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3)

등록일2020-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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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3)

송운종 ㅣ 신아해운 1항사

 

 

파도도, 바람도, 스콜도,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전혀 기세를 꺾일 줄 모른 채 그저 한데 어우러져 광란의 밤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점점 더 거세어지고 있는 해상 상태를 지켜본 채 항해만 할 수 없어 나는 선장에게 전화로 보고했다. 선장은 조금도 지체 없이 조타실로 올라왔다. 마치 쇼파에 앉은 채로 나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파고는 4~5미터에 파장은 30미터라는군, 강한 스콜을 동반한 강풍이 내일까지 이 바시해협을 강타한다는 일본 기상청의 일기예보야.』

선실로 내려간 선장은 일기예보 라디오 방송을 청취한 것이다.

칠흑같은 어둠 속의 남지나해 온 바다에서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이든지 단숨에 삼켜버려야겠다는 듯 하얀 혀를 온통 휘두르며 온 몸뚱아리를 미친 듯이 비틀어 대었다. 선수로 넘나들던 파도 덩어리는 이젠 상갑판까지 쳐 올라와 숨쉴 틈을 주지 않고 있었다.

『2등항해사! 기관실 당직자는 콘츄럴 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연락하고 기관장과 통신장에게 연락하게.』

나는 즉시 선장의 지시사항을 전했다.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진 이 파도 속에서 어떤 수단을 강구할만한 방법은 없었다.

급속도로 발달한 기압골 증가로 피항하기에는 이미 늦었고 또한 피항을 한다 할지라도 이 망망대해에서 피할 구석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무인도는커녕 산호초 하나 없는 바시해협의 중간인 것이다.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 기관 회전수를 줄이는 것 뿐이었다. 덮쳐 오는 파도와 바람의 힘이 A호의 엔진 추진력과 거의 일치하도록 엔진을 조종하여 현 위치에서 퐁당퐁당 맞상대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관실 당직자를 콘츄럴 룸에서 이탈하지 말라는 선장의 지시는 곧 엔진속도를 낮추겠다는 계산인 것이다.

이때였다. 파장 30미터쯤 되어 보이는 거대한 파도 덩어리가 선수를 강타하더니 온 갑판을 물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갑판으로 쳐올라온 해수 덩어리가 흘러내리기도 전에 두 번째의 파도 덩어리가 재차 선수를 강타하면서 조타실 유리창에까지 파도가 덮쳐왔다.

『하프엔진(Harf Engine=반속전진)!』

기관 회전수를 낮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선장은 두 개의 파도 덩어리를 연속으로 얻어맞고는 마침내 반속전진을 지시했다. 나는 텔레그래프(Telegraph=전령기) 핸들을 힘껏 당겨 기관실에 알렸다. 텔레그래프의 바늘이 하프엔진 위치에서 멈추기도 전에 이번엔 세 번째의 파도 덩어리가 A호 선수를 넘어 갑판을 내리 덮쳤다.

흔히들 말하는 트라이앵글을 정통으로 맞은 것이다. 모든 것이 일순간에 정지된 양 A호는 아무런 저항도 반항도 안한 채 그 큰 몸뚱아리를 부르르 떨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온 갑판은 물론이고 원목 덩어리 사이사이 마다 파도 덩어리를 듬뿍 안고서……. 그리곤 잠시 후 서서히 우현으로 선회하면서 기울기 시작했다. 처음엔 파도의 너울과 바람의 힘에 의해 일시적으로 선회하면서 기운 것으로만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선회의 폭이 점차로 커지면서 경사계의 바늘이 원상태로 되돌아오질 않은 것이다.

A호는 복원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타는 정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사계의 바늘을 지켜보는 1초의 시간이 영원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5도……. 6도……. 7도……. 10도…….

A호는 점점 더 기울어져 가기만 할뿐 복원력을 되찾을 기미는 전혀 없었다. 파도와 바람은 어느새 좌현 정횡에서 쳐 올라와 A호 갑판 한중간을 여유 있게 넘나들며 교태를 만끽하고 있었다.

『총원 비상 부서 배치!』

선장의 다급한 지시가 떨어지기가 바쁘게 나는 비상벨을 울리며 동시에 선내 방송을 했다.

1등항해사와 통신장이 황급히 조타실로 들어왔다.

『본선이 당했다! 통신장은 조난신호 발신준비! 일등항해사는 갑판 부원들을 데리고 화물 투하 준비! 기관실에 알리고 모든 작업등을 켜라!』

숨 돌릴 틈도 없이 쏟아져 나온 선장의 지시에 일등항해사와 통신장은 조타실을 내려가고 나는 기관실에 고함치듯 상황을 전하면서 배전관에 붙어 있는 갑판 작업등을 모조리 올렸다.

순식간에 갑판은 대낮처럼 밝아졌다. 훤하게 켜진 작업등 아래의 갑판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도없이 넘나드는 파도 덩어리가 온통 넘실대고 있었다.

『일등항해사! 화물 투하준비!』

복원력을 상실한 A호를 빠른 시간 내에 원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갑판상에 적재되어 있는 화물인 원목 덩어리들을 투하시키려고 한 것이다. 일등항해사와 갑판장을 선두로 갑판 부원들이 원목들을 묶고 있는 와이어로프를 자르기 위해 와이어 절단용 기계를 하나씩 들고 갑판으로 바짝 다가가고 있었다. 경사계의 바늘을 수시로 쳐다본 선장의 얼굴에 진땀이 흘러내려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이때 기관실과 연결된 전성관에서 기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고함으로 변해 조타실에 울려 퍼졌다.

『기관실에 물이 들어오고 있다! 빨리…….』

기관장의 뒷말은 더 이상 이어져 오질 않았고 대신 기관 소음이 적어진 걸로 보아 엔진이 정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화물투하!』

선장의 지시가 떨어짐과 동시에 일등항해사와 갑판장의 뒤를 따르던 부원들이 가까스로 원목덩어리 사이사이로 접근하여 와이어를 절단하기 시작했고, 일부 부원들은 절단용 도끼로 와이어로프를 쳐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해수가 온통 떠받치고 있는 원목 덩어리는 쉽사리 굴러 떨어지지 않은 채 조타실의 경사계 바늘만 점점 더 기울어져 가기만 했다.

원목을 결박시키고 있는 와이어로프가 절단기에 의해 한 가닥 두 가닥씩 잘리어져 나가자 원목덩어리도 하나둘씩 이글거리는 파도 속으로 굴러 떨어졌지만 투하된 화물의 양과 속도는 A호의 경사 속도와는 비례가 되질 않았다. 거의 15도까지 기울어져 버린 A호의 복원력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갑판상에 적재되어 있는 원목덩어리 대부분을 해상 투하시켜야 됨에도 불구하고 이제 겨우 조타실과 가장 가까운 5번 상갑판에 적재된 원목 덩어리만이 굴러 떨어지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젠 몸을 지탱하기조차도 힘들었다. 기관실에서는 선저 전체에 연결된 발라스트 탱크의 모든 밸브를 열고 해수를 주입시켜 상실된 A호의 복원력을 되돌려 보려고 전력을 기울였지만 갑판으로 밀고 들어온 파도의 양과는 비교가 되질 않고 있었다. 경사계의 바늘이 20도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선장은 기울어져가고 있는 바늘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긴 한숨을 토해내며서 나직히 말했다.

『조난발생, 구조요청, 총원 퇴선준비!』

나는 선내와 갑판을 동시에 연결하는 마이크 폰을 집어 들고 선장의 지시사항을 전했다.

 

□ 자료출처 : <월간 海바라기> 2018년 11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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