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라는 수의를 입고 바다에 묻힌 써 존 호킨스(김성준) -바다와 인물 1

등록일202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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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인물 1

 

바다라는 수의를 입고 바다에 묻힌 써 존 호킨스

 

플리머스 상인의 아들 존 호킨스

 

써 존 호킨스는 엘리자베스 시대를 풍미했던 여러 해양 인물 중 가장 탁월했던 해양 지휘관이자, 노예상인, 해군 개혁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다양한 경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상인으로 시작하여 노예무역으로 입신한 뒤 해군 행정가로서 엘리자베스 해군을 개혁하여, 영국이 스페인 무적함대에 맞서 승리를 거두게 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영국 최초의 노예상인이라는 명예스럽지 못한 수식어가 덧붙어 있다.
존 호킨스(1532~1595)는 1532년 영국 플리머스의 상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유력 가문이었지만, 그는 정규 교육을 일찍 마치고 항해술을 배운 뒤 아버지의 배에 승선하는 것으로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호킨스의 초창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1558~59년은 존 호킨스에게는 중요한 해였다. 1558년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한 해였고, 1559년은 존 호킨스가 영국 해군의 재무관이자 갓 출범한 런던회사의 주주인 벤자민 곤슨의 딸인 캐더린과 결혼한 해이기 때문이다. 런던의 유력가와 혼맥을 맺음으로써, 호킨스는 카나리아 제도와 기네아 무역에 관심을 가진 런던의 유력 상인 그룹에 합류할 수 있었다.

 

노예무역과 호킨스의 1차 항해

 

당시 신대륙에 대한 합법적 통치권을 보유하고 있던 스페인은, 신대륙의 자국민과의 거래를 엄격하게 통제하여 허가받은 자 이외에는 할 수 없도록 했다. 일찍부터 자신의 배를 이용하여 무역을 해 왔던 존 호킨스는, 허가 무역 이외에 다른 경로를 통해 신대륙의 스페인인들과 무역을 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알아챘다.
존 호킨스가 제안한 모험사업은 아프리카의 기네아 해안에서 흑인들을 잡아다 서인도제도의 스페인 식민지에 판다는 것이었다. 호킨스의 제안에 장인인 곤슨은 물론, 런던 유력가들이 돈을 투자하였다. 존 호킨스는 120톤급 솔로몬호, 100톤급 스왈로우호, 40톤급 요너스호 등 3척의 배와 선원 100명을 태우고, 자신은 가장 큰 배인 솔로몬 호에 승선하였다. 1582년 10월, 플리머스에서 출항한 선단은 테네리페에 기항하여 청수와 신선한 식료품을 수급하고, 기네아 연안의 시에라 리온 연안에서 타가린 족 300명을 확보하였다. 서인도제도에서 팔 노예를 세 척의 배에 분승시킨 선단은, 서인도 제도의 에스파뇰라 섬에 도착하여 흑인 노예와 영국 상품을 처분하였다. 호킨스는 요너스 호와 스왈로우 호에 가죽을 실어 스페인으로 보내고, 가죽, 생강, 설탕, 귀금속 등을 솔로몬 호에 싣고 1563년 9월 플리머스로 귀환하였다.
호킨스가 2척을 스페인으로 보낸 것은 스페인에 가죽에 대한 수요가 크다는 얘기를 에스파뇰라에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호킨스는 귀로에 대양 상에서 포르투갈 배 2척을 나포하였다. 이는 분명 해적 행위였지만, 그는 노예무역뿐만 아니라 해적 행위 또한 이익이 많은 사업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스페인 식민지와의 불법 무역을 금지한 스페인 국왕의 심기를 건드렸을 뿐이다. 호킨스의 1차 항해는 경제적인 면에서 실패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호킨스가 서인도제도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었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었다.

 

호킨스의 2차 항해, 엘리자베스 여왕도 참여하다

 

호킨스는 스페인으로 보낸 가죽이 압수되자 이를 반환받으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로써 호킨스는 더 강력한 후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것은 여왕을 직접 사업에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호킨스는 1차 항해의 성공을 바탕으로 런던의 유력 인사들로부터 투자를 유치하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소유선인 지저스 어브 뤼베크호를 용선함으로써 여왕을 끌어들이는 데도 성공하였다.
존 호킨스는 4척에 170여명의 선원을 분승시켜 1564년 10월 18일 플리머스 항을 출항하였다. 호킨스는 지저스 어브 뤼베크 호를 기함으로 사용하였다. 출항 후 10월 21일까지는 바람이 양호했으나, 21일 저녁 9시부터 북동풍이 강하게 불어 23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결국 선단은 모두 흩어지게 되어, 호킨스는 하는 수 없이 스페인의 페롤에 피항하였다. 10월 30일 호킨스는 선단을 이끌고 페롤을 출항하여 기네아로 항해하였다. 호킨스는 기네아 연안에서 약 400여 명의 흑인을 끌어 모았다. 그 동안 흑인들과의 싸움으로 선원 중 7명이 죽고 27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흑인들을 충분히 확보한 호킨스는 1565년 1월 29일 기네아 연안을 출항하여 대서양을 횡단하였다. 대서양을 횡단하는 동안 바람이 없어 지루한 항해가 18일 이상 계속된 끝에, 마침내 3월 9일에야 서인도에 도착하였다. 호킨스 선단은 3월부터 5월까지 서인도 제도를 전전하며, 스페인 관리들의 갖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리오 데 라 아차라는 작은 항구에서 노예들을 팔 수 있었다. 호킨스는 가죽과 기타 물품으로 선창을 가득 채우고, 1565년 5월 31일 에스파뇰라에서 가죽과 설탕 등을 추가로 싣기 위해 스페니쉬 메인을 떠나 9월 20일 콘월의 패드스토우 항에 귀환하였다. 2차 항해의 인적 손실은 170명 중 20명에 불과했는데, 이는 모험항해의 성격이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례적으로 낮은 사망률이었다. 수익성 면에서도 지저스 어브 뤼베크 호의 수리비 500 파운드를 지출하고도 60%의 수익률을 기록하였다.
스페인도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다. 영국 주재 스페인 대사는 11월 펠리페 2세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저는 호킨스가 폐하가 금지한 무역을 행하였으니 그를 처벌해야 한다고 여왕에게 아뢰었습니다.” 이 서한은 곧 효과를 나타냈다. 왜냐하면 호킨스가 차항을 준비하고 있던 차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름으로 스페인 국왕이 금지한 지역으로의 항해를 금하고, 그 보증금으로 500 파운드를 납부하라는 세실 경의 서한이 호킨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호킨스는 보증금을 납부하고, 자신은 항해에 나서지 않았지만, 모험 항해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실패로 끝난 3차 항해

 

3차 항해에는 그의 사촌 동생인 드레이크도 동참하였다. 3차 항해 선단은 6척으로 이루어졌다. 기함은 지저스 어브 뤼베크 호였고, 호킨스가 사령관으로, 로버트 버렛이 선장으로 각각 지휘를 맡았는데, 총 180명의 선원이 승선하였다. 선단은 1567년 11월 중순부터 1568년 1월 중순까지 기네아 연안에서 흑인노예를 확보하려고 시도하였으나, 겨우 150여명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호킨스는 엘미나 해안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흑인 한 명이 찾아와 다른 부족이 자기 부족을 공격한다고 전하면서 도움을 요청해 왔다. 이에 호킨스는 1월 15일 120명의 대원을 상륙시켰다. 그러나 8천명에 달하는 상대 부족이 잘 방어하여, 오히려 호킨스 측에서 60명이 죽고 40명이 크게 다쳤다. 호킨스는 직접 공격에 가담하여 마을을 육상과 해상에서 양동 작전을 펼쳐 흑인 250명을 사로잡았다. 이제 400여 명의 흑인을 확보한 호킨스는 이 정도로도 서인도에서 충분한 이익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1568년 2월 3일 기네아 연안을 출항하였다.
호킨스는 리오 데 라 아차로 갔다. 그러나 이곳의 총독이 노예 거래는 커녕 식수와 식료품을 보급받는 것조차 허가하지 않았다. 호킨스는 결단을 내려 200명을 동원하여 성벽을 부수고 성안으로 진입하였으나, 스페인인들이 모두 달아나고 없어 인명 피해는 없었다. 이곳의 스페인인들은 한 밤중에 은밀하게 호킨스로부터 흑인 200명을 사갔다. 이때가 대략 7월 초순이었는데, 교역할만한 상품도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다음으로 호킨스가 들른 곳은 오늘날의 콜럼비아 지역인 산타 마르타였다. 이 마을에서 호킨스는 흑인 110명을 팔고, 마지막으로 카르타헤나에 들렀다. 그러나 교역할만한 물건이나 흑인도 거의 없었던 데다가 총독마저 고지식하여 교역을 허락하지 않아, 8월 8일 평화적으로 카르타헤나를 출항하였다. 당시 지저스 어브 뤼베크 호에는 교역으로 벌어들인 약 1만 5천 파운드 상당의 금과 진주, 은 등이 실려 있었다.
호킨스 선단은 8월 12일 플로리다 해안 부근에서 악천후와 조우하여 하는 수 없이 9월 15일 멕시코 만의 상 후앙 데 울루아(현재의 베라 크루즈)로 피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9월 17일에는 스페인 선단 13 척이 상 후앙 데 울루아로 입항하였다. 호킨스는 스페인 총독과 협상을 벌였지만, 협상은 결렬되었다. 결국 스페인 측의 기습 공격으로 해전이 벌어졌고, 호킨스 측도 격렬하게 맞대응하였다. 호킨스 측의 엔젤 호와 스왈로우 호는 침몰하였고, 지저스 어브 뤼베크 호도 피해가 커 포기해야 했다. 상 후앙 데 울루아 해전은 호킨스의 노예 무역의 종말을 의미했고, 이후 영국과 스페인 간에 오랜 분쟁의 씨앗이 되어 결국 1588년 전쟁으로 귀결되었다. 1568년 9월, 이제 호킨스에게는 심하게 부서진 미니언 호, 그리고 200명의 선원들만이 남아 있었다. 멕시코만을 출항했던 100여명의 선원 가운데 생환한 사람은 불과 15명뿐이었다.
1569년 1월 20일 드레이크가 플리머스로 귀환했고, 5일 뒤 호킨스도 무사히 귀환하였다. 호킨스는 런던에서 지난 항해의 잔무를 처리하는 한편, 1569년 여름에는 위그노 교도를 구하기 위해 라 로쉘로 파견되는 선단을 지휘하기도 했다. 60여 척으로 구성된 이 선단 중 8 척은 그의 부친인 윌리엄 호킨스가 준비한 것이었다.

 


영국 해군을 개혁하다

 

호킨스의 장인인 곤슨은 해군 재무관에 임명되어 1578년 사망시까지 재임하였다. 호킨스는 1577년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공동 해군 재무관에 임명되었다. 호킨스가 해군 재무관에 임명됨으로써 영국 해군사상 처음으로 실전 항해술과 해전을 경험한, 최초의 그리고 가장 뛰어난 뱃사람이 재무관에 임명된 셈이었다. 호킨스는 정박 중인 왕실 소유선을 유지하는 데 해마다 6천 파운드가 소요되고 있으나 실제는 4천 파운드면 충분하고, 배 한 척을 건조하는 데 2천 200파운드면 충분한데도 여왕은 4천 파운드를 지출했다고 보고하였다.
호킨스는 왕실의 해군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우선 전함의 선형을 대폭 개량하였다. 과거 흘수가 깊고 너비가 넓은 해상 성채와 같은 1천톤급 전함 대신, 높은 포탑과 선수루를 갖춘 3~4백톤급 신형 전함을 건조하였다.  호킨스는 또한 왕실 조선소에 대한 대대적인 수리를 하는 한편, 새로 짓기도 했다. 그는 또한 체인 펌프를 개발하여 과거의 수동 펌프를 대신하게 했고, 캡스턴을 개발하여 닻을 훨씬 빨리 감을 수 있게 했다. 호킨스는 또한 선원들의 급료도 인상했다. 해군위원회의 위원장이 된 뒤, 호킨스는 1585년 선원들의 월급을 6실링 8펜스에서 11실링으로 인상하였다. 이와 같은 개혁을 깊이 신뢰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호킨스를 해군 통제관으로 임명하였다.
이와 같은 정력적인 개혁안에 대해 불평불만의 소리가 높아졌고, 호킨스에 대한 다양한 루머들이 떠돌았다. 결국 추밀원은 1583년 조사위원회를 꾸려 해군의 현재 상태를 조사하도록 결정했다. 윌리엄 세실, 해군경, 채벌레인 경, 프란시스 윌징엄, 대법관 등 5인으로 조사위원회와 이들을 도울 부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부조사위원회에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마틴 프로비셔, 월터 롤리, 풀크 그렌빌 등 당대의 저명한 선장들이 참여하였다. 조사위원회에는 호킨스가 해군 행정을 맡은 1579년 이후에 해군에서 이루어졌던 모든 일에 대해 조사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그러나 사실 이 조사위원회의 본래 목적은 호킨스를 투옥시키려는 데 있었다. 하지만 조사위원회는 모든 면에서 해군은 효율적인 상태에 있으며, 호킨스가 재무관 직을 유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강력한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

 

존 호킨스의 말년 생애는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해전과 서인도제도로의 마지막 항해로 요약할 수 있다. 무적함대는 펠리페 2세가 심혈을 기울여 잉글랜드인에게 타격을 가할 회심의 반격 카드였지만, 그 출발부터 실패의 전조가 드리워져 있었다. 1588년 2월 초 스페인의 함대 사령관인 알론조 데 바잔 후작은 무적함대가 출항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펠리페 2세에게 보고하고, 강한 북풍이 거세어지는 3월 말 이전에 출항하기를 재촉하였다. 그러나 그의 예상대로 강한 북풍이 불어 출항이 연기되었다. 더 결정적이었던 것은 출항을 기다리고 도중인 1588년 1월 30일 함대사령관인 바잔 후작이 73세를 일기로 카디스에서 사망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1571년 기독교 연합함대를 이끌어 터키 함대를 격파한 레판토 해전의 영웅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펠리페 2세가 바잔 후작의 후임으로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을 임명하였다. 당시 38세에 불과했던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조용한 전원 생활을 좋아하는 귀족으로 해상 경험이라고는 없었다. 따라서 그는 1588년 2월 16일, “이와 같은 대규모의 중요한 원정을 지휘할 사람은 항해와 해전에 대해 정통해야 하지만, 저는 이에 대해 아무런 지식과 경험이 없다”며 고사하였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사직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돈 디에고와 돈 페드로 데 발데스라는 유능한 해군 제독을 파견하고, 영불해협을 통과한 뒤 파르마 공작과 합류하게 되면 사령관직을 파르마 공작에게 맡기는 것으로 하여 시도니아 공작을 안심시켰다. 결국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함대 사령관직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무적 함대는 함대 150척, 선원 8천명, 보병 1만 9천명, 지휘관 3천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몇 차례 출항이 연기된 뒤 1588년 7월 11일 무적 함대가 출항하여 19일에 영불해협에 진입하였다.
잉글랜드는 스페인의 침공에 대비하여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함대는 우샨 군도와 쉴리 군도 사이에서 산개하여 대항하도록 했다. 함대 사령관은 로드 하워드가 맡아 가운데를 맡고, 하워드와 프랑스 해안 사이는 부제독인 프란시스 드레이크가, 그리고 하워드와 쉴리 제도 사이는 후제독인 존 호킨스가 맡았다. 왕실 소유의 대형선 11척과 보급선 8척, 런던 시가 제공한 대형선 16척과 보급선 4척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밑에 로드 찰스 하워드가 40여 척의 갈레온 선을 지휘하였으며, 드레이크는 60척을 지휘하였다.
스페인의 무적함대의 공격은 잉글랜드의 철저한 대비와 뛰어난 뱃사람들, 그리고 악천후가 어울러져 실패로 귀결되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 150척, 3만 명 중 1만여 명, 60척만 스페인으로 귀환하였다. 이로써 무적 함대란 이름이 허명임이 입증되었다. 원래 무적 함대란 명칭은 영국인들이 붙여준 이름이었는데, 원래 명칭은 ‘위대한 행운의 함대’(Grande y Felicisima Armada)였다.
승리한 잉글랜드 함대의 상황도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여왕은 8월 12일 승전을 선언하였지만, 참전한 선원들에게 보상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호킨스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지독한 재정정책 때문에 해군성의 예산을 맞추는 데 사비를 털어 넣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또한 드레이크와 함께 부상 선원들을 위한 자선단체인 체스트 어브 채덤(Chest of Chatham)을 설립하였는데, 이곳은 후에 그리니치 병원기금의 모태가 되었다. 호킨스는 이에 그치지 않고 채덤의 병 들은 선원과 대목 10명을 수용하기 위해 1594년 써 존 호킨스 병원을 직접 설립하기도 했는데, 이 병원은 현존하고 있다.

 


스페인 보물선 사략 활동

 

무적 함대의 퇴각 후에도 잉글랜드의 최대 현안은 펠리페 2세가 침공을 재개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였다. 호킨스는 스페인 항구에 대한 항구적인 봉쇄작전을 구상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스페인과 아조레스 제도 사이에서의 소규모 사략 활동을 선호했다.
1592년 잉글랜드에 ‘마드레 데 디오스’호 소동이 발생했다. 존 버지 선장이 아조레스 제도에서 스페인 보물선 마드레 데 디오스를 나포하였는데, 그 화물 가치만 오늘날의 가치로 5백만파운드 이상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592년 9월 초 나포선이 다트머스에 입항했을 당시에는 선원들이 상당량을 약탈한 상태였다. 이에 왕실에서는 타워에 수감 중이던 월터 롤리를 파견하였다. 롤리는 선원들로부터 약탈품을 반환받는 데 성공하였다. 이 원정에 호킨스는 데인티(Dainty)호를 파견하였는데, 나포 활동 중 데인티호가 심하게 파손된 채 귀환하였다. 호킨스를 비롯한 투자자들은 엘리자베스 여왕과의 지루한 협상 끝에 이윤을 분배받기는 했지만, 8만 파운드를 차지한 엘리자베스 여왕이 최대 수혜자였다. 여왕과의 이윤 분배 협상에 진저리가 난 호킨스는 1590년 봄 자신의 삶을 “검소하고, 초라하며, 불운하고 위험한” 것으로 묘사하였다. 1590년부터 1592년까지 호킨스는 왕실에 행정직을 사직하는 것과, 원정 항해를 허락해줄 것을 지속적으로 청원하였다. 결국 1593년 초 호킨스의 사직 요청이 받아들여졌다. 이제 호킨스는 해외 원정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죽음으로 끝난 마지막 항해

 

엘리자베스 여왕은 호킨스와 드레이크를 원정단의 공동 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 호킨스와 드레이크가 당대 유럽 최고의 선장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두 사람은 너무나 달랐다. 드레이크 보다 9살 연상인 호킨스는 사려 깊고 성실한 반면, 드레이크는 신속하고 주저함이라곤 없었다. 원정단은 총 27 척, 2,50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대서양 횡단 항해 도중 원정대는 악천후로 선단이 흩어져 일부가 10월 28일 과들루페에 도착하였다. 10월 30일에 데인티호가 도착하여 프란시스 호가 뒤쳐쳐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였지만, 프란시스 호는 스페인 선단 5 척의 공격을 받아 나포되고 말았다. 드레이크는 당장 스페인 선단을 추격할 것을 주장했지만, 당시 앓아 누워있던 호킨스는 과들루페에 정박하기로 했다. 11월 4일 선단은 과들루페를 출항하여 8일에 버진 아일랜드에 닻을 내렸다. 그 동안 호킨스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갔고, 원정 사업에 관한 모든 일을 드레이크에 일임할 수밖에 없었다. 1595년 11월 12일 포르토 리코에 닻을 내린 직후 호킨스가 63세로 사망하였다. 원정단의 공동 지휘관 중의 한 명이 사망하게 되자 드레이크는 포르토 리코에서 곧 출항하여 스페니쉬 메인, 라 아차, 농브레 데 디오스, 파나마 등을 약탈하였다. 그러나 드레이크 자신 마저 1596년 1월 23일 병으로 앓아눕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드레이크는 채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포르토 벨로에 도착 직전인 1월 27일 선상에서 사망하였다. 이로써 잉글랜드 사상 최대의 원정 사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튜더시대 잉글랜드 뱃사람들의 삶이 다채로웠다면, 호킨스는 그 전형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상인 가문에서 태어나 뱃사람으로 자라, 노예무역으로 입신하여 해군 행정 개혁가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의 다채로운 경력이 무적함대를 격파하는 데 일조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는 주의 깊고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였을 뿐만 아니라, 휘하의 선원들과 동료들을 돕는 일에도 앞장서는 인간미를 갖춘 진정한 의미의 뱃사람이었다. 시인인 리처드 반필드는 호킨스의 비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의 수의는 바다였고, 그의 무덤은 바다였네. 그렇지만 바다는 그의 명성에 비하면 충분치 않았네.”

 

□ 김성준,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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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해양과 문학> 15, 16호 합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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