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해양시 감상회 1부 - 주제 : 해양시와 물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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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202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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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 작품 : 홍윤숙의 연작시 ‘바다를 위한 메모’ 3번 ‘바다의 언어’

 감상과 해설ㅣ심호섭(시인, 문예지 ‘해양과 문학’ 주간)

 

 

 

바다의 언어

 

 

우리가 한 바다를 지날 때

한 무리의 구름이 되어

바다 위를 떠갈 때

 

아득히 먼 뱃머리가 갑판 위에서

서로 모를 사람들이

손을 흔든다

더 없이 뜨거운 혈육들처럼 손을 흔든다

 

흔드는 손을 알고 있다

우리가 어느날 바다를 떠나올 때

새벽의 여명이나 낙양의 노을을

 

뒤에 두고 올 때

기억과 미래도 남몰래 내려놓고 올 것을

내일 없는 바다에

우리가 모두

뿌리 없이 흘러가는 물결이며

시시로 부서져 가는 포말임을

서로 아는 것이다

 

잠시 스쳐가는 이 세상의 만남과

흘러가는 의미를

흔드는 두 손에 담아보는 것이다

흔드는 두 손에 확인하는 것이다

 

바다에선 누구도

그 밖의 말을 알지 못한다

손을 흔드는

손을 흔드는

그 유순한 순명

그 밖의 어떤 세상 말도

바다는 잠잠히 지워버린다

 

■ 이 시는 1974년에 발표한 홍윤숙의 시집 ‘타관의 햇살’에 수록된 작품으로 여기에 인용된 것은 ‘한국명시’(최동호 편저) 하권 1072면에 수록된 것이다. 홍윤숙의 시 세계를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시인의 문학 관련 생애를 요약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자료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현대문학대사전’)

 

1925년 8월 19일 황해도 연백 출생. 서울에서 성장하면서 동덕여자사범학교와 경성여자사범학교를 거쳐 서울대 교육학과에서 수학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중퇴하였다.
한국여류문학인회 회장,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한국시인협회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함. 1947년 『문예신보』에 「가을」을, 1948년 『신천지』에 「낙엽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등단. 다수의 시집이 있음.
홍윤숙의 시는 초기 시에서 이른바 존재의 본질로서 순수세계를 정서적으로 탐구하다가 점차 모순과 어둠으로 가득 찬 현실적인 삶의 세계를 탐구하는 데로 확대되어 나아갔다. 그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애상과 자학 혹은 비애와 탄식의 태도를 보여주기도 하였고, 후기에는 체념과 정관 혹은 초월과 관조의 자세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까다로운’ 단어 또는 수식이 한 군데도 없다. 굳이 집어 말한다면 마지막 연의 ‘순명’인데, 이것도 그리 어려운 말은 아니다. 이 시는 바다의 이미지에 충실한 시이다. 그 이미지가 출렁이는 파도처럼 시각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바다의 언어’라는 제목이지만 그것은 어떤 존재의 나타남과 사라짐에 대한 일련의 풍경화라고 말해야 좋겠다.

 

시는 ‘우리가 한 바다를 지날 때’라고 말하면서 시작된다. 바다-, 그처럼 망망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그 공활한 바다를 놓고 무엇 할 말을 잃게 마련이지만, 그러나 시인의 바다는 간략히 ‘우리가 한 바다를 지날 때’라고 말함으로써 우리의 고정관념을 우회할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 이어 등장하는 그림은 바다 위를 떠가는 한 무리의 구름. 매우 평범한 바다 풍경이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음은 부사절만 있는 미완성 문장으로 이루어지는 이 연의 주어가 ‘우리’이기 때문이다. 시의 바다이거나 생활의 바다이거나 바다를 지나는 일만 해도 보통 일은 아닌데, 게다가 시에 잠기는 우리 모두가 구름이 되어 바다를 지나간다니, 아, 그렇다. 과연 그렇다. 우리는 언젠가 배를 타고 바다를 지날 적 구름처럼 그저 거침없이 씩씩하게 바다를 지난 적이 있었으리라! 잊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 망각의 바다가 비로소 지금 시인에 의하여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리라.

 

이렇게 시는 부사절뿐인 미완성 문장만으로 그저 시구에 눈길만 주었을 뿐인 사람들까지 시의 바다의 문턱에 불러 모이게 했다. 시의 시점의 방향이 바다에서 육지로 향하고 있음은 2연에서 확연하다. 항해하는 여객선의 선수 갑판 위에서 사람들이 손을 흔드는 일은 보통 입항과 출항 때인데, 지금은 입항인 것으로 읽힌다. 그 이유는 3연에서 ‘우리가 어느 날 바다를 떠나올 때’라는 서술로 설명이 충분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2연을 보다 잘 감상하기 위하여 시에 사용된 어법을 검증할 필요가 있는데 좀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서술어인 ‘손을 흔든다’의 주어에 주목해 보면 주어가 둘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첫째 줄의 ‘뱃머리’와 ‘사람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렇게 되어선 모순이다. 시의 흐름으로 보아서 뱃머리가 손을 흔드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연의 첫 줄은 ‘아득히 먼 뱃머리와 갑판 위에서’이거나 또는 ‘아득히 먼 뱃머리의 갑판 위에서’로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해설자 본인의 판단이다. 만약 전자로 할 경우, ‘뱃머리’는 사람들이 승하선하는 여객선 부두 뱃머리이고 손을 흔드는 주체는 뱃머리의 사람들과 여객선 갑판 위의 사람들이 되며, 후자의 경우는 선수 갑판 위의 사람들만이 손을 흔드는 셈이 되는데, 이 경우 입항선인지 먼바다를 항해 중인 선박인지는 확실치 않다. 왜냐면 바다에서 항해 중에 선박들은 서로 시야 내에서 마주치는 경우 갑판 위로 나와 지나가는 배를 향하여 손을 흔들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로 모를 사람들이’ ‘뜨거운 혈육처럼 손을 흔든다’라니,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서로 모르는데 어떻게 손을 흔들 수 있는가? 참으로 절창이다. 바다여, 위대한 바다여. 바다에서는 이렇게 누구나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닌가?

 

바다에서는 누구나에게, 이처럼 흔드는 손들의 사심 없는 정체가 있으리라. 3연과 4연은 흔드는 손들의 사연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이 일을 위하여 시는 온통 바다의 풍경화이다. 새벽의 여명, 낙양의 노을, 기억, 미래, 뿌리, 물결, 포말, 두 손, 흔드는……, 이와 같은 단어와 표현으로 그림은 완성되고 있다. 특히 시에 동력을 부여하는 것은 처음부터 일관되는 ‘손을 흔듦’과 ‘파도의 물결’의 심상적 일치이다. 이것이 만남과 이별, 반가움과 허무, 지知와 무지의 간극에 손을 흔들고 물결치기 때문이다.

 

흔드는 손에 대한 설명이 되는 3연과 4연은 문맥의 외관으로 볼 때 동일한 장면의 공간에 놓여 있지만 두 연으로 구분된 것은 이 시가 특히 이미지, 특히 시각 이미지의 구현에 충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의 연들 전체가 그러하다. 마치 전체 시의 상황들을 산문으로 뭉뚱 그려놓고(물론 이때 어법의 충실함이 함께 해야겠지만) 문장의 단락이 아니라 의미와 이미지의 단락으로 분리하여 각각의 연으로 고리를 꿰었다 하겠다. 물론 시의 대단원은 손길들의 손에 담긴 수많은 ‘허무’들이 오직 바다에서는 그러함을 수긍하면서 막을 내린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시의 감상을 보다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강은교 님의 ‘우리가 물이 되어’란 시를 잠시 초대해 보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處女)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이 시는 물의 이미지를 논할 때 자주 인용되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이 시 감상의 가장 난점은 3연인데 이것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돌리기로 하자. 이 시는 물의 생명성을 상징하고 있는데, 그런 면에서 홍윤숙의 시 ‘바다의 언어’에서 발견되는 물의 이미지와 대조를 이룬다. 그러면서 묘하게도 시작 부분에서 둘은 일치하는 점이 있다.

 

둘은 모두 ‘우리가 함께 물이 되어(또는 구름이 되어) ……를 지난다’는 상황을 설정하고 있다. 한때 한국 시단의 시풍에는 ‘우리가 ……이 되어’라는 식의 서술이 유행한 적이 있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물론 개별 작품마다 그것의 표현기법상의 완성도는 별개의 문제이겠지만). 이러한 시의 시작은 시의 설계자와 감상자를 공감의 한 테두리 안에서 만나게 하는 이점이 있다.

 

두 작품에서 느껴지는 물의 이미지와 별개로, 두 작품을 읽으면 서술과 표현의 그 웅대한 스케일이 마치 오케스라의 합주회에 앉은 듯하다. 왜 그럴까? 이 또한 물의 이미지와 그 역동성 때문이 아닐까? ‘더없이 뜨거운 혈육들처럼 손을 흔드는’ 것도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르는’ 것도 그 이유는 시의 중심에 놓인 각자의 망망한(또는 부끄러운) 바다로 향함 때문이 아닐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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