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양문학 창작론(김부상)

등록일202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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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양문학 창작론

 

1. 지난 추석 연휴에 전주의 한옥마을을 다녀왔다. 목적지에 접근하자 뜻밖에 ‘최명희 길’이란 도로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낯익은 이름이었지만 그가 정작 누구인지 기억이 나질 않아 한 동안 애를 먹었다.

경기전(慶基殿)에서 큰 아들 식구와 만나기로 하고 바둑판같은 길을 걷던 중 불현 듯 최명희 문학관 뒷문이란 안내문과 마주쳤다. 오라, 그때서야 오래전에 읽다가 만 전 10권의 장편소설 ‘혼불’이 기억났다.( 읽다가 중도에 그만 둔 것은 아이들이 내 서재를 들락거리며 두서없이 책을 집어가더니 끝내 제 자리에 돌려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듬성듬성 이빨이 빠진 그 소설집은 여태 내 서가의 한 편에 15년 넘게 꽂혀있다.)

 

아내를 길에 세워둔 채 나는 얼른 뒷문을 통해 들어가 문학관 입구부터 찾았다.

‘최명희 문학관’이라 쓰인 현판 왼편 벽에 붙은 글이 대뜸 나의 눈을 붙들었다.

-다만 저는, 제 고향땅의 母國語에 의지하여 文章 하나를 세우고, 그 文章 하나에 의지하여

한 世界를 세워보려고 합니다. 한없이 고단한 길이겠지만, 이 길의 끝에 이르면, 저는 저의 삶과, 저 자신이, 서로 깊은 和解를 이루기를 바랍니다.(1988.9.1. 김남곤 시인)

 

언어(글을 포함한)와 문장의 차이가 무엇인가. 시인의 결기가 저러한데 나는 여태 무엇을 했단 말인가. 오래 전 소설 ‘혼불’에서 작가가 수놓았던 결 고운 문장들을 읽으면서 나는 자수를 놓는 조신한 양반집 규수를 머릿속에 그린 적이 있었다. 그 기억과 느낌이 옳았음은 최일남 소설가가 남긴 다음의 짧은 헌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 수바늘로 한 땀 한 땀 뜬 이바구.

‘혼불’은 작가가 서른다섯에 시작해서 쉰 살이 되어서야 마무리한 필생의 작품이다. 완간을 4개월 앞두고 난소암 판정을 받았던 작가는 2년 뒤(1998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 대하소설은 호남지방의 혼례와 상례의식,정월 대보름 등의 전래풍속을 세밀하게 그렸는가 하면, 남원지방의 방언을 풍부하게 구사하여 민속학.국어학.역사학.판소리 연구가들의 주목을 받는다고 한다.

 

15년 동안 애오라지 ‘혼불’ 창작에만 몰두한 작가의 정신을 떠올리면 등골이 서늘하다. 그래서 崇高하다는 찬사를 받는다. 그러므로 내 서재에 15년 동안 잠자고 있는 그 책들을 기억하는 나는 도대체 낯을 들 수가 없다. 부끄러움에 휩싸여 서둘러 전시실을 벗어나려 하는데 다음의 글귀들이 다시 나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 언어는 정신의 指紋. 나의 넋이 찍히는 그 무늬를 어찌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언어는 정신의 指紋이고 모국어는 모국의 혼이기 때문에 저는 소설 ‘혼불’에 진정한 불빛 같은 알맹이를 담고 있는 말의 씨를 심고 싶었습니다.(1998년 호암 예술상 수상소감)

- 나는 일필휘지를 믿지 않는다.

- 원고지 한 칸마다 나 자신을 조금씩 덜어 넣듯이 글을 써내려갔다.

 

전북일보 편집국장에게 보낸 김남곤 시인의 편지글이 왜 ‘최명희 문학관’의 현판 옆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지 이제 그 이유를 알겠다. 시인이든 소설가든 文章 하나에 목숨을 건다는 말일 테다. 아니,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말일 테다.

 

2. 당신이 소설가란 분에 넘치는 호칭을 얻게 된 것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먼저 우연이라고 답할 것이다.

 

나이 50을 넘겨 일시에 사회적 실패자로 추락해버린 어느 날, 내가 문득 생각해낸 것은, 왜 자신이 실패한 자의 자리에 섰는가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일이었다. 그 당시엔 그것이 감당하기 힘든 절망으로부터 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그 날로부터 직장생활을 하면서 간직해왔던 스무 권이 넘는 다이어리를 하나씩 펼쳐가며 지나간 삶의 몽롱한 흔적들을 기록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2007년 부일신춘문예에 해양소설로 대상을 받은 ‘명태를 찾아서’란 졸작은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었다. 진실로 고백하거니와, 신춘문예에 응모한 일도, 수상작이 된 것도 나의 뜻과는 먼 우연이었다.

그러나 수상소감을 발표하는 날, 나는 무람하게도 한국문학계에서 아직도 변방을 떠도는 해양소설을 정착시켜야 할 소명을 갖게 되었노라고 떠들었다.

작품을 뽑아준 심사위원들은 소설의 형식이나 내용의 완성미보다 일부 직핍한 문장에서 일말의 가능성을 보고 칭찬한 것임에도, 나는 마치 공인된 마에스트로 자격증을 딴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등단 후, 몇 년간 지방 문예지에 의기양양 발표했던 작품들은 대부분 평자들로부터 ‘본격소설’로 인정받지 못했다. 같은 기간에 써두었던 해양에 관한 중단편 몇 개도 소설로서의 품격을 갖추지 못한 것은 매일반이다. 습작기를 생략한 아마추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평자의 안목에는 아랑곳없이 스스로 인정받지 못함을 원망하며 자탄하기 일쑤였다.

 

‘본격소설’이란 무엇인가? 일련의 신변적인 소재를 다룬 작품일지라도, 일상적인 사소한 사건의 외부적 묘사에만 그치지 않고 주인공의 행동원인을 심리적으로 깊이 추구하여 인생의 드라마를 본격적으로 파고드는 소설의 총칭이며, 또한 ‘대중문학’이나 ‘통속문학’과 대별되는 ‘순수문학’을 지칭한다. 또는 제재를 광범위한 사회현실에서 구하고 작자는 제 3자적 입장에서 항상 작품의 뒤에 숨어 사건의 진실이나 인물의 움직임을 객관적으로 다루어 창작, 구성한 소설을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쓴 소설들이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같은 대중소설의 범주에 속하냐 하면 어림없는 얘기다. 그럼에도 나는 우연히 얻은 자격증이 아까워 일단 많이 쓰고 보자며 이를 앙다물었다. 그러나 쓰면서도, 써 놓고도 늘 ‘이건 아니다’란 탄식을 거듭하다가 결국 어느 날 글쓰기를 중단하고 말았다.

“왜 文章을 만들지 못할까!”

 

소설가 김훈은 그의 창작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이야기꾼이 아니다. 더구나 이 시대의 이야기꾼이 아니다. 이야기를 풀어놓으려면 우선 이야깃거리가 있어야 하고, 그 삼인칭 주어의 실존을 감당해줄 만한 술어가 있어야 할 터인데,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이야기란 현실의 결핍과 치욕을 덮거나 드러내거나 비틀어 버림으로써 그 결핍과 치욕을 넘어서려는 언어의 화폭일 것이다. 현실과 화폭 사이의 거리를, 언어의 징검다리로 건너야 하는 이야기꾼의 운명을 나는 거의 감당하지 못한다.

가장 절망적인 장벽은 그 3인칭 인물의 이름을 지어야하는 일이다. 허구의 고유명사를 지어내는 일은 그 인물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감당해야 하는 일일 텐데, 내 언어의 힘으로 그 일을 감당해 낸다는 것은 말짱 개수작으로 느껴진다.

 

당대 최고의 文章家로 호가 난 그의 엄살은 사뭇 섬뜩하다. 그러나 소설이 일필휘지로 갈겨쓰는 이야기가 아님을 그도 훤히 꿰뚫고 있음을 새삼 확인하며 그에게 존경심을 바친다.

삼인칭 주어란 사건의 인물을 他者化 시키는 것이고 주어의 실존을 감당할 술어란 그 인물의 성격이나 행동원인을 규정하고 창조하는 일일 테다. 그러므로 체험을 근거로 한 일단의 사건이나 인물에 작가의 상상(생각이나 식견)을 더하여 창작하는 이야기가 제대로 된 소설일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꿈꾸는 소설도 개인적 체험의 평면적 徐事를 떠나 본격소설의 文章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3. 당신이 소설가란 분에 넘치는 호칭을 얻게 된 것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머뭇거리다가, 필연이라고 답할 것이다.

 

얼음이 두꺼워도 강물은 흐른다.

내 유년의 기억 속에, 다정다감한 이모님 두 분이 계셨다. 거제도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장을 보러 올라올 때마다 이모님들은 이송도 근처 단칸셋방에 살던 어머니 곁에서 번갈아 하룻밤 묵고 가시곤 했다. 그럴 적마다, 새벽녘 엷은 잠결에 나의 귀를 어루만지는 솔바람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은 이부자리에서 얼굴을 맞대고 누워 두 자매가 소곤소곤 나누는 이야기 소리였다. 화자는 언제나 이모님들이었고 어머니는 북이나 장구채를 잡은 鼓手였다. 이야기의 대강은 고향마을 사람들의 일상적 삶이거나 고된 시집살이에 관한 푸념들이었다. 특히 큰 이모님은 고향의 떠돌이 방물장사였는데, 동네방네 다니면서 주워들은 소문들을 부산에 올 때마다 어머니에게 보따리 채로 쏟트리는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이야기의 꼬리가 새벽녘까지 이어진 것을 보면, 어린 우리들을 재우고 난 뒤로 시작된 이바구가 판소리로 치면 다섯 마당이거나 일곱 마당이었을 게다.

나의 경우, 이야기에 대한 달콤한 향수의 시원은 이처럼 밤을 새운 이모님들의 세설이었다. 초등학교 동기회에서 40년 만에 해후한 어느 친구가, 나를 보고 대뜸 한 말이, 언제나 생경한 세상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던 음전한 아이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진즉에 이모님들의 그 다정다감한 말재주를 흉내 낸 것이 아닌가 싶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학업을 중단한 채, 사하(沙下)의 어느 산비탈에서 나는 몰락한 가계를 근근이 지탱하던 양계장의 노동을 감당한 적이 있었다. 짐승을 키우는 일은 휴일도 명절도 없는 고단한 일이었다. 물이 오른 사춘기였지만 어린 이야기꾼의 감성은 먼발치로 노을이 깃든 낙동강을 일과처럼 바라보게 했다.

내 나이 열여덟. 가을의 어느 오후였다. 나는 버릇처럼 저무는 강을 향해 낮은 담벼락에 기대서 있었다. 그때 언덕아래 비탈진 풀숲에서 청자색 날개를 단 나비 한 마리가 하늘거리는 모습이 눈에 꽂혔다. 움직이는 물체 뒤로 곧장 깔깔거리며 뒤쫓는 소리가 있어 주목하니 동네 인근에 사는 한 살 아래인 사촌 여동생이었다. 하늘거리는 듯 움직이는 나비의 정체는 갓 여고에 입학한 동생의 친구였던 것이다.

그 날 이후, 난데없이 나의 세상은 밤낮으로 물결치기 시작했다. 하늘이 노랗고 가슴이 벌렁거리고 숨이 막히는 나날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벙어리 냉가슴이나 상사병의 말뜻을 체득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삼수생이었던 내가 그해 부산의 일류였던 K고에 간발의 점수 차로 낙방한 것도, 그래서 수재의 꿈을 접은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해를 거듭하며 나의 애간장을 녹였던 첫 사랑의 소녀를 이 대목에서 추억하는 이유는, 그녀를 향한 일편단심의 연정이 나로 하여금 별처럼 많은 戀書를 쓰게 했기 때문이다. 내 평생 그처럼 준열한 사랑은 다시없기에 나의 첫 사랑은 아직도 내 기억창고의 보물 중 으뜸이거니와, 그 사랑의 열병이 나로 하여금 비로소 하나의 대상에 골몰하여 글 쓰는 버릇을 갖게 하였던 것이다.

연애일기에 코가 빠진 나는 D고의 문예반에 들었는가 하면, 방과 후면 십중팔구 도서관에 틀어박혀 남의 글들을 읽었다. 이후 문학에 대한 이해와 글발의 힘이 조금씩 붙게 되자, 대학생이 되어서는 막걸리 값을 마련하기 위해 학보의 단골작가로 행세했으며 술이 취하면 으레 망나니 같은 짓을 일삼았다. 망나니 같은 짓이라 함은, 민주시민이나 학생들의 사회저항권이 박탈당했던 군사독재정권 시절,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내가 1930년대 지식인들의 저 염세적 형태를 또한 흉내 냈다는 말이다.

문학청년의 무책임한 외투를 벗어던진 것은 내 나이 스무 네 살 때였다. 폐가처럼 쓰러진 가계를 위해서는 당장 먹고 사는 일이 급했기 때문이다.

 

정지용이나 김기림 등과 함께 모더니즘 시운동에 참여했던 김광균(1914-1993)이 갑자기 시인의 명함을 버리고 실업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그의 나이 서른아홉 살 때였다. 젊은 시절 내내 직장생활에 사활을 걸었던 나는, 작가로서 꿈을 버린 변절자의 심정으로 김광균 시인의 이름을 자주 떠올렸다. 시인은 삼십년 세월을 건너뛰어 말년에 다시 시단에 등장했는데, 50을 넘긴 나이에 지방문단의 말석에 이름을 올린 2007년, 그때에도 나는 외람되이 그의 이름을 떠올렸던 것이다.

 

“먹고 사는 일과 소설가로 사는 일 중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필연인가?”

 

4, 전라도 나주로 이주한 지도 3년이 지났다. 올해 음력 나이로 환갑에 들었으나 아무래도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아 하루하루 마음이 편치 않다. 공자 왈,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지만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손가락 사이 모래알 빠지듯 온갖 것이 허허롭다. 더 나아가면 모골이 송연하고 끝 모를 자괴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하늘의 뜻이란 사람이 제각각 타고난 인생의 소명을 앎이 아니런가.

창세에 하나님이 정한 인간의 수한은 120년이었다. 하나님의 언약 이후 최초로 이 수한을 지킨 자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해낸 모세였고 이스라엘의 부족장 '갈렙'은 나이 80에 전장마다 앞장서서 용맹과 강건함을 떨쳤다. 이를 근거로 볼 때 나이 60은 하나님이 허용한 인생의 절반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그래서 환갑을 기념하여, 내 딴엔 새로운 인생역전의 기회를 만들어 볼 요량으로 직장을 관두고 전업 작가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글 쓰는 일이 나의 길이 아니다’란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이는 나의 재능이 그 뜻에 미치지 못하다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하늘에 무리지어 떠도는 구름처럼 변화무상한 상상력도, 세상을 휘둘러 꿰뚫는 직관력이나 식견도, 남을 감동시킬 만한 문장력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목을 정하고 진행하던 원고를 중도에 방기한 채 몇 개월째 무위도식하는 자처럼 지내고 있다. 정신이 맑은 날은 손에 잡히는 대로 남의 글을 읽고, 정신이 가물거릴 때면 유선방송의 외화를 감상하며 공짜 같은 시간을 죽이고, 간혹 건강이 염려되는 날이면 가까운 산을 오르기도 한다. 당분간은 이런 식으로 나를 함부로 내버려두려 한다. 특히 최근엔 서해안에 즐비한 섬들을 차례로 탐방하고픈 해묵은 소원을 좇아 행장을 꾸리기도 했다. 스스로 강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작정한 일상이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 언제나 쓸쓸한 바람이 지치고 간다.

 

어느 날, 사서오경의 '예기'편을 읽다가 삭거(索居)란 단어를 발견하곤 지금의 나의 형편에 꼭 들어맞는 말이라고 생각되었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눈마저 어두워진 자하(子夏)가 자학하는 꼴을 보며 멀리서 찾아온 증자(曾子)가 자하의 부덕함을 조목조목 꾸짖자 짚고 있던 지팡이를 던지고 절을 하며 자하가 증자에게 이렇게 사과했다고 한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내가 친구들과 떨어져 외롭게 산지가 너무 오랜 때문이었어."

여기서 삭거(索居)란 외로이 떨어져 산다는 뜻으로 쓰인다.

또 다른 하루,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가사문학관을 거쳐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에 있는 면앙정(免仰停)을 찾았다. 조선 중종시대에 살았던 강호가사의 원조인 송순(宋純)이 나이 70을 넘어 관직을 벗고 손수지은 이곳 정자에서 문인.학자들과 교류하며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의 나이 87세 때인, 과거급제 60주연을 자축하는 회방연에서 그가 대취하자 송강 정철,기대승,고경명,임제 등 제자들이 손으로 가마를 만들어 스승을 댁으로 모셨다지 않는가.

아- 송순의 고일(高逸)한 삶이여!

면앙정을 떠나며 늙어서도 한 우물곁에 노닐었던 옛 선비들이 부러워 긴 한숨을 짓다가, 문득 공자의 다음 말씀이 떠올라 머리를 휘저었다.

 

人無遠慮 必有近憂 (사람이 먼 생각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을 갖게 된다).

 

(삭거 索居. 2013.06.04.)

 

요즈음 나를 제일로 힘겹게 하는 것은 글쓰기에 대한 열망과 집중력의 부족이다. 머릿속에는 늘 몇 가지 소설의 草稿들이 맴돌고 있지만 원고지에 한 줄도 옮기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돋보기를 쓰고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는 수고로움은 아직 견딜 만하다. 그러나 도대체 소설의 말머리를 장식할 文章을 만들지 못한다. 文章을 위해 목숨을 걸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매불망 내가 찾는 것은 直喩가 아닌 隱喩의 문장이기에 더욱 그렇다.

동일한 근심이 강도처럼 몇 년째 나를 뒤쫓아 오며 몰아세운다. 숨이 차면, 위와 같은 짧은 산문에 의지하여 잠시 피신하기도 하고, 숙성홍어회의 곰삭은 맛에 착안하여, 숙성통의 홍어를 갈무리하듯 머릿속의 그 草稿들을 한 번씩 불러내어 뒤집어 줄 뿐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이야기통의 숙성이 끝나면 맛있는 文章 하나 얻으리라. 이것이 작금의 유일한 희망이다.

 

□ 김부상, 2007년 부일 신춘문예 해양소설 '명태를 찾아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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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해양과 문학> 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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