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에 가면(김민혜)

등록일202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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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가면

 

어디론가 떠나야 했고 나를 온전히 비워내고 싶었다. 집으로부터, 현실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하루하루가 허방을 짚는 듯한 날들이었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는 내달렸다. 광주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두 시간을 달렸을 때 그 섬이 보였다. 신안군 증도라고 했다. 태고의 섬, 인간이 태초에 닿은 섬이 있다면 이곳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인근 바닷가로 나갔다. 우전해수욕장이라고 했다. 안내판을 보니 우전은 새가 날아오른 곳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모래가 울음소리를 내듯 서걱서걱 밟혔다. 은빛 모래밭위로 갈대로 엮은 갈색지붕의 파라솔과 선탠 체어들이 등불처럼, 깃털처럼 떠 있었다. 나는 바다 앞에 섰다. 푸른 바다는 빛과 사물을 삼키며 고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남태평양의 어느 한적한 섬에 온 듯한 착각이 일며 현실감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먼 곳으로 그리움을 밀어내니 또 다른 그리움이 차올랐다. 바다는 밀려가고 쓸려오며 세월을 만들어내었다. 많은 것들을 잊은 듯 했지만 온전히 잊은 게 아니었다. 그 바다는 그리움의 원형이었다.

점점 시야가 흐려진다. 시간이 물러가고 풍경이 뭉개진다. 선명해지는 건 나 자신이고 내 그림자다. 어두운 바다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바람을 껴안아본다. 내 그림자는 새처럼 날아간다. 바닷바람에 내 그림자가 점점 눅눅해지고 절여진다. 고독한 밤에 고독한 섬으로 고독한 내가 스며든다. 온 몸이 축축해질 무렵, 나는 숙소로 돌아와 몸을 뉘었다.

내 욕구에 충실하지 못한 걸 알았을 때는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였다. 세상의 시선, 주변의 필요, 상대의 욕구에 ‘나’는 알맞게 버무려지고 용해되고 마모되었다. 글을 쓰고 싶었다. 내 욕망을 불러내면서 세상의 가치에 부응하는 일이었다. 더 이상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내 안에 침잠하고 싶었다. 학창시절의 아련한 꿈도 떠올랐다. 소설을 읽고 났을 때의 환희는 현실의 벽을 뛰어넘는 힘이었다. ‘언젠가 작가가 되리라.’ 숨어 있던 그 꿈은 사십년의 발효기간을 거쳐 비로소 세상에 나왔다.

다음 날, 우전해수욕장을 벗어나니 짱둥어 다리가 나온다. 물살이 물러나고 갯벌이 펼쳐진다. 나는 난간에 기대어 다리 아래를 내려다본다. 짱둥어, 칠게, 농게가 바들거린다. 짱둥어들이 진흙 위를 기어 다니며 몸을 뒤집고 농탕거리는 모습이 귀엽다. 진흙땅 싸움은 인간들의 추한 아귀다툼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진흙위에서 뒹굴며 싸우는 짱뚱어나 게들을 보고 진흙땅 싸움이라고 하지 않는다. 인간이 진흙 속으로 들어가 분탕질을 할 때는 머드 팩을 하기 위해서다. 진흙에서는 절대 진흙땅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아이러니다. 갯벌은 생명의 자궁이라고 했던가.

나는 신발을 벗고 바지를 둥둥 걷어 올려 갯벌 속으로 들어간다. 무방비하게 노출된 두 발은 금세 진흙 아래로 물컹물컹 빠지고 포위되고 만다. 내 걸음이 뒤뚱거린다. 걸음을 허적허적 옮길 때마다 장뚱어들이 쏜살같이 흩어진다.

내 몸이 휘우뚱 기우는가 싶더니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의식과 무의식이 섞이고 숨은 욕망이 팽창된다. 사물이, 빛이 흐려지고 균열을 일으킨다. 나는 뜻밖의 포근함에 잠긴다. 내 안의 ‘그것’를 처단하고 내 밖의 세상을 단죄하면 나는 차라리 증류수처럼 오롯이 맑아질 것이다. 어느 새 진흙이 무릎까지 차오르고 바지는 온통 진흙투성이다. 화들짝 눈을 뜨고 갯벌을 벗어난다. 차에는 여벌의 바지가 있었다.

짱뚱어로 점심을 먹는다. 추어탕인데 미꾸라지 대신 짱뚱어지만 맛이 담백하다. 밴댕이무침, 물갈치젓 맛이 그윽하고 향기롭다. 이곳에서 생산된 천일염으로 발효했다고 적혀있다. 근처의 편의점에서 아메리카노를 한잔 마시고, 염전을 향한다.

태평염전이라고 했다. 인부들이 고무래를 들고 소금을 밀어내 가장자리로 밀어내면 삽질로 외발통 수레에 퍼 담아 소금창고로 가져간다. 수레를 끌고 가는 인부들 등짝은 소금물로 된 땀이 진득하게 배어있다. 햇볕과 바람 속에 소금은 정갈하게 익어갔을 것이고 그 소금을 실어 나르는 인부들 행동에는 경건함이 서려 있는 듯하다. 소금을 거둬들인 소금밭에서 파도소리가 철석 대는 것 같다. 소금을 걷어낸 판에 새로 채워진 바닷물이 내는 소리다.

소금밭에 서보면 안다. 소금알갱이들의 한줌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햇볕과 바람과 시간과 땀의 결정체가 소금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급한 조바심으로 얻어지는 게 있을까. 소금을 얻기 위해 인부들이 약간 상체를 구부려 고무래를 밀거나 수레를 끄는 자세는 노동의 자세와 경건함을 일깨운다. 고개를 숙여 등을 약간 휘어야만 노동이 이루어지고, 귀한 수확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오십의 세월을 증류시키면 뭐가 나올까? 삶이 신산스러울수록 알갱이는 더 빛나는 보석이 될 것이다. 밤이 깊어야 별이 반짝이는 법이다. 소나기 지나간 자리에 무지개가 보이듯이 고난의 무게만큼 환희는 더 빛날 테니까. 그러니, 우리 삶이 척박해서 억울하다 할 필요도, 한탄할 필요도 없다.

노을이 지고 어둑어둑하다. 인부들이 모두 물러가고 두 사람의 인부가 소금 잔여물을 거둬들이고 있다. 황금빛 노을이 두 개의 그림자를 비추고 있다. 노을이 서서히 사위어간다. 그림자도 그 안에 묻힌다. 세상의 짐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마다 소금밭에 서 있는 염부를 떠올려보리라. 그의 얼굴에는 소금알갱이 하나의 여정이 오롯이 새겨져있을 것이다.

내 안의 소금결정체를 얻기 위해 내가 견딘 시간이 있었을까. 나는 뜨거운 햇살을 피해 다녔고 소슬바람에도 옷깃을 여미고 시간이 지체 될 때는 가차 없이 포기하지 않았던가. 내 안의 소금은 추출되지 못한 채 수시로 녹아버리기에 급급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어느 여류시인의 말처럼 내가 살아 숨 쉬는 날들은 불확실한 미증유의 세상이다. 내가 나를 증명하지 못하는데 누가 나를 알아주고 사랑하겠는가. 사랑은 치유가 불가한 전염병이다. 누가 누구를 감히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다음 날 아침 우전해수욕장으로 들어서다 산책로를 발견한다. 솔숲에는 ‘철학의 길’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햇살에 해송가지가 기지개를 켜는 사이로 푸른 하늘이 말간 이마를 드러내며 산책로를 반긴다. 순비기 군락이 나타난다. 나는 짙은 향기를 흠향하며 걷기여행을 한다. 인생은 긴 걷기 여행임을 문득 깨닫는다. 천천히 길을 따라가는 걷기야말로 진정한 인생여행이 아닐까. 늘 조바심 내며 빨리 다다르고 싶어 서두르며 뛰어갔던 일이 여기, ‘철학의 길’에서는 무색해진다. 목적지가 아닌, 여정이야 말로 진짜 삶이고 인생이라고 일러준다. 현대의 필요악이라고 생각했던 적당한 경쟁력도 이곳에서는 나무의 향기와 바람 속에 녹아버리는 듯하다. 더 가지고 싶은 욕심이나 매사 남을 탓하는 우매함이 부끄러워진다. 해찰과 명상이 우리의 헛헛한 속을 다 채워준다고 말한다. 해수욕장에도 인적이 없지만, 산책로에도 인적이 없다. ‘망각의 길’까지 가서 되돌아 길을 나온다.

내가 보내야 하는 건 사람에 대한 집착이 아니었다.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분노와 서러움이었다. 그것들을 흘러 보내야만 진짜 사랑의 원형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속삭인다. 내가 품어야 하는 것은 사유이고 인식이었고 그 안에서 비로소 ‘나’는 자유인으로 오롯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증도는 시간과 공간이 정지된 섬이었다. 그 섬은 내 안에 갇혀 있는 건 바로 나라고 일러주었다. 그냥 정지된 시간처럼, 고요한 공간처럼 숨을 쉬고 내 안에 고여 있는 것을 흘려보내라고 했다. 섬이 내 안에 숨 쉬는 한, 나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 김민혜, 2015년 ≪월간문학≫, 동리목월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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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해양과 문학> 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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