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2·D·4해역

등록일2023-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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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2·D·4해역

이윤길 I 소설가

 

 

감옥이 따로 없었다. 얼음 왕국의 출구는 보이지 않았고 빙산을 지나자 다시 빙원이 나타났다. 동서남북을 헤매지만, 빙원과 빙산 주위를 다람쥐 쳇바퀴 맴돌 듯 빙빙 돌고만 있었다. 해가 바뀌었다. 남위 73도, 서경 131도 30분 최초로 고립된 장소로부터 15일 동안 30해리나 서쪽으로 위쪽으로 위치가 변했다. 하지만 스피릿 8호의 위치가 바뀌어도 빙원은 사라지지 않았다. 선장은 레이더마스트에 올라가 있던 일등항해사를 내려오게 했다. 1항사는 새벽부터 내리는 눈발에 몸이 꽁꽁 언 탓이지 걸음조차 제대로 옮기지 못했다. 나는 재빨리 보온 통의 가열 버튼을 눌렀다. 방한복 위에 방한복을 겹쳐 입고 마스트를 오르지만, 남극해 로스해의 추위는 막은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강한 자외선에 노출된 얼굴은 시커멓게 타버리며 살갗이 벗겨져서 몰골이 엉망이었다. 밤부터 남풍이 강하게 불었다. 873헥토파스칼 저기압이 통과하기 때문인데 바람과 함께 눈이 내렸고 수온마저 영하로 뚝 떨어졌다. 모든 것이 얼어붙고 있었다. 선장은 빙원의 움직임이 있어 출구라도 열렸을까. 마음이 바빴지만 허사였다. 오히려 강한 바람 압력으로 빙원들이 압류되며 웅덩이마저 줄어들었다. 눈은 진한 진눈깨비로 시작되어 싸락눈으로 변했고 갑판 이곳저곳에 쌓였다. 선장은 겁을 먹은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었다. 얼음이 녹는 계절이었고 여름이라서 얼음은 녹을 수밖에 없었다. 퇴로가 열릴 수밖에 없었다. 선장은 선박 책임자로서 의연한 모습을 선원들에게 보여야 했다. 허둥지둥 퇴로를 찾겠다고 필요 없는 타각을 사용해 선체의 기울기가 좌우로 20도를 넘나들었다. 점점 줄어드는 FO로 선체의 중심이 점점 위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조타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한국인 선원이나 외국인 선원들도 배의 기울기가 심해지자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그것은 유빙에 갇혀서라기보다 좌우로 기울어지는 스피릿 8호의 경사 때문이었다. 선체 경사로 인한 배의 전복은 반복이 없었다. 그런데도 선장은 위험성을 모르는 것 같았다. 전문적으로 항해에 대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선원으로 생활하다 곁눈질로 배운 항해사 생활이었다. 그러다가 선장으로 발령이 났고 88·1 해역으로 출어하게 되었다. 과거의 약점 탓인지 선장은 항해사들의 말을 경청하지 않았고 한국인 선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쓸데없는 의심으로 전 선원들을 몰아붙였다. 의심은 빙산에 생긴 얼음동굴과도 같았다. 거대한 빙산이 얼음동굴로 드나드는 바람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다. 선장의 얼굴을 대하노라면, 참으로 한심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갑판에 눈이 쌓여서 두터웠다. 얼핏 확인한 대기의 기온은 영상 3도였다. 블리자드 때문인지 눈은 녹지 않았다. 나는 운동과 산책을 겸하여 빗자루를 들고 좌현 브리지 갑판으로 나왔다. 바람이 불고 있어서 체감온도가 낮았으나 답답하던 가슴이 시원하여지는 것 같아서 오히려 차가운 대기의 기온이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CCAMLR 캐치 모니터링이 E메일로 수신되었다. 곁눈질로 확인한 것은 D·1과 D·2엔 이미 조업선이 자리를 잡고 조업 중이었고 D·3엔 얼음이 풀리지 않아 러시아 국적선이 대기하고 있었다. 스피릿 8호가 진입하려고 일찍부터 보고 했던 D·4에 진입한 조업선은 없었다. 그마저 기회를 날릴 판이었다. 아무리 회사에서 대외비로 관리를 하고 있지만, 지금쯤이면 88·1 해역에서 조업하고 있는 조업선들은 눈치를 챘을 것이다. 그러면 끝이었다. 조업은 사흘 후면 종료가 되고 어장은 폐쇄가 된다. 조업선들은 텅 빈 D·4를 보고 몰려들 것이다. 그전에 갇힌 빙원에서 탈출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조업장을 확보할 수 있고, 귀항하는 어창의 반이라도 채울 수가 있고, 88·1 해역의 입역 실패에 대한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다. 선장은 출항할 때의 결연한 의지는 사라지고 점점 이성을 잃어가며 선박의 운항 책임자가 지녀야 할 여유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일자로 굳어 있는 눈썹의 표정이 그렇고 일을 지시하는 말도 퉁명스러웠다. 남위 72도 58분 서경 131도15분의 퇴로가 없는 빙원 속에서 오늘만 하여도 동서로는 세 번, 남북으로 두 번이나 항해했다. 그러나 곧 빙원에 막혀 뱃머리를 돌렸다. 뱃길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선장은 자연히 짜증이 늘었을 뿐만이 아니라 변덕에 주량까지 늘어났다. 보통은 식사 시간에 반주로 반병의 소주를 마셨지만, 스피릿 8호를 포박시키고 나서 소주병을 들이켰다. 선장은 다시 조타를 시작했다. 히터를 켜 놓은 밀폐된 브리지 공기와 선장이 내뿜는 술 냄새가 섞이면서 머리가 지근거렸다. 분명한 음주 조타였다. 눈은 계속해서 내렸다. 시정이 점점 나빠졌다. 빙원 속 웅덩이에서 탈출하려면 무엇보다 시정이 좋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물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술에 취한 선장이 조타하는 스피릿 8호는 내리는 눈과 빙원이 조각나서 떠다니던 유빙 속을 전속으로 달렸고 뱃머리 앞에서 유빙이 나타날 때마다 전타를 쓰며 방향을 바꾸었다. 그럴 때마다 스피릿 8호는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20도 가까이 기울어졌다. 기관장은 선장의 무지막지함에 신경이 쓰였다. 순간순간 이리저리 기울다가 스피릿 8호의 무게 중심이 무너지는 전복 상황을 생각하다 보면 몸서리가 쳐졌다. 기관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수술한 디스크가 재발할 정도로 긴장감이 더해졌다. 빙원에서 탈출은 고사하고 남극해 물귀신으로 남을 것 같은 공포감이 생겨났다. 균형을 잡은 기회는 점점 줄어드는데 선장의 조타는 여전하고 했다. 선원들은 선장을 대신하여 스스로 몸의 균형을 맞추었다. 갑판 너머로 보이는 장엄한 남극해 풍경도 위안은커녕 극복할 수 없는 마음의 두려움으로 기관장을 짓눌렀다. 생각다 못한 기관장은 갑판장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는. 스피릿 8호의 균형이 불안하니 상갑판에 있는 중량물을 어창 안으로 옮기자고 했다. 하지만 선박에서의 모든 일은 선장의 지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조타를 직접하고 있는 선장이 위험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갑판장이 위험하니 옮기자고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갑판장은 선장과 사이가 원만치 못했다. 사고가 나면 함께 죽는 거야. 지가 살고 싶으면 상황을 파악하겠느냐며 기관장이 직접 선장에게 건의하라고 했다.

 

블리자드가 불어왔다. 고립되고 처음으로 겪는 강한 바람과 추위였다. 선장은 1항사를 다시 레이다 마스트로 올려보냈다. 지난밤 받은 유빙도에는 북쪽으로 그러니까 어장과는 반대 방향으로 빙원들이 갈라져 있었다. 회사에서야 남쪽으로 진행하여 어장에 진입하도록 하고 있으나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빙원 속에 갇혀 해류를 따라 표류할 수 없었다. 선장은 마침내 결정했다. 어장으로의 진입보다는 퇴로를 선택했다. 바람은 그 세기를 더하여 미터 퍼 30을 돌파했다. 기온도 영하 7도로 뚝 떨어졌다. 체감온도는 더 낮았다. 나는 전방을 견시하기 위하여 선수로 나갔다. 노출된 살갗에 닿는 바람은 마치 얼음송곳으로 쑤셔대는 통증을 맛보게 했다. 고글까지 하고 있었지만 틈으로 파고드는 바람 탓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선장은 뱃머리를 북쪽으로 잡았고 레이다 마스트에 올라간 1항사가 퇴로를 찾아냈다. 스피릿 8호는 블리자드와 폭풍설을 헤치며 북상했다. 바람을 포트 현으로 받았기 때문에 균형이 무너지며 스피릿 8호가 15도나 기울었지만 선장의 나쁜 조타 습관은 여전했다. 어느 순간 선장이 전타했고 스피릿 8호는 20도나 기울었다. 바람에 압류된 스피릿 8호는 기울기를 회복하지 못했다. 갑판에 놓인 사물들이 오른쪽 현 편으로 나뒹굴었다. 선장은 속력을 낮추었다. 그때야 천천히 스피릿 8호가 균형을 잡았다. 그 순간 오른쪽 현의 근접한 거리에서 평판형의 거대한 빙산이 보였다. 길이가 200미터도 넘는 거대한 빙산이었다. 나의 이마에는 돌연 식은땀이 흘렀고 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두 다리마저 민망할 정도로 부들부들했다. 근접한 CPA가 충돌 상황이었지만 레이더마스트에 있던 1항사가 주의를 주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충돌하였을 것이다. 불침선이란 타이타닉도 빙산과 충돌해서 침몰했다. 하물며 스피릿 8호의 충돌은 불을 보듯 뻔했다. 새파랗게 질려버린 기관장이 헐레벌떡 브리지로 들어섰다. 더 이상 항해를 하게 되면 균형을 조절하기 어렵다고 했다. 기관장은 상갑판에 적재한 중량물을 처리갑판으로 내려 주라고 요청했다. 기관장은 줄곧 선장의 눈치를 살폈다. 조타기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먼저 고개를 돌린 사람은 선장이다. 찰나였지만, 기관장은 선장의 눈동자가 파리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기관장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선장의 그런 눈빛이 모가지를 잘라내는 비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하던 선장은 스피릿 8호를 정지시켰다. 선장은 갑판장을 불러서 상갑판 중량물의 이동을 지시했다. 선장의 지시에 죽음의 미로 속에서 퇴로를 발견한 사람처럼 기관장 얼굴에는 희미하게나마 화색이 돌았다. 빙원 속 웅덩이를 벗어난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고 완전하게 갇혀 있던 곳을 빠져나온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스피릿 8호는 남위 72도48분, 서경 132도에 머물렀고 이곳 역시 빙원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유빙으로 가득 차 있어 언제 다시 갇힐지 몰랐다.

 

블리자드가 어디에선가 변화를 일으켰을 것만 같은 날이었다. 이틀이나 몰아 불던 바람이 사라졌다. 남극해는 평온을 찾았지만, 스피릿 8호는 여전히 빙원 속에 있었다. 남위 72도 41분 서경 131도 17분이었다. 기온은 영상 7도로 높아졌다. 저기압이 물러간 뒤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시정도 좋아졌다. 5마일 앞의 물길도 눈대중으로 찾기 쉬운 날이었다. 선장은 일찍부터 기상했다. 그러고는 변함없이 직접 조타를 시작했다. 선장의 통솔력 중에서 부족한 부분이기도 했다. 선장은 자신만이 스피릿 8호를 운항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항해사들에게는 조타를 전혀 맡기지 않았다. 선장이 항해사를 믿지 못한다면 누구를 믿겠는가. 그러한 행동은 자신의 부족한 전문적인 지식과 경력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선장은 자신을 감추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선장은 잠이 오면 배를 표류시켰다. 그 시간이 하루의 절반이다. 선장이 잠자는 동안 항해사들이 조타한다면 그만큼 시간의 이익을 얻는데도 그러질 않았다. 아무튼, 스피릿 8호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류가 남쪽으로 흘렀지만, 뱃머리를 북쪽으로 향했다. 예측건대 빙원과 멀찍이 떨어질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88·2·D·4 해역의 쿼터가 바닥나지 않는 한 회항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한 마리를 잡더라도 쿼터가 없어질 때까지 어장에 묶어둘 생각인데 선장은 자꾸만 도망갈 궁리만 했다. 어차피 회사에서 회항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장으로 진입해야 했다. 그게 자본주의의 습성이다. 북쪽의 물길은 끊겼다. 선장은 뱃머리를 돌려 이번엔 남쪽으로 향했다. 빙산이 뱃머리 앞에 있었다. 빙산은 볏을 활짝 펼치고 먹이를 노리는 목도리도마뱀처럼 보였는데 햇살을 받은 탓인지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빛났다. 빙산은 가시를 세운 물고기 모양으로 변했다가 스피릿 8호의 항로변경에 따라 육식공룡이 꼬리를 쳐든 모습으로 변해갔다. 빙산의 전체적인 모습이 도전적이긴 했지만, 봉우리부터 바다로 흘러내리는 설사면의 곡선이 부드러워서 친근감을 주었다. 남극해 풍광은 볼 때마다 경이로웠다. 인간이 어떻게 흉내라도 낼 수가 있을까. 나는 핸드폰을 들고 영상을 촬영했다. 나중에 인도네시아로 돌아갔을 때 보여줄 남극해였다. 스밀란은 스피릿 8호의 현재 상황을 알지 못한다. 나는 굳이 현 상황을 알려주어서 걱정을 끼치긴 싫었다. 만에 하나 조난을 하더라도 나의 운명이다. 당연히 알라신이 보살펴 줄 것이다. 한국인 선원들은 두려움에 빠져 있었고 조업하지 못하는 얻게 되는 손실 감에 우울해했다. 한국의 원양어선 시스템으로는 어획이 없으면 정산할 금액도 없었다. 선장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유빙 속 웅덩이 주변을 돌아보고선 바로 빙산 곁에다 배를 표류시켰다. 빙산 곁에는 언제나 웅덩이가 있었다. 조난이라도 한다면 빙산 위로 올라갈 계획인 것 같았다.

 

…………(하략)…………

 

□ 자료출처 : <해양과 문학> 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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