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국이라도 먹고 가지

등록일20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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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국이라도 먹고 가지

백시종 i 소설가

 

1

 

어떤 경로로나 어떤 상황으로나 나는 그 인수팀에 합류할 자격이 없었다. 만약 나의 숨겨진 신분을 알았다면 인수팀 선정 과정에서 즉시 탈락은 물론이요, 굳이 헌병에게 인계하고 말 것도 없이 현장에서 체포 그 악명 높은 조사실로 직행하고 말았을 터였다. 그런 나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그 인선 경쟁에서 탈락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남아 언감생심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앉은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기적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대목이었다. 나 같은 하급 기술병 주제에 단지 기름밥 먹은 세월이 있고, 천성으로 기계 보는 눈이 있고, 남보다 손재주가 조금 뛰어날 뿐인데,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내가 그 유능한 경쟁자들을 깡그리 제쳤다니 어찌 기적 운운하지 않을 수 있는가.

내가 기적 운운하며 비로소 안도의 숨과 함께 그 공포로부터 조금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낯설기는 해도 미국 땅에 도착하기만 하면 완전한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렇다. 비록 내 전력을 숨기고 입대 절차를 밟아 새로운 영역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해도,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 언제 어떻게 내 신분이 밝혀져 또다시 그 참혹한 도가니 속에 빠지게 될지 어느 사람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다. 지금 나에게 있어서 시급한 일은 내 조국 대한민국에서 가능한 한 이른 시일 안에 빠져나가는 것이 상수이다. 나는 자유를 찾고 싶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나는 오로지 살고 싶다는 일념뿐이었다. 그 일념으로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구사일생으로 벗어나자마자 일본 밀항선을 타기 위해 온갖 루트를 다 접선했지만, 부산에서 마산, 통영, 삼천포에 이르기까지 항구란 항구는 죄다 봉쇄해 버리는 바람에 최후 수단으로 해군 기술병 입대를 자원했다.

그런 와중에 하늘의 별 따기라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그 비밀스러운 인수 팀에 그것도 신참 중에 신참인 내가 덜컥 선정된 것이다.

물론 어떤 기적이고 간에 불을 붙이는 발화점이 있기 마련이다. 상해 고등해원 양성소 출신 기관 책임자인 박대위가 그 사람이다. 박위대와 나 사이의 끈끈한 신뢰감이 없었다면 어쩌면 기적 자체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내가 지원 기술 사병으로 처음 진해 조함창(造艦倉)에 배속되었을 때 박대위는 기관부 책임자였다. 때마침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1미터짜리 디젤 엔진을 사관생도들이 달라붙어 수리를 시도하다 포기해버린 것을 내가 드라이버 한 개 달랑 들고 가볍게 되살려냈는데 그 현장에서 박대위가 나를 눈여겨본 모양이었다.

“넌 기술이 천재구나!” 박대위가 나에게 건넨 첫마디가 그러했다.

“아닙니다.”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어디 출신이야?”

“저는 출신이 없습니다.”

“출신이 없다고?”

“일본 기술자들 밑에서 배도 타고 엔진도 고치고….”

“근데 여긴 어떻게 왔어?”

“지원했습니다.”

“그래 잘 왔어. 너 같은 기술자가 꼭 필요한 곳이 여기 진해 함창 이니까.”

어느 날 박대위가 나를 비롯한 기관부 사병들을 소집했다. 이번에는 디젤 엔진이 아니었다. 헝클어지고 끊어지고 고철로 버려진 일본 선박의 전기 배선을 점검하고 수리하는 일이었다. 나는 침착하게 다른 경쟁자들보다 먼저 그 일을 해냈고 또 한 번 박수를 받았다.

박대위가 나를 은밀히 불러서 입을 열었다.

“이것 봐”

“네 대위님”

“당신 구천만 중사하고는 어떻게 되는 사이야?”

“아 고향 선배님입니다.”

“고향 선배라고?”

“네, 그렇습니다.”

“단순하게 고향 선배라서 당신 신원보증에 도장을 찍은 거야?”

“네, 그렇습니다.”

“그럼 구철만이 이번 숙청 명단에 들어간 사실도 알고 있겠구먼?”

“모릅니다.”

“모른다고?”

“네, 그렇습니다.”

“정말 몰랐어?”

“정말 몰랐습니다.”

“그렇겠지!”

박 대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했다.

“당신 같이 순진한 사람이 구철만이 빨갱이인 줄 알았다면, 그 사람한테 신원보증서를 받지 않았겠지. 그렇게 믿어도 되겠어?”

나는 벌써 떨리기 시작하는 이빨을 앙다물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믿어도 됩니다.”

“하나님 이름으로 맹세할 수 있어?”

“네 하나님 이름으로 맹세할 수 있습니다.”

“알았어.”

박 대위가 내 등을 토닥거렸다. 그 순간 나는 인수 팀의 일원으로 영광스럽게 낙점을 받은 셈이었다.

 

2

 

나는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구철만이 숙청 대상이 되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알았으면서도 모른다고 잡아떼고 구철만이 나와 같은 남로당 열성 당원이었고, 지금 그 당원 모두를 싸잡아 빨갱이로 호칭하고 있다는 명백한 현실을 잘 파악하고 있는데도 마치 남의 얘기처럼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댄 것이었다.

구철만은 내 고향 선배이면서 나의 멘토가 되는 사람이다. 나는 구철만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어 의심치 않고 설사 상식에서 많이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고 일단 긍정적으로 신뢰감부터 보이는 편이었다.

실제로 나는 그의 영향권 아래 살아왔다고 해도 그리 틀린 얘기가 아니다. 내가 일본인이 경영하는 철공소에 들어가 쇳덩어리를 깎고 갈아 엔진 부속품을 만드는 기술자가 된 것도 구철만의 특별한 어드바이스 때문이다.

이제 곧 도래할 민족 해방의 참 세상이 오면 무엇보다 첨단 기술이 필요한데, 그때를 위해 철저히 대비했다가 조국이 너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큰 소리로 “네” 하고 뛰어나가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진정한 일꾼이 되어야 한다고 구철만이 일갈하는 것이었다.

나는 철저하게 구철만을 신봉하며 따랐다.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분심이와의 그 일은 예외였다. 원래 분심이는 나와 옆집에 살았고, 동갑장이어서 여간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 어색한 남녀 관계라기보다 어렸을 때부터 남매처럼 허물없던 사이였다.

그래서 구철만하고 자주 어울렸다. 구철만이 선생님처럼 우리 두 사람 앞에서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자신의 포부와 신념을 토로하곤 했다. 분심이와 내가 똑같이 남로당원이 된 것도 구철만의 유식한 달변과 열렬한 나라 사랑의 강도 때문이었다. 분심이는 구철만과 무려 5살 차이였는데도 내가 철공소 기술을 배우기 위해 반년여 일본에 다녀온 사이, 두 사람은 연인으로 변해 있었고, 그다음 해 정식 부부가 되었다.

나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냥 콱 죽고 싶은 정도로 참담한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그만큼 나에게 시련의 아픔과 고통을 준 사람들이 구철만이고 분심이었다.

그래도 나는 꾹 참고 묵묵히 일만 했다. 더 열심히 기술 연마에 힘을 쏟았다. 분심이가 첫 아이를 분만하고 이틀만인가,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해방의 만세 소리가 삼천리 반도에 울려 퍼졌지만, 구철만의 말대로 참되고 풍요로운 세상은 활짝 열리지 않았다.

구철만이 제 세상이 온 것처럼 행세하기 시작했지만, 누구도 그를 인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구철만의 할아버지, 아버지 두 분 다 독립운동에 앞장서다가 한 분은 신의주 감옥에서 옥사하고 또 한 분은 서울 종로서에서 희생당했는데, 그의 부친의 경우는 일본에 아첨하던 조선인 형사에게 고문당하다가 절명했으므로 해방이 되면 누구보다 먼저 친일파 조선인 경찰부터 처단해야 한다고 언제 어디서나 입술을 앙다물곤 했던 터다.

일본압제에서 해방만 되면 독립운동 했던 양심 세력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줄 알았는데 웬걸, 어떤 변화도 없이 우물쭈물하는 동안 미군정이 시작되고 당연히 처단되었어야 마땅한 친일 악질 경찰들이 제자리에 다시 들어와서 그에 항의하는 양심 세력을 잡아들이며 일제 강점기 때보다 더 악질적인 야수로 변해서 함부로 총 칼을 휘두르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하략………)

 
□ 자료출처 : <해양과 문학> 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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