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와 과학, 해양문학과 문화(서영상)

등록일202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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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와 과학, 해양문학과 문화

 

고래의 영명 Whale(웨일)의 어원은 덴마크어와 스웨덴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래는 덴마크어로 hval, 스웨덴어로 hwal이고 그 뜻은 아치 모양 또는 둥근 천장 모양이라는 뜻이다. 1851년 허먼 멜빌은 이러한 고래의 어원이나 고래를 묘사한 고전의 대부분 기록을 찾아 정리해 고래의 모습과 성향에 대해 그의 저서 모비딕을 통해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국내의 경우 2017년 안성길은 <海洋과 文學>이란 종합 문예전문지를 통해 “고래 시에 나타난 고래와 포경에 나타난 작가들의 인식”이라는 평론을 내어 놓았다. 포경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다룬 사례를 문학작품에서 찾아 잘 정리 하였다. 그 외 고래를 생활적 대상물, 관경의 대상물. 경이로운 외경의 대상물 등, 다양한 대상물로 인식한 작품들을 일일이 예시하여 분류함으로써 고래에 대한 다양한 인식을 보여 주었다.

 

세계 최초의 상업포경은 17세기 북대서양에서 네덜란드, 영국, 독일 등이 북극경(Bowhead whale)을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북태평양에서는 17세기 중반부터 미국이 향유고래(Sperm whale)을 잡으면서 상업포경이 시작되었다. 향유고래는 대형고래 중에서 유일하게 이빨을 가진 고래이고, 기름이 제일 많은 고래이기도 하다. 향유고래의 일생을 그 회유와 망망대해에서 종간의 상호 소통을 어떻게 하는지 연구한 결과를 보고 간단한 글로써 나타내어보았다.

향유고래의 일생/ 서영상

 

위아래 더운 물과 찬 물 사이에서 사랑을 공명(共鳴)한다. 망망대해에서 SOFAR* 채널을 통해 서로의 얼굴을 더듬는다. 향유고래의 항해는 북향해류와 태평양 해령(海嶺)을 길 삼는다. 수백만 번의 깊은 잠수와 수십여 차례 전 세계해양을 향한 회유(回遊)를 한다. 수 없이 할퀴어진 상처가 험난한 삶에 흰색 칼날 무늬로 비춘다. 포식과 굶주림의 반복 속에서 한결 거듭난 존재로 태어난다. 감히 사람은 접근도 못하는 신비의 바다에서 투명한 영혼을 발견한다. 지난 팔십 평생의 고래 꿈을 회상하며 해변에서 자신의 무게를 처음 느낀다

 

*SOFAR (Sound Fixed And Ranging) channel:“수중음파통로”를 이용하면 바다에서 수천 km 이상 떨어진 거리까지 음파가 전달될 수 있다.

 

사실상 우리나라주변 해역에서 상업적 포경이 시작된 것은 1850년대 전후로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의 선진국들의 포경선이 동해에 출현하여 많은 양의 고래를 포획하였다. 1846년 당시 미국의 포경선은 722척으로 규모가 어마어마했다(A. Howard Clark, 1887). 1882년 김옥균이 일본의 나가사키 포경어업을 처음 접하게 되어 포경어업을 개척하고자 하였으나,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 1894년 러시아의 귀족이 장생포에 태평양 포경회사를 설립하면서 우리나라의 포경어업이 본격화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고종이 1899년 러시아의 헨리 게제란에게 경상도 울산포, 강원도 장진포, 함경북도 진포도에 포경어업을 허락한다.”는 기록이 있다. 미국이 20세기부터 석유를 발견하면서 고래를 잡지 않기 시작했다. 종 보전의 문제 인식에서 마침내 1980년대에는 고래잡이에 대한 윤리문제 즉 지능이 높은 고래를 살상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사상의 흐름이 있게 되었다. 이후 1982년 고래 살상과 그 방법에 대해 세계포경위원회(IWC)에서 “상업포경 전면금지”를 결정하고 포경금지령을 내린다. 이에 우리나라 수산청은 1986년 어기부터 상업포경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우리나라 마지막 민간 포경선이었던 천구호도 더 이상 고래를 잡지 못하게 되었다.

 

고래는 과학적으로 포유강 고래목(目, Order Cetacea)에 속하며 수서동물로 크게 수염고래 아목(亞目)과 이빨고래 아목(亞目)으로 나뉜다. 이빨고래는 보통의 포유동물처럼 이빨을 가지고 있으나 수염고래는 이빨대신 입천장에 케라틴으로 된 고래수염을 지니고 있다. 고래는 전 세계적으로 80 여종이 있는데 한국 연안에는 약 35종이 서식한다. 최근 일본 과학자들은 오래기간 고래 배속의 먹이내용물을 조사한 결과 이빨고래의 경우 기후변화로 수십 년간 바닷물이 차가운 시기에는 정어리가 많이 나왔고 더운 시기에는 오징어 등 난류종이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90년 이후에는 수온상승이 지속되고 있어 그 영향을 받아 서식지의 분포범위가 축소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현존하는 고래류의 80%가 고위도로 밀려가는 어려운 환경에 처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특히, 수염고래의 먹이는 유파우지아 등으로 수온변화에 민감한 플랑크톤 종이라서 고래는 먹이분포에 따라 제한적 공간에 머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북극의 해빙으로 인한 해운업의 증가와 석유 및 천연가스 탐사, 그리고 북극에서의 어업활동 등이 예상된다. 이는 고래의 청각장애(acoustic disturvance), 선박과의 충돌, 부수어획(bycatch), 먹이 고갈 등 북극해역에 주로 서식하는 고래류에 대해 심각한 위협을 초래 할지 모른다.

 

우리나라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선사시대 인류의 고래잡이 광경을 바위에 새긴 그림이다. 절벽이 있는 산등선의 암반 모습이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반구대(盤龜臺)’라 지명된 곳이 있다. 이 반구대로 부터 남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 우리나라 국보 제 285호인 반구대암각화가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 바위그림을 사냥미술인 동시에 종교미술로서 선사시대 사람의 생활과 풍습을 알 수 있는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하고 있다. 기원전 7,000∼3,50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반구대 암각화에서 고래사냥 그림에는 향유고래, 참고래, 혹등고래 등 큰고래가 46마리 이상이 그려져 있으며 인류가 고래를 잡기위해 작살과 부구(浮具), 낚싯줄을 사용한 증거가 제시되어있다. 특히, 2척의 배가 협력하여 큰고래를 잡는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반구대암각화는 단순히 오래된 정보라는 것뿐만 아니라 인류사를 이해하고 재조명 할 수 있는 중대한 가치를 지닌다. 인류학자들은 환태평양 연안지역이 인류역사의 중대한 이동경로였는데 북으로는 알라스카부터 남으로는 뉴질랜드까지 인류가 고래문화와 연결된 흔적을 추적한 결과 그 중심에 반구대암각화가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고래문화란 고래잡이가 주생활인 문화권을 말한다. 환태평양 연안 민족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유전인자가 바로 고래문화를 가진 인류의 흔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즉, 반구대 암각화를 통해 인류의 이동과 한반도 정착민의 뿌리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의 또 다른 의의는 고래사냥 그림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데 있다(Lee and Lobineau, 2004).

 

고려 말 유명한 성리학자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은 지금의 경북 영덕군 영해면에 있는 먼 바다의 물고기를 잘 볼 수 있는 언덕(지금의 상대산 183m)을 관어대(觀魚臺)라 칭했다. 그는 그 곳에 올라 고래가 물줄기를 뿜으며 노는 모습을 보고 <관어대소부(小賦)>를 썼는데 “큰고래가 떼 지어 장난하면 하늘이 흔들리고∼” 라고 시작하는 읊은 시가 있다. 영덕군 방곡면에는 고래불이라는 지명이 있다. 고래불이란 고래가 뛰어놀던 바다란 뜻의 경정(鯨汀)의 순 우리말로 목은 이색이 붙인 지명이다. 한편, 고래가 물을 뿜는 종은 몇 안 되는데 동해연안에서 과학적 근거로 추정해보면 관어대에서 목은 이색이 쉽게 볼 수 있었던 고래불 해변에 나타난 고래의 종류는 귀신고래와 대왕고래로 추정된다.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큰돌고래와 낫돌고래는 먼 산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물을 높게 뿜지는 않는다. 2017년 9월 부산시와 부산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발간된 서영상의 시집 “<고래불> 5부, 지구의 바다“에 목은 이색과 고래에 대해 아래와 같이 그 이야기를 전한다.

 

고래불*/ 서영상

 

상대산 관어대(觀魚臺)에 올라

목은**이

고래를 보고 읊은 시는

큰돌고래 찬가였을까

낫돌고래 찬가였을까

 

고래들이 떼 지어 놀면 기세가

창공을 뒤 흔드네***

 

먼 바다에서 뿜은 물이

산언덕까지 닿은 걸 보면

귀신고래였을까

대왕고래였던 걸까

 

병곡 고래불에는

화답 없는

인간 고래만이

와글와글 하는데

 

* 고래불: 경북 영덕에 있는 해수욕장

**목은: 이색(李穡). 성리학을 바탕으로 정치사상을 전개한 고려말의 학자

***목은 문집 제1권 “觀魚臺小賦 竝書”에서 詩 구절 “長鯨群戱而勢搖大空”을 인용

 

우리나라 사람의 삶과 언어 속에 고래가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 ‘고래 등 같은 기와집’과 같은 표현뿐만 아니라, 우리민족이 고래와 더불어 살면서 고래로부터 얻은 삶의 지혜로 해산 이후 미역을 먹는 풍습 등을 들 수 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산모가 해산 후 미역을 먹는 우리나라 풍속의 유래가 기록되어있다. “옛날 어부가 물가에서 헤엄을 치다 새끼를 갓 낳은 고래가 물을 삼킬 때 함께 빨려 들어갔다. 고래배속으로 들어가 보니 미역이 가득 차 있고, 오장육부에 나쁜 피가 고여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쁜 피가 미역 때문에 정화되어 물로 바뀌어 배출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역이 산후의 보약임을 알았고 이후 아이를 낳고 미역을 먹었다.”한다(이경규, 1788-1856). 국립수산과학원에서는 이 고래의 출몰하는 습성 등 여러 가지 상황을 볼 때 옛날 우리나라 연안에 흔히 나타났던 귀신고래로 추정한다. 지금은 우리나라 연안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1814년 우리나라 서남해 흑산도를 배경으로 해양생물을 기록하고 분류한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도 고래에 대해 “살피건대, 옥편에 의하면 고래는 물고기의 왕이라고 했다. 고금주(古今注)에 이르기를 암놈은 예(鯢)라 하는데 그 큰 몸은 길이가 천발에 달하며 눈이 명월주(明月珠)와 같다고 했다. 고래 고기를 쪄서 기름을 내면 10여 독을 얻을 수 있으며 눈은 술잔(杯)을 만들고 수염은 측정하는 자(尺)를 만들며, 그 등뼈는 잘라 절구를 만들 수 있다.”라고 기록되어있다(정약전, 1814).

 

□ 서영상, 2003년 ‘문학세계’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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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해양과 문학> 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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