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가을 해양시 페스티벌 "날짜변경선을 지나면서"

작성자관리자

등록일2021-09-12

조회수51

 

동쪽에서 서쪽으로

날짜변경선을 지나갑니다.

위도를 따라 경도를 따라

밤,

낮,

화물을 싣고

파도를 따라 흘러갑니다.

물새와 함께

별과 함께 흘러갑니다.

 

연료 탱크를 측심해 봅니다.

오늘 하루 54톤을 소모했습니다.

청수 탱크를 측심해 봅니다.

오늘 하루 2톤을 소모했습니다.

나의 마음의 탱크를 측심해 보았습니다.

쓰지 못하여 비우지 못해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보고 싶습니다, 그대여.

 

날짜변경선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나갑니다.

오늘 하루를 지웁니다.

 

 

<감상과 해설> 세상의 많은 발명과 발견이 그렇듯 날짜변경선도 착각의 소산물입니다. 유럽에서는 16세기 초까지만 해도 향료무역을 위하여 인도로 가는 길은 남쪽으로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거쳐 인도양을 횡단해야 했는데, 그러나 이 길은 일찌감치 포르투갈이 항로를 무력으로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의 군인이었던 마젤란이 서쪽으로 아시아로 가는 해도를 획득한 것은 전투에서 다리를 다쳐 군에서 은퇴한 후 포르투갈 궁정을 드나들면서였습니다. 그는 궁정의 비밀 서고에서 1급 비밀에 속하는 어떤 해도에 접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남아메리카 남쪽 어딘가에서 아시아로 가는 태평양 바다에 이르는 바닷길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통로의 이름은 ‘파소’이었습니다. 파소를 알게 된 마젤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항해가로서 해양탐험가로서 마젤란의 꿈은 언제나 인도로 가는 서쪽 항로였습니다. 파소를 가슴에 묻은 마젤란은 깊고 푸른 바다를 열고 나타날 새로운 바다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현실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마젤란은 수년 간 우여곡절 끝에 스페인 궁정의 지원을 받고 서쪽으로 인도를 향하여 출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밀 통로’ 파소는 한갓 허상이었습니다. 남아메리카에 닿은 선대는 남쪽으로 계속 항진했는데 어느 지점에 이르자 육지가 서쪽으로 계속 이어지면서 거대한 만을 형성하고 지형이 해협처럼 보이는 것을 보고 마젤란은 파소임을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해협이 아니라 거대한 강 ‘라플라타 강’이었습니다. 마젤란은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마젤란은 가슴 속 깊이 새겨 두었던 파소를 깔끔하게 지워 없애야만 했습니다. 이후 마젤란만의 꿈, 마젤란만의 길에 동참했던 함장들과 256명의 선원들은 마젤란의 침묵의 항해에도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선내 반란이 일어나고, 괴혈병에 시달리면서 항해는 계속되었습니다. 너무나 오랜 항해로 인해 사람들은 육지에 대한 향수병으로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두 번째로 서쪽으로 흐르는 물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마젤란 해협입니다. 마젤란과 선대는 마침내 태평양으로 들어갔습니다.

 

태, 평, 양. 매우 평화로운 바다란 뜻의 태평양. 그들이 맞딱뜨린 남태평양 바다는 사실 그러합니다. 이곳을 항해한다는 것은 ‘축복’ 그 자체입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무풍지대의 맑은 대기, 바다에는 플랑크톤, 물고기, 해초 등의 온갖 살아 있는 것들의 체향이 습기를 머금고 해면에 풍겨 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아침이면 동녘의 일출, 저녁에는 일몰, 밤에는 하늘에 은하수가 흐르고 유성이 끝없이 지고, 온 천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젤란 선대에게는 이 모든 것이 한갓 음울한 풍경에 불과하고 맙니다. 땅을 발견하여 신선한 야채를 조달해야 하는데 남태평양에 섬들이 적지 않게 있지만 기이하게도 선대는 아무 섬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갑니다. 육지를 보지 못하는 98일간의 항해 중에 많은 사람들이 괴혈병과 영양실조로 죽어갔습니다. 선내에 서식하는 생쥐 한 마리가 은화 1닢으로 거래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말이 없어졌고 눈은 움푹 패였으며, 그 위에 태양은 뜨겁게 갑판을 달구고 있었습니다. 마젤란이 신봉한 쉐너 또는 베하임의 지도에 그려진 태평양은 지금의 지도와 비교하여 너무나 짧았습니다. 이것이 마젤란의 두 번째 착오였습니다. 마젤란은 필리핀의 작은 섬 ‘막탄’에서 사소한 일이 발단이 되어 원주민들과 전투를 하다가 사망합니다.

 

그 후 스페인으로 돌아올 때까지 살아남은 배는 작은 배 빅토리아 호 한 척입니다. 승무원은 출발할 때 총 265명이었는데 18명만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이 중에 문필가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피가페타입니다. 그는 항해 중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항해일지를 썼는데 돌아와서 보니 스페인의 시간이 자신의 항해일지의 시간보다 정확하게 24시간 빠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세계지도에서 날짜변경선의 존재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 준 실증적 사건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화물선들이 태평양의 날짜변경선을 지나갑니다. 그들은 날짜변경선을 지나가면서 대항해시대의 선원들의 넋을 기리며 작은 의식儀式을 갖기도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180°제’라고 부릅니다.

 

■ 심호섭, 작품집 '해류와 노동'에서

 

g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