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풍포(이용득)

등록일202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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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풍포(待風浦)

 

경상북도 울진군 구산항 바닷가에 동쪽 바다를 향해 대풍헌(待風軒)이란 정자가 서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울릉도와 독도를 조사, 관리하러가던 수토사(搜討使)가 머물렀던 장소로 유명했는데 대풍헌은 ‘바람을 기다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당시 돛단배로 울릉도까지 가려면 적당한 바람이 불어야 했다. 예전에 돛단배를 풍선(風船)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바닷바람은 뱃길을 여는 원동력이라 바람이 불지 않으면 한동안 이곳에서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순풍(順風)이 불 때까지 정자에 머물며 수토사를 비롯한 수부들은 자연에 순응하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지금은 매축으로 사라졌지만 부산항에도 이와 이름이 똑 같은 포구가 있었다. 오래 전 영도구 대평동 일대는 낚싯바늘 모양의 큰 사주(沙柱)가 바다를 향해 뻗어 있었다. 그 호안이 대풍포(待風浦)로서 바람이 불 때면 뱃길을 여는 곳으로 유명한 포구였다. 그래서 일까? 이곳을 풍발포(風發浦)로도 불린 것을 보면 그 당시에는 바람이 잘 이는 해역이 좋은 포구로서 입지조건이 되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 부산은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행의 출발지였다. 6척의 통신사선에 300-500명을 싣고 바다를 무사히 건너야 했기에 영가대에서 상서로운 바람을 만나 통신사선의 순항을 비는 해신제(海神祭)를 지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해신제보다 초기에 불렀던 기풍제(祈風祭)란 말이 더 어울렸을지 모른다. 바람이 불지 않거나 역풍이면 돛단배가 제대로 항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풍세가 좋을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게 순리였다.

조선통신사 사행록을 보면, 기다리는 기간이 한두 달은 보통이었다. 1607년 통신부사로 갔던 경섬의 「해사록」에는 약 20일, 1718년 제술관으로 갔던 신유한의 「해유록」에는 한 달 남짓, 1763년 정사로 간 조엄의 「해사일기」에는 두 달간 머물렀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삼사를 비롯한 통신사 일행이 오랫동안 부산에 머물다 보니 그 지루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해운대나 몰운대 등 명소를 찾아 유람하거나 인근 산을 오르며 풍류를 즐기기도 했지만, 조엄은 빈일헌(賓日軒)에서 오래 머물다 보니 답답해서 후풍사(候風詞)란 시를 지어 종사관을 비롯한 사행들과 창수(唱酬)하며 즐겼다. 그가 지은 칠언절구에는 바람을 기다리는 애절한 심사가 묻어있다.

 

欲渡滄溟風不至(욕도창명풍부지) 한바다를 건너자니 종일 바람이 불지 않아

朝朝天際占雲頭(조조천제점운두) 아침마다 하늘가의 구름머리 점쳐보네

誰令海若淸前道(유령해약청전도) 어느 뉘 해신시켜 앞길을 밝혀주어

萬里長波穩六舟(만리장파온육주) 만리라 창파에 여섯 배가 편안하리

해신제를 지낸 후 통신사선은 바람을 맞으려고 한 발짝 외항으로 다가선다. 지금의 감만동 해변이 출발 선상이었다. 반면, 대풍포는 주로 경상우수영 쪽인 거제, 통영 등 남해안 뱃길로 나서기 위해 순풍을 기다리는 대표적인 포구였다. 또한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사쓰마번(薩摩藩)수군의 주둔지인 사쓰마보리(薩摩堀り)로 불리었으며, 왜란 이후인 1601년 일본이 첫 화해의 손길을 내밀 때는 절영도왜관이 들어선 역사적인 공간이었다.

그 뿐이 아니다. 17세기 중엽이후 부산 용두산 일대 약 10만평에는 2미터 높이의 돌담을 치고 대마도에서 건너온 건장한 사내 400~ 500명을 가두어 놓은 남자들의 마을, 초량왜관이 있었다. 200년 가깝게 조선과 일본 간 교역 및 외교업무를 하는 일본공관으로서, 이곳 우두머리가 쓴 관수일기(館守日記)에는 영도 대풍포는 그네들의 해상감시구역이었다.

무진년(1868) 정월 초이틀 날, “섬에 떠 있던 대형 선박 2척이 오늘 새벽 순서대로 잘 출발했다는 소식이 이네노 아야로부터 도착하였다.”는 내용이다. 해상순찰선을 타고 대풍포에서 밤새 감시를 한 시마방(島番)의 근무상황을 보고 받았다는 대목인데, 해안과 섬을 돌아보는 도오미(遠見)업무는 해양순찰과 야간순찰로 나누어져 있었다. 주 감시대상은 입출항하는 무역선 비선(飛船:조선중기이후 대마도와 부산포간 무역과 연락을 위해 오간 돛단배)과 담을 넘어 나오는 난출자였다. 왜관 주변에는 항시 지역민과 일본인 사이에는 밀무역이나 성매매 등 숱한 사건사고가 발생할 여지가 많았다.

특히, 대풍포와 같이 현지인과의 접촉이 많은 곳에서는 선박을 이용한 잠상(潛商:밀수꾼)활동도 경계의 대상이었다. 이처럼 대풍포는 초기엔 외부세력이 접근한 외딴 포구이기도 했지만, 조선 일본 가릴 것 없이 가끔 뱃길을 트기 위해 출항 전진기지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대풍이란 지명이 바다건너 대마도에서도 불러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809년(순조 12) 도해역관(渡海譯官) 현의순 등이 아뢴 대마도의 사정을 보고한 별단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대마도 북단에는 악포(鰐浦)와 좌수포(佐須浦)가 있는데 저들과 우리의 선박이 모두 여기를 통하여 왕래하며, 이를 대풍소(待風所)라 합니다. 대풍소에서 북으로 부산포까지 4백 80리이고, 남으로 대마도 부중까지가 3백 20리입니다.” 부산에서 건너간 통신사선이 제일 먼저 도착하거나 대마도의 무역선이 입출항하는 포구가 이곳이었다. 이곳을 일본에서는 관소(關所), 개번소(改番所) 등으로 불렀기 때문에 대풍소란 명칭을 붙인 것 같다. 아니 조선 부산에 이미 대풍포란 지명이 있기에 혼돈을 피하기 위해 이렇게 불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러한 지명을 통해 당시 순풍과 함께 바다를 건너려는 뱃사람들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17세기 초기부터 시작된 진정한 범선의 시대는 드디어 1780년대 증기선의 대두로 인해 서서히 꼬리를 내리게 된다. 그동안 범선과 생사고략을 함께해온 선원들은 배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기계에 의해 성능이 좌우되며 확실하게 운항을 보장받는 새로운 증시선의 시대는 달랐다. 서구에서 시작된 검은 연기의 증기선의 위력은 점차 동양으로 다가서며 억압과 굴욕의 물결로 다가섰다. 드디어 이 땅에도 그 파장이 미치면서 개항이 이루어졌고, 1903년 이후 발동선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어민이 대풍포로 대거 몰려오면서 제염소가 들어서는 등 점차 어항으로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엔 항만 배후도시로 개발되면서 매축이 이루어지고 대거 조선소와 기관제조 및 수리업체가 들어섰다. 더구나 부산 근해에서는 대구와 청어, 특히 영도인근 해역에선 멸치, 오징어, 갈치가 많이 잡혀 날로 대풍포는 어선의 기항지로 활기가 넘쳤다.

1960년대 말 점차 선박 재질이 목선에서 철‧강선으로 바뀌면서 영도 수리조선소에서는 선체 녹을 제거하는 “깡깡”대는 망치소리가 포구를 가득 메웠다.‘깡깡이마을’의 유래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오늘날‘깡깡이예술마을’을 가꾸는 이곳에 가서 ‘대풍포’란 이름을 들먹이면 어떻게 들릴까? 위그선시대에 맞지 않은 정서라 낯설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옛날 출항을 위해 이곳에서 순풍을 기다리는 뱃사람들의 애절한 마음마저 어디 잊어서야 되겠는가.

 

□ 이용득, 부산세관박물관장. 주요 저서 '부산항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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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해양과 문학> 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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