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문화유산을 찾아서9(황을문)

등록일202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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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유산을 찾아서 9

 

발해 1300

 

Ⅰ.

 

1998년 어느 봄날 방과 후 저녁무렵에 한국해양대학교 해사대학관 1층 로비에서 “발해탐사대 임현규대원 추모” 행사가 아마추어 무선사 동아리 HAM 주최로 거행되고 있었다. 이후로도 매년 1학기 봄날이면 캠퍼스내 점점 더 넓은 곳에서 임현규 대원이 소속했던 HAM 동아리와 해운경영학과 학생들은 물론 여타학과 학생들까지도 참여하곤 했던 추모식이 참여자의 폭을 넓혀가는 추세였다.
 탐사대원들의 숭고한 정신에 이끌려 매년 추모식에 참석했던 덕분에 행사 주체측으로 부터 얻은 관련정보들을 젊고, 장래가 촉망된다고 생각되는 한 소설가에게 넘겨주며 작품으로 구현하기를 권유하고 동의를 받아냈다. 단순히 행사로만 끝낼 일이 아니라 오늘과 내일을 살아갈 한민족 모두가 탐사대의 숭고한 정신을 공유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작가가 얼마 후 갑자기 요절하는 통에 2007년 해양문학강좌의 교재로 개발한 <海洋文學의 길> 72~73 쪽에 일단 사실만이라도 남겨 수강생과 작가들의 관심을 유도하기로 작정했다.

 

1997년 12월 31일, 장철수(탐사대장) 이덕영(선장), 이용호(대원,사진) 임현규(대원, 통신: 한국해양대학교 해운경영 90학번) 등 4인의 발해탐사대가 “발해1300호”로 명명한 뗏목에 올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 항에서 출항한다. 탐사목적은 해양주권 확보와 해양국가로의 발전을 주창主唱하기 위해서였다.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1,300년 전 대조영이 건국했던 발해의 옛 발해인들이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를 아우르고, 동해를 통해 일본과 교역했던 뛰어난해양국가 발해의 역사를 되살리는 일이 선행요건이었다. 또한 항해에 성공함으로서 발해인들이 일본을 왕래할 때, 울릉도와 독도를 기착지로 삼았다는 사실을 입증하여 독도가 고대부터 우리 땅이었음을 확인시키고자 했다. 출항 전 장철수 대장은 “발해 대조영이 나의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나기 바란다. 민족의 웅대한 기상이 서려있는 1천 3백년 전 뱃길을 타고 내려가면서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치고 싶다.”는 말과 “이 바다를 통하여 한반도가 화해의 통일을 하고 (…) 일본은 참역사의 깨우침과 과거의 교류를 거울삼아 싸움과 질시의 시대를 마감했으면 좋겠다. 이 바다 항해를 통하여 청년들에게는 탐험정신을, 국민들에게는 용기와 삶의 새로운 활력을 가지길 바란다. 지금은 해양시대라 한다 (…) 국민들이 강인한 정신과 자존심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이 국난극복의 제일선이다. 이런 점에서 과거 실학파가 주장했던 발해사를 복원하고 부흥운동을 속개하는 것이 시급하다.”란 말을 대원들에게 심었다. 유능한 뱃사람들도 꺼리는 겨울 동해바다를 그들은 조국과 민족의 자존심을 위한 굳은 신념하나로 성난 풍파와 눈보라, 소용돌이치듯 역류하는 해류와 추위 등 최악의 기상조건하에서도 목숨을 건 뗏목항해를 계속했다. 그러나 허기와 탈진상태에서 일본 ‘오키’ 제도까지 해류에 밀려가는 12시간동안 사나운 풍랑과 사투를 벌이다가 1월24일 새벽 1시경 ‘도고’ 섬 해안절벽에서 부서진 뗏목과 함께 거친 파도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 후 해마다 임현규 대원이 몸담았던 한국해양대학교 HAM 동아리 주최로 4인의 탐사대원을 추모하지만, 점점 세인의 뇌리에서 멀어져가는 세태다. 비록 그들은 사라졌으나, 우리들의 마음속에 생존해 있는 숭고한 정신만은 ‘해양전기傳記문학’ 속에 민족혼으로 승화시켜야할 과제를 해양문학계海洋文學界에 남겨 놓았다.

 

-이들의 뒤를 이은 제2차 발해탐사대는 희생자 없이 실패로 끝나고, 앞으로 제3차를 계획한다는 보도는 있었으나 근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무소식이다.- 게다가 나 또한,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누군가가 해양문학의 형태를 빌어 승화시키려니 하는 막연한 기대만을 ‘해양문학계에 과제’ 라고 마치 화두話頭 처럼 던져 놓고 있었다.
위의 글을 게재한 거의 10년후인 2016년 여름, 옛 친우들과 울릉도 탐방길에 “울릉도, 독도해양과학기지” 선임기술원 김윤배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해양공학도 이면서 문화면에도 밝다는 정보를 대학제자들이 미리 일러주었는데, 과연 그랬다.
현재 ‘울릉도문화유산지킴이회’ 회장이기도 한 그에게서 해양과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은 물론 울릉도 현포리 고분군 탐사 중, 뜻밖에 발해탐사대에 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었다. -사실 그동안 4인의 탐사대 중 대학제자 임현규 대원외에 다른 대원에겐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었다. 장철수 대장도 한국외국어대 러시아학과를 졸업 후 1996년 한국해양대 해사법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한 사실을 통영인 김보한 시인 통해 알게 됨. - 이덕영 선장의 석포리 생가를 안내해 주고 탐사대의 추모 동상이 통영에 있다는 사실과 함께 현장을 안내해줄 추모회장까지 알려주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양지숙이 쓰고, 엄택수가 그린 󰡔우리의 항해는 끝나지 않았다󰡕는 제1차 발해탐사대 일대기가 발간된 사실도 이때 알게 되었다.

 


 

울릉도에서 돌아와 동양의 나폴리로,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같은 시인과 후에 박경리 등 다수의 걸출한 문인들을 배출해 문향文鄕으로도 잘 알려진 통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멋진 뒷 풀이가 예약된 문학인회합이 아니라 추모동상에 참배하러 가는 길이기 때문이리라. 조영욱 발해탐사대 전임 추모회장이 일러준 대로 통영시 산양읍 순환도로를 따라 얼마간 달려가다 보니, 미륵산기슭 통영수산과학관 뒤쪽 ‘es리조트’ 입구 왼쪽 계단 위에 장철수 대장 등 4인의 탐사대가 한려수도의 수려한 전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동상이 연출하는 현장감과 영정 사진에 넘치는 생동감은 마치 바다에서 사라진 이들이 뭍에 다시 올라온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들게 했다. 통영시에서 어떤 연유로 여기를 선택한지는 모르겠으나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동상들이 간선도로변이나 왕래가 빈번환 곳이란 점을 감안할 때, 위치 선정은 잘 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동상참배 전에 안내표석이 발길을 잡는다.

 

(…)「발해 1300호」는 발해 건국 1,300주년을 기념하여 발해해상항로를 복원한다는 목적으로 1997년 12월 31일 옛 발해의 땅 블라디보스톡에서 출항하여 24일간 항해 끝에 일본에 도달함으로써 발해해상항로를 복원했지만, 접안 직전 기상악화로 안타깝게도 조난당하여 대원 모두 순직했던 뗏목의 이름이다.
 
장철수대장과 대원들의 발해해상항로 탐사는 바다의 땅 통영인들의 무한한 자긍심이 되었다. 그들의 도전과 창조정신은 청소년들의 꿈이 되었으며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은 대한민국의 정신이 되었다.

 

이에 통영시에서는 청소년들에게 호연지기와 도전정신을 배울 수 있는 학습의 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2010년 9월 여기에 그들의 뜻을 기리는 기념탑을 세웠다.

 

기념탑 입구에 세워진 이 표석標石에서 칠이 바랜 첫 부분은 발해의 개국 의의가 기술되어 있고, 일부분은 판독하기 어려워 제외한 나머지만 인용한 표석문의 핵심은 바로 대한민국의 정신에 있다. 여기서 대한민국의 정신이라 함은 장철수 대장은 여기 통영, 임덕영 선장은 울릉도, 이용호 대원은 경남 마산, 임현규 대원은 전남 구례이듯이 지역의 다양성만이 아니라, 어떤 고난도 이겨낸 우리 한민족의 끈질긴 도전과 개척정신을 치칭할 것이다. 또한 달리 추모탑의 이면에 새겨진 장철수 대장의 마지막 항해일지에 절로 숙연해진다.

 

그들의 항해는 끝나지 않았다
16:00
나라에 짐이 된다는 것이 부담스럽다.
오늘 한.일어업협정이 파기되었다는데,
그들의 속셈이 드러난다고 보아진다.
무엇보다도 내가 의연해지고 싶다.
미래와 현재의 공존과 조화,
바다를 통한 인류의 평화 모색,
청년에게 꿈과 지혜를 주고싶다.
탐험정신
발해정신
아직도 아무 소식이 없다.
20:25
MAY DAY를 외친후
1998년 1월 23일 오후

 

일본해상보안청의 구조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오른손을 다쳐 왼손으로 쓴 마지막 장

 

2005년에 양지숙 작가가 이들의 일대기 <우리의 항해는 끝나지 않았다.>를 발간하여 이미 제1차 발해탐사대의 의거가 세간에 알려져 있지만, 드디어 해양문학계에서 어느 소설가가 제1차 발해탐사대를 소재로 한 소설 -아마도 전기소설- 의 초고를 완성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아무쪼록 누구든 간에 그 작가의 필봉筆鋒에서 이들의 숭고한 정신이 다시 옥동자로 태어나길 기대한다.

 

후기

 

1997년 12월 31일에 출항한 ‘발해 1300호’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뗏목 밧줄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사진이 가슴을 섬뜩하게 한다. 한국해양대에서 추모 몇 주년째인지 행사 때, 탐사대의 지원팀장이었다는(이소희)에게 왜 온화한 계절은 두고 엄동설한 한 겨울을 택했는지 나무라듯이 물은 적 있다. 동해바다는 서, 남해보다 거칠고 겨울철에는 더욱 그렇다. ‘타이타닉호’의 희생자도 저 체온증이 주 원인이었고, 외국의 경우 뗏목 <콘티키>도 5월~8월까지 기후가 온화할 때, 남태평양을 항해해 성공한 사례에 비추어 안타까움의 토로였다. 바람과 해류가 일본 쪽으로 항해하기에 적합해서라고 했다. 옛 발해인들이 10월부터 3월까지 주로 겨울철에 이 항로를 택했다는 사실史實 이 있으므로 그들은 고증考證에 충실하려 한 것이다 -원래는 10월경에 출항할 예정이었으나 탐사비(뗏목건조비)부족으로 미루어지고, 이때 장철수 대장이 자신의 집(소형아파트)을 팔아 탐사비로 충당했다고 한다.- 탐사대는 비록 접안에는 실패해도 항해에는 성공했다. 그들은 발해해상항로의 복원을 통해 독도가 우리땅임을 입증하는 일도 중요한 목적이었으므로 국토수호를 위한 해양특공대역활도 한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이룬 생생히 살아있는 해양도전과 개척의 문화이기도 하다. 근자에 일본은 더욱 더 독도는 제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일본해상보안청에 발해탐사대의 조난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므로 앞으로도 끝없이 제기 될 것으로 예견되는 영토분쟁에 안용복장군과 더불어 탐사대의 의거도 중요한 사료로 제시했으면 한다. 또한 탐사대장의 고향에 탐사대의 동상과 추모탑이 건립되어 있으므로 이젠 지방자치의 영역을 떠나 국토지킴이에 대한 국가의 서훈敍勳으로 그들의 숭고한 의거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

 

□ 황을문, 한국해양대학교 명예교수. 저서 '동상과 우상'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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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해양과 문학> 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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