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의 길(최영욱)

등록일2020-06-27

조회수74

 

 

바다 위의 길

 

부산항 출발을 앞둔 조선기선주식회사(朝鮮汽船株式會社) 소속의 공주호(公州丸)는 이미 만원이었다. 부산에서 여수까지의 긴 해안여정. 통영, 마산, 삼천포항 등에 접안할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무게보다 훨씬 무거운 화물들을 지거나 머리에 이고 내릴 것이다. 하선하는 그만큼의 사람과 화물이 다시금 공주호 선창을 채울 것이며 배는 다시 창선해협을 지나 하동군 노량항에 닿을 것이다. 아마 저문 시간이었을 것이다. 노량의 노을을 온몸으로 받으며 사람들은 배에서 내리고 또 오르기를 끝내면 공주호는 여수로 뱃길을 돌리고, 선창에 남은 사람들과 화물은 제각자의 집으로 혹은 하동포구나 화개장터로 가기 위해 또다시 배를 바꿔 탄다.
여수, 거제, 남해, 삼천포, 부산항 등 각 지역의 해산물은 노량항에서 섬진강을 거슬러 오르기 위하여 보다 작은 황포돛배로 바꿔 타야만 한다. 그러는 틈새로 항구는 여전히 부산하다. 지리산 인근의 하동, 남원, 구례, 함양 등지의 농산물과 임산물, 산더미처럼 쌓인 장작들이 부산항으로 출발하는 천룡호, 팔중호, 복중호 등에 선적되고 또 선적을 기다리는 동안 사람소리, 갈매기 소리에 파묻힌 노량노을은 장군께서 전사한 당시의 노을을 닮아만 간다.

 

1598년 11월 29일, “늦가을도 차게 저문” 이 바다에서 온몸으로 원수들과 맞선 장군은 노량의 노을처럼 스러졌으나, 삶에 허덕거리고 질척대는 이 포구의 사람들은 따뜻한 시선 한 번 줄 여유들이 없다. 간고등어, 간갈치, 미역, 다시마, 굴, 홍합, 문어 등이 그들의 등을 떠밀어 길을 재촉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80리, 마침내 밀물에 몸을 실은 배는 북서풍이 이는 늦가을 강을 거슬러 오른다. 활짝 펼친 돛 덕분에 사공들은 한결 수월하다. 아마 더 저물어서야 하동포구(解良港)에 닿을 것이다. 조용하던 포구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한 척의 배가 온 동네를 바쁘게 만든다. 주막은 주막대로 식은 술국을 데우기 위해 장작불을 다시 지피고 여관은 여관대로 구들을 덥혀 긴 항해로 지쳐버린 뱃사람들을 맞이한다. 아연 활기가 넘쳐나는 하동포구다. 물때가 맞는다면 이 배는 갈 길을 서둘러 화개장터로 마저 오를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다음 물때를 기다려야할 것이다. 사릿물처럼 풍성한 포구다. 포구는 질척대야만 한다. 왁자한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하동에서 부산, 육로로는 하루 만에 도착하지 못했던 그 시절, 아침 일찍 첫 배를 타면 그날 저물더라도 도착했던 부산여정.  이제 그 해운은 막히고 육로는 발달하여 2시간 남짓이면 도달하는 거리다. 비록 수송의 수단도 다르고 장세는 쇠퇴하였으나 부산, 통영, 삼천포나 목포 여수를 통해 실려 오는 수산물은 여전하다. 나는 지금 그 장배들의 마지막 기항지였던 옛 화개나루에 앉아 있다. 어느 수산물 시장을 통해서 이곳까지 왔는지 모르지만 내가 주문한 해물짬봉 그릇 속엔 여전히 수북한 해물들, 홍합 몇 점, 문어 몇 점, 오징어 몇 토막에 전복 두어 점까지 남해의 냄새가 넘치고 넘쳐난다. 분명 누군가의 수고로움과 남해 푸른 주름까지를 닮아 있는 그것들은 지리산이 키운 석이버섯, 팽이버섯 등과 양파에 대파도 얹혀 있다. 참 잘 버무린 조합이다. 바다와 강의 연결이 더디고 더뎠다면 육로의 수송은 빨라 싱싱하다. 기별이 참 빠르다. 흑산도에서 보낸 정약전의 편지처럼 반갑다. 소소한 것들에게 지어준 이름들이 이렇듯 몇 수백 년을 넘어 또 넘어 불리울 것이다. 홍합 한 입에 정약전의 흑산도 여인이 생각난다. 정약전을 위해 수시로 물질을 해 잡아 올린  문어 한 점에서 다시금 돋는 그의 사랑이 생각난다. 희망과 절망을 읽어낸다.  잘 버무려진 산과 들과 바다의 조합에서 나는 맛깔스런 맛들이 그의 절망의 끝에서 우려낸 맛일 것도 같아 국물을 넘기기가 좀체 어렵다. 소태 같은 눈물과 피멍으로 울혈이 돋은 저 징그러운 산도 이 국물의 맛을 닮아 있다. 강을 따라 흐르던 뗏목들이 하동포구에 닿아서야 비로소 배에 실리고 선적을 마친 팔중호나 복중호는 긴 뱃고동을 남긴 채 부산으로 떠나버리는 그 허전한 항구의 맛을 닮아 있다.

 

이제 하동포구나 화개나루는 운송의 길을 잃었다. 바다로 열려 있는 길은 오직 물의 길이다. 지리산 협곡을 누비던 섬진강, 그 유순한 흐름이 다하는 오백 리 끝에 남해는 놓여 있다. 그 남해를 통해 사람과 소식과 온갖 해산물을 싣고 만선의 깃발 같은 황포돛을 펄럭이며 입항하던 배도 이제는 없다. 다만 물의 길이 남아 있을 뿐이다. 비린내를 잃어버린 항구는 존재의 가치가 없다. 배의 정박을 허용하지 않는 항구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더디기는 했으나 사람을 불러 모으고 바다를 불러들였던 포구와 나루는 그곳에 닺을 내리던 배들과 함께 사라지고 길은 지워졌다. 배들의 길은 사라지고 없어졌으나 그 물 속의 길은 여전히 살아 꿈틀댄다. 예나 지금이나 이어지고 있는 그 여전한 생명의 길은 시퍼렇게 살아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내수면어업연구소에서 인공적으로 부화시킨 연어를 비롯해 해마다 이 강을 거슬러 오르는 은어떼와 참게, 숭어, 향어들의 길로 남아 있다. 거슬러 오르고 순하게내리는 길이다. 바다에서 강으로 다시 강에서 바다로 이어지고 있다. 사람이 바다의 길을 열어 사람과 해산물들을 실어 나르고 또는 산이나 들의 사람과 문화를 실어 바다의 길 위에서 풍성했던 그 길은, 수송수단의 발전과 잘 뚫린 도로망으로 인해 쇠잔해져만 간다. 이제 뱃길은 노량포구에서 끝나 있다. 그러나 저 먼 바다 오오츠크해를 돌아 다시 섬진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떼의 길로도 열려 있고 은어, 향어, 참게, 장어들의 길로도 활짝 열려 있다. 이른 가을부터 초겨울까지 그들의 장엄한 시신들은 섬진강가를 뒤덮는다. 산란을 끝낸 그들의 자연사한 모습들이 그 강가엔 수두룩하다. 나는 그들의 주검 앞에서 섬진강의 길이 이대로 남아 있기를 빌고 또 빌어본다. 저들이 다시금 되짚어가지 못하는 길은 항로가 폐쇄된 배들을 닮았더라도 그들의 몸에서 생명을 얻은 새끼들은 그들 어미가 떠났던 그 길을 되짚어 갈 것이다. 아마 내년 초봄에는 이 강을 떠날 것이다. 포구와 장터가 인간을 먹이기 위해 흥청거렸다면 지금도 유효한 저 물 속의 길은 장엄하고도 고귀한 생명의 길일 것이다. 강으로부터 떠나간 그들의 항로는 결코 순탄하거나 수월하지 않으리란 것은 분명하다. 더러는 먹히고 또 더러는 길을 잃겠지. 그러나 그들은 바다의 주름과 대양의 너른 품성을 지니고 다시 돌아 올 것이다. 찬란한 오뉴월의 물너울을 헤치며 힘찬 몸놀림으로 섬진강을 거슬러 오를 것이다. 물론 그 길이 사라지지 않음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바다는 멀다. 한 허리 한 허리를 휘며 흐르는 강의 저 쪽. 이쪽의 시야 너머라 더욱 먼 길, 그 먼 길 위에서 그들의 주어진 임무를 다지고 다져 상처마저도 익혀 돌아올 그들을 즐겁게 기다려 본다. 오늘 섬진강의 노을은 노량의 노을을 닮아 있다. ……………………(하략)……………………

 

□ 최영욱 경남 하동 출생. ≪제3의 문학≫으로 등단
_______________________
자료 출처 : <해양과 문학> 13호

 

 

 

 

 

 

 

 

g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