사회에서

인간은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인간이 처한 운명이다. 바라보면 황량한 물질 문명의 그늘 뒤에서 인간은 얼마나 왜소하고 소외되어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원시의 자연인 바다 앞에서 인간은 외롭지 않았다. 바다가 우리의 육신과 이성의 상처를 치유해 줄 뿐 아니라, 순연한 삶의 방식과 생명의 근원까지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바다는 우리에게 축복이다. 자연 자원이 부족한 이

나라에서 바다만큼이 축복은 없다. 바다는 작은 국토를 무한히 연장시키며 세계로 가는 길을 열어 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바다야 말로 세계 중심에 우리를 있게 하는 무한한 축복이다.

한 때 부국 강병의 대제국이 오늘날 한갖 후진국으로 몰락한 경우는 대부분 바다가 없는 나라들이다. 바다가 국토의 축복이라면 그 축복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바다의 일꾼들이다. 축복의 의미를 일찍이 발견하고 그 축복 앞에 섰던 바다의 일꾼들이야 말로 우리민족의 개척자들이었으며 진정한 애국자들이다. 끝없이 국토를 연장시켜 가는 바다의 일꾼들이 흘리는 땀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일찍이 그들은 개척자들이었다.

우리의 신대륙은 바다였다. 바다는 우리의 개척의 역사였다. 우리가 북쪽의 광대한 국토를 상실한 것이 역사의 후회라면 바다로의 진출은 국토의 획득이었다. 우리가 바다를 지배해 왔던 역사만큼 자랑스러운 역사는 없다. 바다는 우리의 꿈이며 이상이며 현실이고 미래다. 바다만큼 확실한 미래는 없다.

끝이 없으면서도 그 시작과 끝이 다시 만나 이루는 바다의 일상은 우리의 삶처럼 언제나 혼자서 출렁인다. 바다 앞에서 삶은 그저 자유라고 말해선 안된다. 삶은 바다의 질량만큼이나 무겁고 엄숙한 것이다. 저 천공과 같은 무게로 내일을 꿈꾸는 바다의 자태는 정말 아름답다.

 

노을이 흘러간 뒤에도 혼자서 출렁이며 삶의 외로움에 몸을 적시는 저 바다가 말이다.

 

자료출처 : 해기 2004년 3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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