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가을 해양시 페스티벌 '해류'

작성자관리자

등록일2021-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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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부터 바다에서는

푸른 파도에 씻기며 흐른다는 것, 두려워라

이 무거운 화물, 흘러 뭍에게 전한다는 것도 두려워라

언제부터 짐은 위도 위에 세워졌던가

언제부터 길은 경도를 따라 흘러갔던가

해류에 삶을 맡기지 마라

해류에 시간을 약속하지 마라

바닷길이 열린 이후로

집은 집이 아니었고

사람은 사람이 아니었나니

바람이 불고

파도에 씻기었다

바다는 육지를 그리워했으나

육지는 바다를 사랑하지 않았나니

먹구름이 덮고

천둥이 울었다

가장 가까운 하늘에서

가장 먼 지상을 생각했나니

별빛처럼 반짝이고

별빛처럼 희미해져 간

사람아, 바다의 사람아

 

 

인류가 바다에 나가기 시작한 것은 무척 오래 된 일인 것 같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발견되는 선박의 잔해와 해변에 산재하는 고고학적 흔적들은 인간의 해양 활동이 우리들의 생각보다 훨씬 빨랐고, 어쩌면 바다에서의 삶이 육지에서의 삶보다 오히려 더 왕성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낳게 합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고대에 이미 바이킹은 항해선을 띄워 북유럽의 바다를 항해했습니다. 그들은 유럽의 서안과 지중해와 남으로 아프리카, 그리고 멀리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이집트는 BC 1세기 경 지중해에 당시의 규모로 보아선 초대형 곡물운반선을 띄워 세계 도시인 로마로 식량을 공급했습니다. 그 후 어두운 중세를 거치면서 바다 또한 통행이 뜸해지고 15세기 초가 되어서야 사람들은 다시 멀리 바다로 나가기 시작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대항해시대’라고 부르면서 서구의 서세동점西勢東占에 인류사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런데 인류의 ‘대항해’는 비단 서양에서만 이루어진 것만은 아닙니다. 굳이 중국의 항해자 정화의 대항해가 아니더라도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멀리 바다로 나아가 교역을 행했습니다. 중국 동안東岸의 등주, 천주, 명주, 소주, 광주에서는 대규모의 해상 무역, 그리고 그것을 수행하는 선인船人 집단이 있었고 명주 앞 바다의 신라초가 있는 주산군도에는 대규모 해사海事 집단이 있었습니다. 그것의 주체는 물론 한민족입니다. 고대 한민족의 해상활동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넓고 또 길었습니다. 한민족 해양활동의 상징적 인물인 장보고의 활동은 한민족의 유구한 해양활동사의 시간 속에서는 그저 한 순간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들은 이미 기원전부터 최소한 고려 말까지 동아시아의 바다에 항해선을 띄웠습니다.

 

해상 실크로드를 따라 한반도, 중국 동안, 일본,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더 나아가 인도에까지 분포하는 백제의 담로계 지명의 역사적 실존을 인정한다면 한민족의 해양사는 최소한 세계사의 들러리는 아닐 것입니다. 물론, 이 바다로 중동의 상선들이 중국 동안을 다니면서 교역했고, 일본과 한반도의 남안南岸을 출입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 때문에 이처럼 바다로 바다로 나갔는가요? 그리고 지금도 나가고 있는가요? 교역을 하기 위하여서입니까? 물품을 운송하기 위하여서입니까? 새로운 땅을 얻기 위하여서입니까? 바다 속 동식물을 포획하기 위하여서입니까? 바다 속 자원을 얻기 위하여서입니까? 아름다운 경치를 보기 위하여서입니까? 해면을 달릴 때에 느낄 수 있는 짜릿한 쾌감을 얻기 위하여서입니까?

 

이 모두 그 이유 치고는 결코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다로 나가는 사람들 중에 이런 부류가 있습니다. 방랑열에 휩싸인 사람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아침 일출과 저녁 일몰을 사랑했으며 밤하늘에 빛나는 무수한 별을 하나, 둘, 헤면서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리고 이름 없이 사라져갔습니다.

 

 

■ 심호섭, 작품집 '해류와 노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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