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2)

등록일2020-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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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2)

송 운 종 ㅣ 신아해운 1항사

 

 

통신장과 나는 약속이나 한 듯 시커먼 기압골이 거미줄처럼 엉켜있는 기상도에서 한참동안 시선을 떼지 않았다. 본선과는 너무나도 먼 저곳에선 지금 일그러진 광란의 바다를 해치고 있을 알 수도 없는 항해사들의 얼굴들이 기상도 위에 선명히 나타나 있는 것처럼…….

북태평양에 시선을 고정한 채 침묵이 계속되자 통신장이 슬며시 물었다.

『언제쯤이나 오끼나와를 통과하겠소?』

『앞으로 나흘만 항해하면 일본 TV를 볼 수 있을 것이요. 그리고 그 다음날은 B항에 입항할 것이고…』

『교대자가 승선하면 1년만의 귀국이 되겠죠?』

『물론이죠, 1년만의 퇴근인 셈이 되겠군요.』

그랬다. 비단 나와 통신장만이 아니라 외국적 선박에 송출되어 항해하고 있는 모든 선원들은 김포에서 출국하는 그날이 출근이고 일년이란 긴긴 시간 뒤에 찾아오는 이 퇴근과 같은 귀국날짜를 헤아리며 이 바다 저 대양을 헤치고만 다녔다. 그럴 때마다 인도양이던 태평양이던 이 끝과 저 끝의 수평선은 항시 같았고 우린 이 반짝거림만을 쫓아 다니며 귀국을 학수고대했던 것이다.

『이 기압골 배치는 과히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죠?』

『그럼요, 아무리 태풍 발생지역으로 유명한 필리핀 동북부와 본선이 가까이 있다 할지라도 태풍 발생 계절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계절이니까요!』

통신장이 가리킨 기상도엔 상하이 동남쪽에서부터 시작된 두어가닥의 기압골이 오끼나와를 말발굽처럼 싸안으며 타이페이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어느 대양에서나 흔히 만나 볼 수 있는 희미한 기압골 배치이며 세력이 약한 등압선 간격이었다. 본선이 통과해야 될 항로상과 조금은 가깝다는 생각이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부담감으로까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통신장이 브릿지를 내려가고 난 뒤 나는 항로고시 소책자와 오끼나와 근해 해도를 펼쳐 놓고 미 해군과 공군의 해상사격 훈련 지역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았다. 말레이시아의 산디칸 항구를 출항하기 이틀 전 대리점 직원이 전달해준 항로고시 소책자에는 오끼나와 주둔 미 해군과 공군의 해상사격 훈련 위치와 날짜가 상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이 해역을 통과하게 될 일반 선박들은 해상사격 훈련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도록 미리 항해 계획을 수정하라는 의도인 것이다. 오끼나와 동남쪽 30마일 해상에서 사각형으로 반듯하게 구획된 훈련 지역이 위치를 일일이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재확인한 나는 해도를 재점검해야 될 필요성은 더 이상 없다고 판단했다. 본선 평균속력으로 계산해 보니 훈련 해역 도착 시간대는 다행히도 야간이 아닌 정오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심리적 부담감을 안고 통과해야 될 위치의 시간대가 야간보다는 주간인 경우 항해 자신감은 어느 항해사이든 마음이 놓인 것은 항해사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평범한 진리인 것이다.

해도 테이블 위에 펼쳐 놓은 해도와 항로고시 소책자들을 다시 정리해 놓은 나는 해도실을 나왔다. 사면팔방이 훤하게 트인 조타실엔 조금도 변함없이 모든 항해 계기는 정상으로 작동되고 있었으며 레이다 스코프 상의 화면에도 움직이는 물체는 기록되지 않고 있었다. 수평선 역시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은 채 태양과 파광이 한껏 어우러지며 그 자리에서만 반짝거리고 있었다.

대만과 필리핀 사이의 바시 해협으로 들어서자마자 파랑은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파랑 자체는 그대로였지만 그 속에 잠들어 있던 파랑의 질투가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상도엔 기압골의 등압선 배치가 서너 가닥으로 발달되어 나타나 있었다. 그래도 우린 이 기압골을 무시해 버렸다. 태풍도 아닌 이 미미한 기압골을 피하기 위해 항로를 이탈한다는 것은 정말 우스운 짓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목적항을 가까이 둔 상황하에서는 더더욱이…….

야간 당직을 알리는 선내 전화벨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을 나섰다.

모든 전등이 소등된 컴컴한 소타실로 들어가자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항해 계기에서 스며 나오는 꼬마전구의 희미한 불빛뿐이었다. 어느 정도의 순간이 지나자 매일 보아 왔던 조타실인지 어둠 속에서도 모든 것이 훤히 보였다. 선실에서 쉬고 있는 줄 알았던 선장이 조타실 한쪽켠에 장승처럼 선채로 전방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해도실로 들어간 나는 3등항해사로부터 현재의 본선 위치와 코스를 인수받았다. 현재 위치는 필리핀 동북 200마일, 오끼나와 남서 380마일인 바시해협 한중간을 통과하고 있었다.

당직 근무를 마친 3등항해사가 1등조타수와 함께 조타실을 내려가고 나는 2등조타수가 타륜을 잡고 있는 옆에서 나침반 방위도를 지켜보다가 밖을 내다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조용했던 바다는 상당히 거칠어져 있었다. 침실에 있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거칠어진 바다의 요동을 높다란 조타실에서는 대번에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양 다리에 잔뜩 힘을 준채 버티고 섰다. 바람 한 올 백파(白波) 한 점 보이지 않았던 바다가 온통 백파투성이에 윙윙거리는 바람소리뿐이었다.

『2등항해사! 두어 시간 전부터 기상이 나빠지고 있다. 강풍과 함께 스콜이 쏟아지며 시계가 불량하니 견시를 철저히 하여 마주치는 항해선이 있으면 일찌감치 피해가고……』

뭔가를 더 지시할 듯 하던 선장은 말끝을 흐려 버렸다. 나는 속으로 선장의 뒷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졸지 말고……,」하고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당직 시간에 졸지 말라는 선장의 지시사항은 하루도 빠짐없이 강조되는 사항이었던 것이다.

조타실을 항해사들에게 맡겨 두고 항시 조바심 나는 기분으로 24시간 풀 당직을 서는 선장의 입장에선, 본선 코스와 무관한 항행선 한 척에도, 수평선 너머에서부터 아스라하게 밝아 오는 어선의 집어등 여운에도 노심초사하면서 현창을 통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A호의 항해사들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타실로 올라온 지 반시간 정도를 꿈쩍도 안한 채 이글대기 시작하는 칠흑 같은 바다만을 응시하고 있던 선장이 몸을 움직이며 말했다.

『현 상태보다 더 악화되면 즉시 알려주게!』

하고는 조타실을 내려갔다.

선장이 조타실을 내려가자마자,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우현 선수로 쳐 올라온 파도 덩어리가 갑판상에 적재되어 있는 원목덩어리 위로 내리 덮쳤다. 원목 사이로 흘러내린 물줄기는 하얀 거품을 온통 쏟아 내며 갚판을 뒤덮더니 다시 양현측을 통해 폭포처럼 바다위로 떨어지고 바람에 날린 물줄기는 쏟아지는 스콜과 함께 어우러져 조타실 유리창에까지 사정없이 달려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남지나 해상의 밤바다에서 쏟아지는 스콜과 휘몰아치는 강풍에 온 바다는 하얀 이빨을 온통 드러내며 A호를 향해 한꺼번에 돌진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레이다 스코프를 수시로 들여다보며 항행선 유무를 찾아보았지만 바시해협의 어느 구석에도 항행중인 선박들은 나타나질 않았다.

선수를 뛰어넘어 갑판에 누워 있는 원목 덩어리를 후려갈기기에 재미를 붙인 파도는 꼬리를 물고 현측을 내리 덮쳤다. 때론 귀엽다는 듯이 살짝 스치며 애무하듯 어루만지고 지나가더니 잠시 후엔 격정의 순간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사정없이 내리 덮치며 후려갈겼다. 그럴 때마다 원목 위로 덮친 물줄기는 포말 덩어리로 변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쏟아지는 스콜과 후려치는 강풍, 내리 덮치는 파도 덩어리에도 불구하고 A호는 아무런 저항도 안한채 온몸뚱아리를 온통 이들에게 내맡기고만 있었다. 고통을 못 이겨 저절로 터져 나오는 울부짖음은 커녕 애소띈 한마디 신음 소리마저도 토해내질 않은 채 그저 묵묵히 앞으로만 나아가고 있었다. 마치 이 모든 것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듯 그저 광란의 밤바다를 가르고만 있는 것이다. 나는 키를 움켜쥐고 있는 2등조타수에게 단단히 키를 조종하라고 지시하고 기관실 당직자에게도 현재의 해상 상태에 대해 연락했다.

다행이라고 스스로나마 위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람과 파도의 방향이 정횡이 아닌 우현 선수에서 휘몰아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파도와 바람이 A호의 정횡에서 휘몰아쳐 온다면 몸의 중심은 물론 해도실에 놓여 있는 필기구나 주방에 있는 온갖 식기들은 지금쯤 바닥에 떨어져 깨어지고 굴러다니며 요란법석을 떨고도 남을 정도의 거칠은 해상 상태인 것이다. 나는 양다리에 더 한층 힘을 주며 단단히 버티고 섰지만 파도가 덮쳐 올 땐 손잡이를 힘껏 거머쥐어야만 되었다.

 

□ 자료출처 : <월간 海바라기> 2018년 10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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