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그리고 문예부흥

등록일20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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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그리고 문예부흥

 

흐르네. 미끄러지 듯 흐르네. 거울인지 얼음인지 맑고 깨끗한 바닥 위로 조각배 떠가네. 바람도 불지 않고 파도도 일지 않네. 구름은 저기 멀리 수평선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네. 가만히 손을 모아 허공에 귀를 기울여 보네. 눈을 감은 채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아득한 그 무엇, 침묵 저 편에 있을 그 무엇에 귀를 기울여 보네. 한참을 그러노라면 마침내 들리는 소리 있네. 바람이 숨고르기를 하는 소리. 공기가 움직이는 소리. 물이 움직이는 소리. 우주가 움직이는 소리. 내 안의 조직의 세포가 움직이는 소리. 심심유곡 시내의 물이 작은 돌을 스치며 흐르는 소리. 여름 아침 정원의 꽃밭에서 나비가 날면서 풀잎을 스치던 소리. 가을 오후 인적 드문 산길의 맞은 편 숲에서 꿩 날아가던 소리. 어릴 적 자고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어 갑자기 슬퍼져 울먹거리던 엄마 찾는 소리. 수면인지 유리인지 파란 바닥 위에서 누군가 가볍게 현을 뜯네. 하프 같기도 한 소리. 바이올린 같기도 한 소리. 첼로 같기도 한 소리. 거문고 같기도 소리. 명랑하기도 한 소리. 슬프기도 한 소리. 한없이 쓸쓸한 소리. 그래서 왠지 행복한 소리. 그러다가 어느덧 해가 지면서 들려오는 광활한 우주를 닮은 소리-, 북소리.

바다에 밤은 시작되고 하늘에 별이 빛나면서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 그 옛날 우매한 촌민을 가르치던 현자의 맑은 음성이 있네.

 

이 세상 낮은 곳에 바다가 있네/낮은 곳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모든 하수구 아래 바다가 있네/몸을 낮춰 낮춘 몸이 웅얼웅얼 모여드는/작은 물방울 버리지 못하고/천만 개 굳어진 입술들이/… 제 살을 태우면서/금강석보다 더 단단한 소금 만들어/바람에 말리고 있네/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엎드려/거듭 일어나는 바다를/오늘도 나는/조심스레 지나고 있네.

 

물이 흐르네. 공중에 가볍게 새들이 날아다니네. 아니, 자세히 보니 물고기들이 떠다니네. 문어도 있고 가재도 있네. 열대어도 있고 전기뱀장어도 있네. 그 아래 수면에서는 밍크고래와 바다코끼리가 고개를 내밀고 두리번거리네. 별이 빛나고 검은 바다 위에 달이 뜨면서 들려오는 온갖 관악기의 합주-플룻, 클라리넷, 하모니카, 대금, 단소가 어우러지는 화음의 연속, 우주의 소리. 밤은 깊어가고 이제 그리움도 슬픔도 기쁨도 감동도 모두 별과 달과 저 바다의 물고기의 몫이니 인간은 쉬거라. 인간과 함께 하던 기계들도 쉬거라. 그물도, 집어등도, 레이더도 쉬거라. 언제나 북을 향하던 나침반이여, 너의 고단한 오른팔도 이제는 편안히 쉬거라.

먼 바다에서, 특별히 바람도 파도도 없는 적도무풍대의 바다에서 배를 띄워 놓고 낚싯대를 드리우고 조선조의 시인 윤선도처럼 바다 풍경을 완상하면서 시를 읊고, 흥에 겨우면 장구도 치고 가야금도 울리고 식사는 겨우 반찬 한두 가지에 한 그릇의 밥일지언정 단 하루라도 그렇게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 그럴 제 한 잔의 녹차는 기꺼이 친구가 아니겠는가. 욕망도 미련도 없는 시기도 질투도 없는 무욕의 바다 위에서 물질에서 오는 욕망과 문명에서 오는 오만의 외투를 다 벗어 던지고 저렇게 자연이 나이고 내가 자연인 바다, 그 우주의 정원에서 다만 며칠이라도 머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작년 겨울 K선사 소속 조업선 창진호의 이윤길 선장이 태평양 어느 바다에 조업을 나갔을 적 일이다. 한국해양문학가협회 모임에서 만나 연을 맺은 우리는 언제부턴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편지라고 했는데 물론, 태평양과 내가 있는 대한민국 사이에 우편이 오갈 수 없을 터, 요즘 흔히 하는 이메일을 주고받게 된 것이다. 출국 전 협회 사무실에서 언제 다시 연락을 하겠노라고 하던 말처럼 그는 12월 겨울이 다해 가던 무렵, 나에게 이메일을 보내왔다. 나의 안부를 묻는 인사말과 잘 지내고 있다는 그의 근황을 전하는 말과 함께 그는 최근에 완성한 작품이라면서 해양시 몇 편을 보내왔다. 그런데 나는 그 이메일의 발송지가 태평양이라는 사실을 알고 적이 놀랐다(이 시스템의 통신 이용비는 1회에 약 1만원, 첨부파일의 용량에 따라 비용이 추가된다). 나는 태평양을 건너온 그의 편지에 경이로움을 표하면서 조업이라는 노동의 현장에서 지은 그의 시편을 조심스럽게 읽어나갔다. 그는 그렇게 시를 써 나갔고 이편에서는 하던 업무를 접고 곧 바로 감평을 써서 보내었다. 마치 연애편지를 주고받는 것처럼 답장과 그 다음 시 창작은 곧바로 이어져 주고받고 했는데, 하루는 선장이라는 직무가 꽤 분주할 텐데 문예창작 작업을 할 시간이 되시는가 물었더니 지금은 어장이 형성되지 않아 다들 무료히 쉬고 있고 다만 삭구를 정비한다든지 어구를 살펴보고 있다는 것이다.

표박漂迫이라는 항해용어가 있다. 어선과 조업에 문외한인지라 나의 항해사 시절 체험한 상선의 예를 든다면 육상의 본사 영업부로부터 다음 적재항을 지정받지 못 해 해운경영의 차원에서 선체와 선원은 흘러가는 해류에 몸을 맡겨 두고 가끔씩 선위를 확인하여 해안으로부터 얼마나 간격을 두고 있나, 그래서 적정 이안 거리를 넘게 되면 기관을 써서 안전 수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일과의 전부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본선은 남아메리카 서부 멕시코 연안 60마일 해상에서 무려 한 달하고도 보름을 흘러 다녔는데 갑판부도 기관부도 진작에 정비가 잘 되어 있는 상태여서 다들 무료함을 견디기 위하여 낚시를 하거나 장기 바둑을 두거나 카드놀이에 열중했다. 그 중에서도 오직 한 분 2등기관사는 기타를 치며 소일했는데 연주실력이 수준급이었다. 나는 낮이면 그의 방에서 이 젊은 기타리스트가 자아내는 클래식 기타의 아름다운 음율을 처음으로 접하면서 그가 자아내는 예술에의 열정에 차츰차츰 녹아 들어갔고, 밤이면 밤바다가 장식하는 우주의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면서 시 또는 시 창작에 대한 욕망, 즉 나 홀로 시인이 되어갔다. 장기간 바다 위에서 떠 있으라는 본사의 지시가 예술이 없는 자에게는 결박이겠지만 예술가에게는 득음得音 득관得觀의 기회인 것이었다. 아무도 없이 오직 우주의 고독만이 존재하는 먼 바다에서의 체류는 어떤 이에게는 시인이 되게 하고 음악가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 날 이윤길 씨의 태평양 해상에서의 표박이 그로 하여금 기름진 문예창작의 마음밭에 예술적 향기와 우주적 메시지로 작용했음은 명백하다. 그는 아무도 없는 고립무원의 평원 위에서, 하늘의 별과 달과 무욕의 해면 위에서, 고향을 떠나온 사내들의 상실감과 질박한 노동의 현장을 노래하면서 이 모든 시적 모티프와 심상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와 같은 그의 창작 과정들 속에서 수부들은 또한 고향과 가정을 떠나온 아픔을 삭여 나갔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 또는 예술적 작업은 그것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그 결과물이 척박한 세상을 기름지게 일구고 냉랭한 정서를 따뜻하게 데우고 위로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해양시인 김성식 선장이 타계한 지 5년이 지났다. 그의 바다 삶에 대한 열정과 시의 정신을 기리던 해양인들과 문학인들은 지난 3월, 시인의 문학적 성취를 기념하기 위하여 시전집을 출간하고, 그가 선도한 해양문학을 추동하는 '선장시인 김성식 시전집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한국해양대학교 실습선 한바다호에서 가진 이 행사에서 해양인들과 문학인들은 시인의 시 세계와 바다 삶을 추모하면서 문학적 모티프에서는 귀족의 지위를 누리면서도 정작 삶과 노동의 지평에서는 변방이고 그래서 기피의 대상인 바다를 놓고 시인의 예술적 성취에서 보 듯이 예술을 통하여 바다는 얼마든지 위로가 될 수도 있고 감동이 될 수도 있고 그래서 화려할 수도 있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역사는 돌고 돈다. 바다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뭍을 떠난 자 바다로 갔고, 바다에서 일어선 자 세계를 품었다. 돌이켜보면 역사의 수레바퀴를 따라 온갖 문예사조가 들어서고 스러지곤 했다. 지금 뭍에서는 오늘날의 사조를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한다. 새로 인지된 사조에 대하여 붙여본 이름이었지만 다들 그렇게 부르고 있다. 그러나 바다는 양상이 틀린 것 같다. 바다에 들어서면 인간과 문명과 대자연이 공존하는 탓에 어떤 이는 고전주의로 바다를 바라보고, 어떤 이는 낭만주의로 바다를 지나가며, 어떤 이는 사실주의로 자연주의로 바다를 쓰며, 드물게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바다에 떠돈다. 최근 문학판에 화두로 떠올라 곧잘 논쟁이 되고 있는 '해양문학의 정의'만큼 바다에 관한 글쓰기도 글이 표방하는 사조도 다양하다.

특이한 점은 과거에 비해 선원의 수는 감소했지만 선원이 되려는 희망지수는 감소했지만 문학에 있어서는 그게 아니다. 최근에 해양인들, 특히 현직 해기사들의 문예지 등단 또는 작품 활동을 보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한국해양문학가협회의 선원 출신 문학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작품활동, 문협이나 해양계대학에서 주관하는 해양문학상의 수상 소식, 각종 문예지 등단, 문집발간, 그리고 대표적인 해양잡지인 해기지에서 소개되는 시와 수필에서 등단 해기사들의 글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바다에서, 바야흐로 문예부흥을 꿈꾼다면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주1. 김성식의 '이 세상 가장 높은 곳에 바다가 있네'에서.

 

□ 심호섭, 시인

 

ㅣ자료출처 : 海바라기 2007년 6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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