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문학에 관한 단상(박혜민)

등록일202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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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학에 관한 단상

 

해양 문학이란 바다를 주요한 소재로 삼거나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문학이다. 바다가 등장하는 문학 작품에 뭐가 있었나. 「아라비안 나이트」 중 한 이야기인 「신밧드의 모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어릴 적 재미있게 읽은 쥘 베르느의 「해저 2만 리」 같은 이야기들이 우선 떠오른다. 하지만 성경의 <요나書>도 해양 문학이라니 그럼 하나님이 물을 모아 바다를 만드셨다는 이야기나 노아의 방주가 나오는 <창세기>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고, 그렇게 바다가 나오는 작품을 하나하나 찾으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다.

지구는 뭍과 물로 되어 있고 그 물의 95%는 해수다. 사람도 태아일 때 어머니 뱃속의 바다에서 헤엄쳤다지만 허파 호흡을 하는 지금은 잠수 장비 없이는 물속에서 10분도 버티기 어렵기 때문에 바다-물-는 두렵다. 육지와 가까운 해변, 해수욕장의 얕고 푸르고 찰랑거리는 바다는 편안하다. 파도가 밀려와도 뭍으로 도망갈 수 있으니 두렵지 않다. 그러나 육지에서 멀어질수록 바다는 두려운 곳이 된다. 그 옛날, 저 바다 끝에 낭떠러지가 있어서 끝까지 가면 죽는다고 떨었던 조상들의 두려움이 우리의 무의식 어딘가에 전해져오기 때문일까. 배를 타고 나가 돌아오지 않으면 생사도 알 수 없고 시신도 거둘 수 없이 막막한 상태로 기다려야만 하는 바다의 시간에 압도됐기 때문이었을까.

그리스 신화에서는 죽은 자가 망계로 갈 때 아케론, 코퀴토스, 플레게톤, 스틱스, 레테라는 다섯 개의 강을 건너야 한다고 한다. 기독교의 세례는 본래 머리에 물을 묻히는 정도가 아니라 물에 잠겼다 나오는 침례(浸禮)이다. 이것은 죄와 욕망에 사로잡힌 옛사람은 (물속에서) 죽었고 이제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메시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이렇게 물은 생과 사를 가르는 공간이다. 우리나라 설화문학에서도 착한 사람이 죽어 올라가는 하늘에는 옥황상제가 살고 악한 사람이 죽어 내려가는 땅 속에는 염라대왕이 살듯이 바다 속에는 용왕이 산다. 효녀 심청은 인당수에 몸을 던져 용궁에 갔다가 연꽃에 실려 돌아온다. 죽었다 산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가난한 맹인의 딸 심청은 죽고 고귀한 신분의 새사람으로 되살아 온 것이다.

바다가 죽음과 맞닿아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바다 앞에서 머뭇거린다. 그래서 바다는 사람을 가두고 지키는 간수 같을 때도 있다. 영화 <트루먼 쇼>(1998, 피터 위어 감독, 짐 캐리 주연)에서 주인공 트루먼은 아버지가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을 목격하고 물 공포증을 갖게 됐는데 사실 이것은 그가 인공 섬 스튜디오를 떠나지 못 하도록 프로듀서가 유도한 것이었다. 결국 마지막에 모든 것을 극복하고 바다 저편까지 나감으로써 트루먼은 세트의 끝에 도달하는데 영화의 주제나 주 배경이 바다가 아닌데도 이 영화를 떠올릴 때는 바다와 싸우는 이 장면이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되곤 한다.

바다가 두렵기 때문에 바다와 싸우는 인물들의 용기는 그만큼 더 선명하게 보여지는 것 같다. 바다와 싸운다는 게 바닷물 자체보다는 바다의 폭풍우, 바다 생물과의 싸움일 때가 많다. 그리스 신화 속 오디세우스는 10년간 항해를 하며 극한 시련과 모험을 겪는데 그 대상은 외눈박이 거인, 선원들을 노래로 유혹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세이렌, 바다 괴물들이다.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주인공 산티아고는 청새치, 상어와 싸움을 벌인다. 비록 산티아고가 사람은 혼자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돌아와 누군가와 대화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사람도 자연의 일부임을 인정하게 되지만 고기들과의 싸움에서 이 노인은 의지를 가진 인간의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강하고 끈질긴 사람들 하면 뱃사람, 특히 해적이다. 산적도 사납기는 하지만 태풍이 오면 동굴에 숨지 비바람과 싸우진 않는다. 도적질을 못 해도 산에서 나는 것들로 배는 채울 수 있다. 하지만 해적은 배 멀미라는 통과의례부터 거쳐 극한의 갈증과 싸우고 태풍이 오면 맞서 싸워야 한다. 스티븐슨의 「보물섬」(1883)부터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해적 문학은 자연과 투쟁하는, 원시적이고 날 것 그대로인 인간의 강인한 모습을 극대화하여 보여 준다. 물론 요즘 시대는 소말리아 해적이 그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는 있지만…

해적 문학에는 바다와의 싸움 뿐 아니라 ‘보물’도 있다. 망망대해 어딘가에는 보물이 묻혀 있는 ‘이상향’도 있다. <바다와 나비>(김기림)에서 ‘바다’는 냉혹한 현실이지만 「깃발」(유치환)에서 ‘푸른 해원’은 바다의 이상향을 의미한다 했고 <청산별곡>의 바다는 이상향을 넘어 도피처라고 했다. 홍길동이 율도국으로 가고 허생이 무인공도로 가려 할 때 그들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야 했다. 바다 어딘가의 보물, 또는 이상향인 어떤 섬은 안전하고 익숙해서 편안한 육지를 과감히 떠나 거친 파도와 굶주림과 갈등과 싸워 이긴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상급이었을 것이다.

항해술과 지리학의 발전 덕분에 용기는 날개를 달고 범선의 돛을 펼 수 있었다. 그렇게 ‘향신료’이라는 화두를 달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탐험을 본격적으로 펼친 것이 15~17세기의 대항해 시대이다. 그 시기 유럽은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시대를 꽃피우고 있었는데 인간의 아름다움만 보는데 정신이 팔려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 시대의 해양 문학으로는 이렇다 할 것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2007년에 나온 일본의 작가 모리무라 무네후유의 󰡔대항해 시대󰡕가 유럽 항해 역사와 인물들을 잘 다루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은 내가 󰡔대항해 시대󰡕라는 온라인 게임을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540페이지에 달하는 역사서인 󰡔대항해 시대󰡕(2008, 주경철 교수著,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를 먼저 읽어 아직 읽어보지는 못 한 상태다. 사실 이 세 개의 󰡔대항해시대󰡕 중에서 정말 내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온라인 게임 <대항해시대>다. 왜냐하면 이 게임은 단순히 오락용이 아니라 나에게 해기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비록 지금은 여건상 게임을 접게 되었지만 과거 이 게임을 즐길 때 교역, 모험, 전투 등을 하기 위해 미지의 해역으로 나가던 그 순간순간이 배경음악과 더불어 나에게는 항상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 수필을 쓰면서 많은 해양문학 작품을 떠올리고 찾아보며 바다가 갖는 이미지와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바다의 이미지와 의미는 무엇이 가장 큰가 생각해 보았다. 지금은 꿈꿔왔던 해양대에 와서 해기사가 되기 위한 현실적인 준비를 하고 있지만 내게 바다에 대한 동경이 구체적으로 시각화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읽은 윌리엄 스타이그의 그림책 󰡔아모스와 보리스󰡕를 통해서가 아닌가 싶다. 바다를 사랑한 생쥐 아모스는 바닷바람 냄새며 파도 소리도 좋아했다. 바다 생각에 푹 빠져 있던 아모스는 바다 저 멀리 어떤 세계가 있는지 알고 싶어졌다. 낮에는 배를 만들고 밤에는 배 타는 법을 공부했다. 완성된 배에 실을 음식이며 나침반, 육분의, 망원경 등 필요한 물품들을 하나하나 읽을 때마다 내가 여행갈 짐을 꾸리는 것처럼 설렜다. 그리고 마침내 출발. 아모스가 ‘갑판에 누워서 별이 빛나는 끝없는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을 볼 때는 글과 그림에 내가 푹 빠져서 내가 누워 검은 밤하늘을 보는 것도 같았고 내가 항해사가 되어 그렇게 하고 있을 시간을 어렴풋이 꿈꾸었던 것 같다. <대항해 시대> 게임에서 배가 대서양이나 태평양, 인도양 등을 항해할 때는 몇시간이 넘도록 그렇게 배가 바다를 달리는 장면만 나오는데 아름다운 배경음악 속에 적막한 고독함을 느끼며 아모스의 항해를 떠올렸던 것 같다.

4년 뒤 이맘 때 나는 어떤 배를 타고 바다 위에 있을 것이고 현실은 녹록치 않을 것이다. 지금보다 더 어렵고 우울하고 화가 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 두려움과 분노로 바다를 대하기보다는 아모스처럼 별을 바라보며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늘 혼자가 아니라 보리스 같은 든든한 친구를 두고 동료들과 바다를 얻게 되길 바란다.

 

□ 박혜민(한국해양대학교 해사수송과학부 2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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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해양과 문학> 20호 독자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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