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과 문화

등록일2020-07-01

조회수59

 

해양과 문화

조 정 제

 

지구표면의 70% 남짓이 바다이다. 인공위성에서 지구를 보면 수구(水球)로 보인다고 한다. 그러니 바다를 지배하는 나라는 지구, 아니 수구의 70%를 지배하는 셈이다. 지구의 역사를 볼때 바다를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하여 왔다.

바다지배의 역사는 그리스, 이태리/베네치아, 스페인/포르투칼, 영국, 미국 등으로 이어져 왔다. 이 중에도 대표적인 해양국가는 나라가 작으면서도 해양강국으로 부상했던 그리스, 베네치아, 영국을 들 수 있다. 그리스는 산악이 많고 토지가 비옥하지 못해 역외무역으로 생존․번영하였다. 무역은 선박과 조선을 필요로 하였고 해상무역의 안전을 위해 해군력의 강화가 필수적이었다.

해양력(Sea Power)의 구성요소는 가장 좁게로는 해군력을 지칭하나, 현대에는 이를 넓게 보아, 무역량, 해운력, 조선능력을 추가하여 4대 요소로 구성된다. 그리스, 베네치아, 영국 등은 이 4대 요소를 잘 갖추고 있었다. 해양력은 이들 보이는 ‘하드웨어’류의 구성요소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소프트웨어’류의 간과하기 쉬운 해양문화이다. 해양력의 4대 요소를 갖춘 나라는 해양문화도 고루 발전하여 왔다. 양자의 상관도가 높은 것이다. 해양력의 4대 요소를 갖춘 나라는 자연 바다와 연관된 경제․사회활동이 많다보니 해양문화가 뒤따라 융성할 수도 있었겠고 또한 반대로 해양문화의 ‘소프트웨어’ 여건이 조성되면서 그 ‘하드웨어’의 성숙을 선도하고 양자가 서로 상승작용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해양문화의 성숙 없이는 반짝 해양강국이 될 수는 있어도 500년~1000년 걸치는 장기간 번영할 수 없는 것도 분명하다. 해양강국은 지도자 한 사람의 결정에 의해 무역과 해군력을 강화하면 일시에 이룩될 수 있는 것이지만 단기에 포말처럼 사라지기 쉽다. 해상왕 장보고는 30년내외 반짝 솟구쳤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만 것은 해양문화의 동반성숙을 통하여 그 시대에 진취성 있는 해양개척의 국민기질을 북돋우고 특정인에 한정되지 않는, 범국민적인 시대사조와 생활양식으로 보편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양문화는 해양력을 따라 그리스, 영국, 미국으로 이동된다. 해양문학을 보면 그리스의 저 유명한 《일리아드》와 《오딧세이》, 영국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다니엘 데포의 《로빈슨 크루소》, 조나던 스위프트의 《걸리버여행기》, 미국의 허먼 멜빌의 《모비딕》,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등 해양력을 따라 이동되고 있다.

해양문화는 비단 해양문학 뿐 아니라 친수공간(Water front)과 해양레포츠의 발전으로 이어져서 바다와 생활을 친숙하게 하고 인간생활의 일부로 보편화되게 한다. 그 유명한 지중해 연안의 친수공간과 해변도시들은 지중해시대에 그리스인들이 드나들면서 역외식민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지역이 많다. 지금은 현대화된 도시지만, 그 역사적인 족적이 잘 보전되어 있어서 지금도 그대로 느낄 수 있고, 거기에 수백 척의 요트가 정박할 수 있는 관광레포츠의 휴양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그리스인의 족적이 많이 남아 있는 항구도시 가운데, 마르세유의 비유항과 생뜨로페를 예를 들어보자. 비유항은 레지돈(Rasidon)이 이 곳에 처음 도착한 기원전 약 600년대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비유항은 요트항구로 변화되었고 지중해 항해의 좋은 거점이 되고 있다. 이 항은 아침이면 새벽에 어획한 생선을 가장 신선하게 팔고 살 수 있는 장소로서 “사람들의 주방”으로 불리운다. 비유항 주변은 상가와 아파트, 그리고 넓은 가로와 호텔로 조화롭게 둘러싸여 있고, 1층에 위치한 카페와 수산식당들은 마르세유 주민 뿐아니라 많은 관광객에게 멋진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도심지와 가까운 지역은 오페라하우스와 쇼핑센타가 입지하여 생활의 활력소가 넘친다.

생뜨로페는 그리스와 카르타고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고, 8세기에는 사라센의 지배를 받았던 불운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이 지배의 역사를 다양하고 독특한 매력으로 연출하고 있다. 그래서 세계 각국의 저명한 예술가, 지식인 등 다양한 이방인들이 이곳에 모이게 하고 다양한 문화의 도시로 발전하여 왔다. 미로처럼 꾸며진 마리나 요트계류장에는 수백 척의 요트가 정박되어 있고, 활기있는 쇼핑가와 노점상의 파사드, 화려한 네온사인이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선사시대, 통일신라의 장보고시대는 물론이고 고려왕조까지만 해도 해양민족의 속성을 다분히 지니고 있었으나, 그 이후 점차 중국중심의 대륙문화에 흡입되어가고 말았다.

선사시대의 우리 민족의 족적으로 남아 있는 울주군 바닷가의 반구대 암각화에는 지금부터 약 6,000년 전에 우리 선사인들이 새겨놓은 191종의 그림이 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반구대 암각화에는 사람을 빼곡하게 실은 배, 작살과 그물망, 작살맞은 고래, 어미고래가 새끼고래를 등에 태우고 다른 바다동물들과 무리져 이동하는 광경 등, 바다와 친숙한 생활상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가야시대에도 해외무역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해상왕 장보고는 흔히 그 개인의 위대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그 시대에 장보고가 30년 내외의 짧은 기간에 동북아의 바다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의 능력에 더하여 그 시대 우리의 해양력이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조선기술, 해운능력, 바다 치안능력 등이 월등하였고 우리의 무역상이 상당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시대에 우리는 이미 그리스처럼 근대적 의미의 해양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해양력은 고려 태조 왕건으로 이어졌다. 왕건은 그 증조부가 장보고 해상왕을 이은 동북아 해상세력의 후예였고 그 자신이 궁예의 해군제독이었다. 후삼국시대에 궁예와 견훤이 결판을 벌일 때에 왕건이 이끄는 해군력은 5차에 걸친 해전을 통하여 궁예 승리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왕건이 창건한 고려왕조는 결국 해양력의 뒷받침 속에 이뤄진 동북아 최초의 해상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일방 농본세력의 대륙문화 위세에 눌리고 왜구의 침노에 위축되면서 바다에서 점차 멀어져가고 말았다. 그래서 이조에는 심지어 “섬을 비우고 바다를 멀리하는 정책”(空島政策)으로까지 발전되어 영영 바다를 잊어버리게 되었다. 이 바다를 멀리하는 정책은 그리스인들이 선도하고 유럽에 보편화된 친수공간과 해변도시의 발전을 근원적으로 봉쇄하고 해양문화의 싹을 짓밟아 버리고 만 것이다.

이 정책은 남북의 대치상황 속에서 바닷가에는 아직도 철책이 남아 있어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는 해양력의 구성요소 가운데 무역량(세계 10위), 조선능력(세계 1위), 해운력(세계 7위)은 세계 10위권내에 들어 있으나, 해군력은 연안해군에 그치고 해양문화는 공도정책의 굴레 속에서 아직도 완전히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항만인 부산에 가보자. 지중해변의 친수공간과 비교해볼 때에 우리는 낭만이 없고 삭막하기만 하다. 젊은 연인이 바닷가에 거닐 만한 곳이 없다. 인천은 그나마 낫다. 해양수산부와 인천시가 공동으로 연안여객부두와 연안부두를 묶어 우리나라 최초로 계획적인 친수공간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해양문화는 이제 새 전기를 맞고 있다. 국민은 여가 장르를 해양레포츠 방향으로 돌리고 있고 우리의 젊은이들이 아시안게임의 요트경기에서 우승할 정도로 바다와 가까워지고 있다. 해양문학도 신진문학도에 의해서 개척의 대상이 되고 있고 유망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옛날처럼 바닷가 정자에 앉아 바다를 바라다보면서 지은 서정시 수준이 아니라, 바다에 뛰어들어 바다와 함께 하는 해양도전과 해양체험의 문학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어 희망적이다.

차제에 이 지면을 통하여 3만여 해기선원과 가족여러분께 그간 기여한 해운발전에 찬사를 보내면서, 이제 해기사 여러분은 더 나아가 해양문화의 창달에 앞장서서 국민의 해양진출기상을 진작하고 해양력을 두루 갖추게 함으로써 우리나라가 해양력에 기초한 해양강국이 되어 세계 지배사의 한 장을 차지하는 나라로 발돋움하는 데 일조하기를 기대해본다.

 

◇ 자료출처 : 해기 2000년 8월호

 

g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