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소녀의 대화록(조천복)

등록일202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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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소녀(바다의 날)의 대화록

 

2012년 4월의 어느 날, 남녘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갓 군불 땐 방의 온기처럼 제법 따스하다. 그 바람은 남항에 정박해 있는 선박들의 얼굴과 가슴과 궁둥이를 애무한 후, 태종대 자갈밭에서 어떤 아리따운 소녀와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나를 무시하듯 흘깃 쳐다보고는 부리나케 봉래산으로 달아나 버렸다.

소녀의 이름은 ‘바다의 날’, 그녀는 17세의 나이긴 해도 이미 속이 꽉 찬 성숙한 여인이 되어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가족의 족보와 함께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공개되지 않았던 몇 가지 사실을 들려주었다.

그녀는 집요하게 집적거리는 바람의 유혹에도 흔들리는 기색도 없이, 장황한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던 것이다.

“네가 태어난 날은 1995년 5월 31일이지만, 그 다음해인 1996년 5월에는 네 동생인 해양수산부가 탄생했던 거야. 많은 사람들이 축하했었지. 세계도 부러워한 거였지, 선각이었다고. 그 날이야말로 우리의 해양역사에 장보고 할아버지가 청해진을 설치한 큰 업적 다음으로 기록되는 역사적인 날이었지. 그러나 그는 불과 12살의 나이에 이명박정권이 시작되던 2008년 2월, 애석하게도 요절한 거야. 작은 정부, 효율성을 강조한 MB정부의 일방적인 처사로 말이야.”

나는 태종대를 휘휘 돌아 자갈마당을 훑어가던 바닷바람을 붙잡아 갈증 난 목을 축인 후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너의 선조할아버지인 장보고님께서 흥덕왕 3년인 서기 828년, 청해진을 설치한 후 우리나라의 해양산업은 세계최강이 되었지. 그 당시 세계문명은 지중해 연안, 중동지역과 동중국의 3대 지역이었고, 이에 따른 해상교역 역시 3분 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경쟁력이 컸던 종합해양산업이 장보고에 의해서 운영되었었지. 물류산업과 무역과 조선업이었고 그 모항이 청해진이었지. 당시 청해진이야말로 해양산업의 메카였던 셈이지. 사실, 장보고님이 저 방대한 동중국해를 양손에 움켜쥐고 있었던 게야, 정말 막강했었지. 이를 시기한 신라의 중앙정부가 해양가문의 권력침탈을 없애고 왕권의 강화를 위해 암살자 ‘염장’을 파견했었지. 그는 문성왕 13년 서기 846년에 너희 할아버지를 암살한 거야, 그로부터 천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동중국해의 제해권은 영원히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았고 고려 중기 이후로는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려 고려가 망했고, 지금은 중국어선의 서․남해 어장침탈에 시달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어도’까지 잃게 될 지경이란 말이야!”

나는 긴 이야기를 뱉고 난 후 그녀를 쳐다보며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지난 가을의 그 시원하고 기품 가득한 미소 대신 싸늘하고 냉소적인 웃음과 몸짓으로 자기를 감싸고 있던 봄바람을 밀어내며 아무 말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18년 전의 겨울과 작년의 겨울을 태종대의 푸른 바닷거울에 비춰보았다.

 

1994년 12월 무던히도 추웠던 그 해 겨울, 용산의 Y음식점에서 집권여당인 민자당 김윤환 대표와 정책위의장 이상득의원과 한국노총 박종근 위원장, 전국선원노조연맹 위원장이었던 나, 이렇게 4사람이 만난 것이었다. 중요 현안은 문민정부의 공약사항인 ‘바다의 날’ 제정과 ‘해양수산부 설치’에 관한 것이었다.

그 전으로 거슬려 올라가면, 1992년 민자당은 대통령 선거의 공약으로, 바다의 날 제정과 해양수산부 설치를 국민에게 약속한 것이었다.

YS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난 1993년 3월 9일, 대통령이 고통분담과 임금인상 자제를 설득하기 위해 한국노총산하의 19개 산별노조연맹 위원장을 초청한 청와대의 오찬이 있었다.

그 석상에서, 나는 민자당 공약의 실천을 대통령에게 건의했던 것이다.

그 당시의 정국상황에 비춰보면, YS는 집권 초기 신한국건설을 위해 노동자들의 협조가 필요했었고, 또한 사회적 합의를 위해 상호 고통분담을 주고받는 자제와 설득의 자리였기에, YS는 공약의 이행 측면에서나 노총의 건의를 들어주는 명분상 그 건의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잘 검토할 것이라고 희망적인 답변을 한 것이었다. 오찬이 끝나고 나올 때 박관용 비서실장에게도 다시 한 번 더 이 문제를 부탁했었고 그 분도 고개를 끄덕인 것으로 기억된다.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그 해 7월 6일, 또 다시 대통령과 산별연맹 위원장과의 청와대 만찬이 있었다. 그 때도 다시 한 번 더 그 공약의 실천을 환기하고 촉구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바다의 날 제정과 해양수산부에 신설에 관해서는 큰 진척이 없었다. 정부 조직의 약점은 창조적 업무의 결과에 대한 후유증을 두려워하는 몸살임이다. 그런 연유로 정부 내에서도 상호 이해관계가 얽힌 순․역기능이 대두되면서 총대를 메는 사람은 없었고, 차일피일 세월만 가는 것이 소문으로 전해졌다.

영국의 역사정치학자인 ‘파킨슨’의 그 유명한 제1법칙이 가장 잘 적용되는 곳이 공무원 사회다. 또한 어느 부서가 자기 관할의 업무를 늘리기는 쉽게 동의를 하지만, 반대로 기존에 있던 것을 내 주거나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관료사회의 전형적인 부처 이기주의인 것이다.

그 당시 해양수산에 관한 제반 행정은 국무총리실, 건교부, 내무부, 통상산업부, 농림수산부, 과기처, 환경부 등의 7개 실․부와 해운항만청, 수산청, 해양경찰청 등의 3개청과 해양개발위원회 등으로 분리 되어 있었고, 기념일조차 해운과 수산, 어민과 조선 및 해양환경과 관광 등으로 각개 약진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운항만청만 ‘바다의 날’ 제정과 ‘해양수산부’ 신설을 위해 동분서주했을 뿐, 그 중에서도 특히 항만청의 신길웅(1999. 12월 56세로 서거) 기획관리관․항무국장의 의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단했었다. 반면 다른 부와 청에서는 적극성 대신에 오히려 반대가 많았던 것으로 들려지는 것이었다.

나는 자주 신길웅 국장과 만났었다. 당시 그 문제에 관한 논리와 이론에는 그 분만한 실력과 의욕을 가진 사람을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항만청 입장에서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다들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차일피일 미루는 형태이니 해상관련 단체나 노동조합이 합심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각계에 관심이 필요한 때입니다.”하고 은근히 충격요법을 주문했던 것이다.

그 후, 나는 바다의 날을 제정코자하는 각국의 추이와, 유엔 해양법 발효(1994. 11)움직임에 대한 범정부의 대처를 호소하기 위해 국무총리실의 제2행정조정관실과 해양개발위원회를 방문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로 부터의 대답인 즉, ‘그 당위성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현재로서는 부처의 반대가 많아서’ 라는 애매한 투의 떠넘기는 말을 들어야만 했다.

그 변명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정부가 서독 파견 광부와 간호사들에게는 엄청난 관심을 표하면서도, 그 보다 더 많은 몇 십 억불의 외화를 획득하는 선원들에게는 기념일조차 하나 없이 푸대접한다고 볼 멘 소리로 항의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무심하기까지 한 정부의 방관이 있었던 반면, 가톨릭부산교구에서는 한국해양사목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1991년 어부로서 12사도 중 제일 먼저 순교한 ‘성야고보 축일’인 <7월 25일>을 선원의 날로 정해 놓고, 국내외의 선원들을 위로하며 그 노고를 치하하는 행사를 매년 개최하였으며, 또한 1994년에도 제4년차 선원의 날을 성대하게 지냈던 것이다.(2012년은 21년차)

나는 이 행사의 진행사항을 사진과 함께 설명하며 왜 정부는 못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대라고 항의했던 것이다.

그 당시 해양행정을 조정했던 해양개발위원회는, 해양개발기본법에 의해 위원장에 국무총리, 위원에는 국무위원들이 겸임하고 있었고 실무위원회 위원장에는 과학기술처차관이 맡아있었지만, 바다의 날 제정과 해양수산부의 설치에 대해서는 큰 의욕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로 방치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뭔가 행동이 필요하던 때였다. 유엔 해양법 발효를 앞둔 1994년 10월 3일, 전국선원노조연맹 위원장이었던 나는 한국해양대학교 교정에서 제1회 바다축제를 개최하였다. 또한 전국선원노동조합연맹과 산하 53개 전국연안의 해․수산노동조합이 주관하여 한국선주협회, 한국해운조합, 수협중앙회, 한국원양어업협회, 대형선망수협, 대형기선저인망수협, 근해안강망수협, 한국해기사협회, 한국선박통신사협회, 한국선박대리점협회, 한국선박관리업협회, 한국수산회, 한국해양소년단연맹과 한국해양대, 부산수산대학 등 전국의 16개 직능단체와 학교가 포함된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바다의 날 제정과 해양수산부 신설을 위한 1천만인 서명운동을 개시하였던 것이다. 당연히 그 운동의 선언문과 대통령에게 드리는 청원서도 함께 청와대에 보낸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이같은 사실은 바다에 관한 종합잡지 해양한국 1994년 11월호(제1회 바다축제 열려, 바다의 날 제정을 위한 1천만인 서명 운동 점화)에 잘 게재되어 있다.

 

17년 전 그 날 용산의 그 만남은 1천만인 서명운동과 대통령에게 드리는 건의문이 발단이 되어, 다시 한 번 바다의 날 제정과 해양수산부 신설에 대한 공약을 민자당의 당론으로 채택해 줄 것을 촉구하기 위해 1994년 12월에 만난 것이다.

그 때는 일본(1994. 4월 제정)이 매년 7월 20일을 바다의 날로 지정한 후였으며 또한, 유엔해양법이 발효되었기에 그 영향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그 날 폭탄주를 단숨에 들이키며 허주(김윤환)는 흔쾌하게 바다의 날 제정과 해양수산부의 신설에 동의하고 약속했던 것이다.

지금은 지는 해가 된 이상득 정책위의장도 약속했음은 물론이다.

그 후에 그 건은 민자당의 당론으로 확정되었고, 그 이듬해(1995. 5. 31)에 ‘바다의 날’이 제정되었고, 또 그 다음해인 1996년 5월 31일 제2회 바다의 날에 ‘해양수산부’ 신설(1996. 8월)의 깜짝 발표가 이뤄진 것이다.

그렇게 바다의 날과 해양수산부 탄생은 많은 사람들의 열정과 노력으로, 나는 특히 거제섬 출신인 YS의 해양에 대한 선천적인 체감으로 울어난 결단과 고 신길웅국장의 행정적인 노력에 더하여, 또한 많은 해양․수산계 종사자들의 협력으로 이루어낸 역사적 쾌거로 생각된다.

그로부터 12년, 천 년의 역사에 비하면 12년은 너무나 짧다. 그 기간에 어떤 족적을 남길 수 있단 말인가! 모든 해양․수산인의 현실과 희망이었던 그 ‘해양수산부’는 산파역이었던 이상득의원의 동생인 MB정부가 나서는 2008년 2월, 대통령인수위원회의 결정으로 12세의 나이에 갑자기 요절하고 만 것이다.

나는 해풍에 젖어진 한기를 느끼며 그녀에게 이병주씨의 이 말을 들먹였다.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데……”

그래도 소녀는 말이 없었다. 아예 말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또 덧붙였다. 이제는 바다 건너 영국의 ‘E.H 카아’의 말을 인용하며, “역사란 끊임없이 움직이는 과정이며 인간의 역사 또한 언제나 변화는 것이지만, 그것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변화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사건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며 재구성하는 것은 다만 현재일 뿐이라고. 또한 그것은 현재와 과거의 징검다리가 되어 미래를 향한 지침이 되기도 한다.”고 중언부언했던 것이다.

나의 두서없는 이야기에도 그녀는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태종대 자갈밭에서 가장 매끄러운 몽돌을 찾아내어 냅다 남해바다를 향해 그 몽돌을 후려 차버리는 것이었다. 봄바람에 부드럽게 여울지던 바다는, 그 사이 하얀 거품을 물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바람이 달아나고 있는 봉래산을 향해 위를 쳐다보며 말했다.

“슬기로운 사람은 듣고도 알지요. 똑똑한 사람은 보면 알아채지요. 그러나 우둔한 사람은 당해봐야 아는 것입니다. 동생이 요절할 때는 방관하던 사람들이 요새는 동생을 부활시켜 달라고 요란을 떨고 있네요. 특히 부산사람들 말이에요. 아무튼 고맙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예언 한마디, 장보고 할아버지가 당했던 흥망의 결과와 그 이후의 역사를 보고서도, 더구나 FTA보다 우선적으로 숙고해야하는 해양역사의 과오를 자각하지 못하는 쇄국의 민족은 다시 그 역사를 반복하는 비극적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5월 31일에 다시 만나요!” …………………(하략)…………………

 

□ 조천복, 해양칼럼집 󰡔일어서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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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해양과 문학> 15, 16호 합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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