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해양시 감상회 2부 - 주제 : 해양시와 '바다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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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2020-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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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 작품 : 이건청의 '폐항의 밤'

 감상과 해설ㅣ심호섭(시인, 문예지 ‘해양과 문학’ 주간)

 

 

폐항의 밤

 

 

겨울에도 출렁였다.

묶인 배들은 기우뚱거리고

황혼 속에 흔들리는 빈자(貧者)의 손,

앙상한 숲을 바라보며 울었다.

 

늦기 전에 가리라,

방파제 너머로 몰려와 부서지는 지겨운 시간들,

남은 것들이 하얗게 부서지는

밤바다

아, 묶인 배들은 묶인 채 울고

굵고 튼튼한 끈 위에 눈은 쌓였다.

우리는 알지도 못하면서

기우뚱거릴 뿐, 피를,

잘려나가는 육신을 견디고 있었다.

 

저 막막한 눈보라 속으로

껌정신을 끌고 갔다.

늦기 전에 가리라,

흰옷을 입은 남자들이 휠체어에 실려

분수가 쏟아지는 마을의 긴 골목을

밤새도록 밀려가고

이 세대의 폐항에

돌아온 배들이 굳게 굳게 묶인다.

묶인 채 기우뚱거리며

눈보라속에 있다.

 

□ 자료출처 : 한국명시(최동호편저) 하권 2014면

 

 

물론 이 시를 해양시라고 말하진 않는다. 그 이유는 바다, 또는 그 소품들로 시의 화폭을 채우면서도 주로 육지의 일을 말하려 하기 때문이다. 시의 긴장은 처음부터 준비되고 있다. 겨울바다가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간략히 ‘겨울에도 출렁였다’로 ‘폐항의 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청자聽者의 귀를 모으고 있다.

해양시를 말하면서 해양활동가가 누군가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주로 바다에서 항해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뭍의 무엇인가를 다른 뭍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장기간 동안 항해를 하며 떠다니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바다가 일터이고 거주지가 되어 일상이 영위되는 좀 특이한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겨울에도 출렁이는’ 바다는 당연한 바다이다. 먼 바다가 아닌 연안에서 바다를 업으로 삼은 해양활동가에게도 ‘겨울의 출렁이는 바다’는 그저 고만고만한 일이다. 그러므로 시의 화자는 ‘바다의 사람’이 아님이 확실하다.

시인은 지금 황량한 밤 부두에 서 있다. 굳이 폐항이 아닐지라도 휴어기에 들어간 겨울 어항의 부두일 것이다. 겨울 바다에 파도는 출렁이고, 폐항이어서 묶인 배들은 출렁이는 파도에 그저 기우뚱거릴 뿐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멀어지는 도시의 황혼을 마주하고 앙상한 시대의 슬픈 현실을 떠올리며 시인은 슬픔에 잠겨 있다. 그리고 돌아서서 바라보는 어둠 속의 밤바다, 그 이미지들-, 상징들-. 방파제에 와 부서지는 파도의 하얀 포말, 배를 묶고 있는 굵은 밧줄과 그 위에 쌓이는 하얀 눈.

흑, 백으로 나뉠 수밖에 없는 중용을 찾을 수 없는 차가운 현실, 거기에 붉은 피 흘림의 희생이 따르지만 세상은 그저 눈 내리고 파도치고 밤이 오고, 흰 옷을 입고 껌정신을 끌면서 사라져 가고. 이 모든 것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겨울바다의 파도는 방파제에 부딪히며 부서져 하얗게 물거품으로 날리고.

시인의 절망은 이 모든 것과 함께 중첩되고 멀어지며 쉽게 회복되기 어려운 미래가 예고되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바다의 이미지, 바다와의 깊은 교감과 함께 가능한 일이다. 시인이 좌절하는 이 시대의 폐항은 여전히 돌아온 배들이 굳게 굳게 묶이고 있고, 묶인 채 기우뚱거리며 그저 눈보라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알리면서 끝을 맺고 있다.

바다의 이미지를 다르게 녹여낸 작품 하나를 소개한다. 전자와 달리 본 작품에는 도시의 모순과 그것을 긍정하려는 일상이 바다의 이미지에 비춰지면서 한 폭의 그림처럼 전개되고 있다.

 

 

 

바다와 시계점(時計店)

 

 

바다를 향하여

조금 기울어진 도시

언덕의 시계점

힌빛 넘치는 머리의 늙은이는

바다를 보면서 태엽을 감아주고 있다

 

밤이면

바다를 향하여

조금 기울어진 도시

늙은이의 은빛 핀셋트는

시간의 거품을 집어내고

 

푸른 시간 속 깊숙이

닻을 내린

젊은 어부가 빛의 그물을 끌고 오는

아침 길

 

바다를 향하여 기울어졌던

도시가 기지개를 켜고

집집마다 꿈의 쓰레기를 쏟아버린

창에는 하늘의

물방울이 켜져 있었다

 

 

□ 김요섭ㅣ1927년 함북 나남 출생.

□ 자료출처 : 한국명시(최동호편저) 상권 90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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