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로스 삶과 노래와 낭만(이용득)

등록일202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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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로스 삶과 노래와 낭만

 

1. 마도로스는 뭍에도 있었다

지난 2010년 칠레 산호세광산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된 광부 33명에 대한 생환드라마는 모처럼 전 세계인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광산 붕괴로 지하 622m에 갇힌 광부들은 69일 동안 최악의 상황 속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겨야만 했다. 이처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광산촌에서 일하는 광부를 한때 “산(山)의 마도로스”라고 불렀다.

지하 깊숙이 막장이란 어려운 환경 속에서 폐광작업을 하는 것은 마치 성난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생사의 운명을 걸고 임무를 다하는 마도로스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어디 그 뿐이랴. 철로를 따라 사람과 화물을 실어 나르는 기관사를 일컬어 ‘지상의 마도로스’라 부르기도 하고, 이곳저곳 공사현장을 떠돌며 건설업체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자칭 ‘마도로스 생활’이라고들 말한다. 육지에서 어렵게 일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마도로스에 빗대어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이 표출된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흔히 선원을 일컬을 때 영어의 ‘Seaman’보다 네덜란드어인 ‘마도로스(Matroos)’에 더욱 익숙하고 친밀감을 느낀다. 마도로스는 일본에서 건너온 대표적인 외래어의 하나로서 우리는 흔히 외항선원을 가리켜 이렇게 불러왔다. 1989년 52세로 타계한 일본 엔카(演歌)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의 ‘ひばりのマドロスさん’은 마도로스를 소재로 한 대표적인 곡이다. 이 노래가 1954년에 발표돼 크게 히트하여 한반도에까지 널리 알려지므로써 마도로스란 말에 더욱 친숙해졌다고 보아진다.

네덜란드하면 우리는 쉽게 튤립과 풍차를 떠올리고, 국토의 4/1이 해수면보다 낮은 나라로 기억된다. 네덜란드가 일찍부터 해양을 개척했던 것도 이러한 악조건 아래서 생존전략의 한 방법으로 택한 일인지 모른다. 17세기만 해도 네덜란드 선단은 5대양을 지배하고 있었다. 더구나 네덜란드는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出島)에 상관(商館)을 두고 극동지역에 이미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마도로스라는 말이 이곳에서 널리 쓰여 지고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1653년 8월 하멜일행이 승선한 동인도회사 소속의 무역선 스페르베르(Sperwer)호가 제주도에 조난을 당해 왔을 때만해도 이들은 네덜란드의 마도로스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해금정책(海禁政策)아래서 ‘임의로 바다에 나가면 역적, 바다에서 낯선 배가 들어오면 해적’으로 보던 바다에 대한 통금시대였다. 우리에겐 마도로스는 해적이었다. 그렇지만 섬나라 일본은 달랐다. 일찍이 일본은 쇄국의 분위기 속에서도 나름대로 서구사회와 통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외교류의 경험은 무력에 의한 미국과도 쉽게 개항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우리의 개항역사는 강압에 의한 무력의 함포소리가 더욱 커 천지를 진동했다. 그야말로 부산항은 화약 냄새 머금은 공포의 현장에서 서서히 침략과 수탈의 관문으로 변질되었다. 처음부터 일본의 독점항로가 개설되면서 일본인 조차지를 중심으로 하루가 다르게 왜색도시로 바뀌어 갔다. 숱한 증기선이 드나들었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금테 두른 캡틴 모자에 파이프를 입에 문 낭만적인 마도로스를 쉽게 접근하거나 이해할 수도 없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에 마도로스라는 이름이 다가선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말쯤, 우리가요에도 비로소 마도로스란 명칭이 등장하면서 이러한 직업에 대한 동경과 함께 서서히 수평선 너머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야망을 품게 되었다.

 

 

2. 아메리칸 마도로스의 등장

이 땅에 화물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서구풍의 마도로스가 본격적으로 찾아든 것은 6.25전쟁이후였다.

 

“우뚝 선 영도다리 갈매기들 놀이터/ 물에 뜬 네온불도 부산항구다/ 메리켄부두가에 내일 다시 만나주세요/ 파자마 입은 아가씨들의 인사가 좋다”

 

1956년 가수 방운아가 부른 ‘부산행진곡’의 2절 노랫말이다. 6.25전쟁이후 침울한 부산항의 분위기를 경쾌한 리듬에 담아 아세아의 현관임을 널리 알린 가요로 유명하다. 이 노래 속에서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외래어가 등장하면서 변화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특히 ‘메리켄부두’란 생소한 부두 명칭이 보인다. 과연 이 부두는 부산항의 어떤 부두를 가리키는 것일까?

일본을 여행하다보면 ‘메리켄(メリケン)’이라는 용어를 쉽게 접할 수 있다. 특히 고베항이나 요코하마항에 가면 ‘메리켄파크’ 또는 ‘메리켄부두’란 명칭이 그대로 불러지고 있다. 메리켄(Merican)이란 말은 아메리카(America)에서 비롯되었다. American을 발음할 때 me에 강세가 있다 보니까 메리켄으로 들렸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중·일 3국의 음차표기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나는데 모두가 3음절로 된 ‘미리견(중국:彌利堅·美利堅, 일본:米利堅)’ 또는 ‘며리계(한국:旀里界)’로 적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19세기 중엽이후 서세동점의 영향으로 메리켄과 같은 외래어를 지명화하거나 사물에 명칭을 부여한 나라가 일본이었다. 그러니까 고베항이 개항이 되고 제일 먼저 미국영사관이 부두인근에 자리를 잡게 되자 이 부두를 일컬어 메리켄부두라 했고, 이후 미국과의 교역이 늘어나면서 외국무역선이 드나드는 부두를 그렇게 불렀다. 더 나아가 일본인들은 미국 화물선이 싣고 들어온 정제된 밀가루를 가리켜 메리켄분(メリケン粉)이라 했다. 마치 우리가 개항을 맞아 서구에서 들어온 박래품 앞에 양(洋)자를 붙여가면서 양복·양화점으로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이를 두고 볼 때 일본에서의 메리켄부두는 서양문물이 들어오는 통로이면서 그 항만이 성장 발전해 온 중심축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수립 후 가장 많은 외국선이 드나들었던 대표적인 부두가 부산항 제1·2부두였다. 특히 전후 구호원조물자인 밀가루와 옥수수가루 등을 실은 미국화물선이 자주 접안되어 이곳에서 하역이 이루어졌다. 그러다보니 심심찮게 부두 주변에는 햄버그 냄새나는 미국선원 즉 아메리칸 마도로스들의 발길이 잦아졌고, 이러한 정경을 노래 속에 담아 부른 것이 1961년도에 나온 고봉산의 ‘아메리카 마도로스’였다.

 

“무역선 오고가는 부산항구 제2부두/ 죄많은 마도로스 이별이 야속드라”

 

노랫말 첫 소절부터 부산항 제2부두를 지칭하면서 ‘메리켄부두’로서의 의미를 담았다.

 

3. 마도로스 노래 어떤 게 있나?

아메리칸 마도로스의 등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바다에 대한 낭만과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특히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해운산업은 국가 기간산업의 하나가 되어 선진 해운국으로 발돋움 할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무렵 해외 송출선원까지 인기가 있어 그야말로 선원 공급이 딸리던 판국이었다.

당시 해양대학교를 갓 졸업한 3등 항해사의 수입이 5급 공무원 봉급의 5~6배 쯤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수입원이 좋은 직업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이러한 시대적 정서는 바로 마도로스 노래로 표출되어 1970년대 말까지 100여곡이 넘게 만들어졌고, 마도로스 풍의 노래하나 갖고 있지 않으면 가수 측에 끼이지 못했다. 당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가장 잘 탄 가수가 백야성이었다. 미성(美聲)에 미남(美男)인 그는 무대에 설 때면 새하얀 마도로스 복장으로 노래를 불러 한동안 팬들을 사로잡았다. 마도로스 노래 또한 가장 많이 불렀기 때문에 그를 두고 ‘마도로스의 황제’ 또는 ‘마도로스 가수의 대명사’로 통했다. …………………(하략)…………………

 

□ 이용득, 부산세관박물관장. 저서'부산항 이야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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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해양과 문학> 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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