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1)

등록일2020-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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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1)

송 운 종 | 신아해운 1항사

 

 

바람 한 올 백파 한 점 보이지 않는 남지나 해상의 파란 비단결은 너무나도 고요했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수평선의 어느 곳에서도 이들의 웅성거림은 커녕 잔기침 하나 들리지 않았다. 아니 가느다란 속삭임마저도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을 망각해 버린 채 무아의 경지로 빠져버린 파랑의 열렬한 포옹이 태고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이 고요 속에는 솜이불보다도 더 포근한 평화로움이 하늘과 바다를 온통 감싸고 있었다. 이들이 내 풍기는 이것은 비단 오늘만이 아니었다.

말레이시아의 산디칸(Sandican) 항구를 출항하여 남지나해(南支那海)로 진입할 때부터 A호를 떠밀고 있는 이 아늑함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남지나 해상의 한 중간을 가로질러 보르네오(Borneo) 섬 최북단을 통과할 때도, 엿가락처럼 길다랗게 누워 있는 필리핀의 파라완(Palawan) 섬을 육안으로 바라보며 통과할 때도, 그리고 루손(Luzon) 섬의 허리를 통과하고 있는 지금도 하늘과 바다는 갓난아기의 깊은 잠처럼 평화스럽기만 했다.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언제나 저 멀리에서만 가물거리는 수평선의 머나먼 여운의 파랑의 긴 잠을 질투라도 하듯 유난스레이 반짝거렸다. 견우직녀를 떼어놓은 은하수의 눈망울처럼…….

A호는 커다란 포말 덩어리를 잘게 잘게 부수어 내면서 스치고 지나와 버린 파광 속의 반짝거림 너머로 긴 항적을 남기고 있었다.

더할 수 없는 포근한 고요를 온통 선수로 어루만지고 있는 4,500톤급의 원목(原木) 전용 운반선인 A호는 풍만한 궁둥이를 철퍼덕거리며 루손섬을 오른쪽 옆구리에 낀 채로 유유히 북상하고 있는 것이다. 묵직한 원목덩어리를 가슴 가득히 안은 채 목적지인 일본의 B항을 향하여 계속 항해하고 있었다.

갑판상까지 가득히 적재되어 있는 벌거벗은 원목 덩어리는 온몸을 태양에 내맡긴 채 깊은 잠 속에 떨어져 있었다. 긴 줄기를 가지고 있는 열대 란(蘭)과 짧은 꼬리의 도마뱀이 수없이 애무했던 가지도,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던 스콜(Squall=열대성 강우)을 피해 가장 안전한 보금자리로 삼았던 온갖 독거미들의 서식처였던 두툼한 껍질도, 개미들의 식량 창고였던 뿌리도…….그 어느 것 하나 남기지 않은 채 모조리 난도질당한 원목 덩어리는 모든 고통을 아예 망각해버린 양 허벌지게 누워 있었다. 이들을 안고 있는 A호는 얼마 남지 않은 이들의 마지막 잠이나마 깨우지 않으려는 듯 파광(波光)에 떠밀리어 반짝거림 속으로 숨어들며 달려가고 있었다. A호의 양 현측엔 선수에서 부서진 포말덩어리들이 끊임없는 발돋움을 해대고 있었다.

하계흘수선(夏季吃水線)까지 바다 깊숙이 잠겨 있는 A호의 옆구리는 이들의 끊임없는 간지러움에도 불구하고 마냥 모른 체만 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들의 소곤거리는 듯한 애무를 즐기고 있으면서 간지러움 만큼은 꾹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2등 항해사 뭘그리 생각하고 있습니까? 귀국할 날도 며칠 안 남았는데……』

뒤에서 냅다 고함지르는 통신장의 목소리에 나는 그제서야 시선을 바다로부터 거두었다.

『그저 하도 바다가 포근해서……』

『저 속에 치뜨고 있는 표효같은 침묵 덩어리 말이죠? 언제 쓸개즙까지 토해 내게 만들지 모르니까 너무 감사하지 마시죠』 하고는 등 뒤에 감추고 있던 기상도(氣象圖)를 슬며시 내밀었다.

통신장이 건네준 기상도엔 본선과 조우해야 될 만한 이렇다 할 기상 배치는 없었다. 본선 항로상과는 무관한 산동반도에서 한반도 허리를 가로질러 캄차카(Kamchatka) 반도 쪽으로 빠져나가는 저기압의 등압선이 블라디보스톡 앞바다를 온통 메우고 있었으며 쿠릴(Kuril) 열도와 알류우산(Aleutian) 열도엔 크고 작은 기압골이 그저 멋대로 그려놓은 어린애들의 그림처럼 어지럽게 흩어져 베링해(Bering sea)를 온통 뒤흔들고 있었다. 북태평양을 뒤덮고 있는 기압골을 연필로 이어가고 있는데 통신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허허! 이곳을 횡단하고 있는 항해사들.지금 이 거미줄 같은 기압골을 빠져나가느라고 혼쭐나겠구먼……』

『그러고도 남겠죠, 이놈의 기압골이 사라질 날이 없는 곳이니……』

 

□ 자료출처 : <월간 海바라기> 2018년 9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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