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4)

등록일2020-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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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4)

송 운 종 Ⅰ 신아해운 1항사

 

우리가 A호에서 탈출한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어느 바다 위까지 떠밀려 왔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묻지 않았고 또한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희뿌연 하늘이 두 번째로 밝아 오기 시작할 때서야 파도와 바람이 수그러들고 스콜마저도 멈추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파랑의 질투가 파랑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면서 다시 수평선을 내보이기 시작한 것은 A호에서 퇴선하고 난 뒤 이틀이 지난 새벽부터였다.

비상통신기를 가슴에 껴안은 채 한번도 팔을 풀지 않았던 통신장의 양팔은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각자의 몸을 묶었던 허리며 다리도 로프의 장력에 의해 커다란 구렁이와 같은 시퍼런 자국이 모두에게 각인되어 있었지만 그저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이날 아침, 수평선 위로 나타난 항행선 한척을 처음으로 발견할 수 있었다. 파도 속에는 오직 구명벌의 중심만을 유지하는데 온 정신을 쏟느라 항행선은커녕 그림자마저도 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파두의 계곡 속으로 굴러 떨어질 때 바로 우리 옆으로 항행선들이 지나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린 유유히 항해중인 배를 향해 로켓트 신호탄을 쏘아보았지만 플라스틱 덮개마저 문드러진 신호탄이 작동될 리가 없었다. 통신장은 비상 통신기로 S.O.S 모르스 신호를 타전하는가 싶더니 손바닥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아예 통신기며 신호탄 잔해를 바다 속으로 던져 버렸다. 바닷물이 스며들어 신호탄은 물론이고 통신기마저도 아예 먹통이 되어 버린 것이다. 통신장의 행동에 댁해 아무도 말이 없었다. 바닷물을 잔뜩 머금은 전자 회로판의 상태가 엉망이 되어 버렸을 것이라고 직감만 할 뿐이었다. 우린 양팔을 힘것 내저으며 목청껏 고함을 쳐 댔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와는 정반대로 항행선은 아무것도 못 보았다는 듯이 우리 곁을 유유히 미끄러지듯 나아가기만 했다. 우린 파도 속에 느꼈던 절망감보다도 더 진한 서러움을 맛보며 모든 동작을 멈추어 버렸다. 끝도 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진 느낌과 함께 피로가 덤으로 온 몸뚱아리를 엄습해 왔다. 스치듯 지나가 버린 항행선의 꼬리만을 물끄러미 바라본 채 한마디 말도 뱉어내지 못한 우리는 서로의 얼굴마저도 보기 민망한 듯 모두들 눈을 감고 있었다. 어떠한 고독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외로움이 큰 바다 한가운데서 나뭇잎 같이 홀로 떠 있는 구명벌을 잔뜩 감싸고 있었다.

구명벌에 비치되어 있었던 모든 비상도구는 어디로 날아가 버렸는지 아무것도 없었다. 태양을 가릴 캔버스는 물론이고 비상용 식수마저도 통째로 날아가 버리고 없는 것이다. 남지나 해상의 뜨거운 태양은 사정없이 우리 모두의 머리위로 내리 쏟아졌다. 쓸개즙까지 토해 내며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안간힘을 쏟았던 어제와는 달리 바람 한 올 백파 한 점 일지 않는 호수 같은 바다위로 쏟아져 내린 태양의 따가움은 파도와 싸울 때와는 비교가 되질 않았다. 손마디 하나 꿈쩍 못할 정도로 머리위에서 쏟아지는 뜨거움은 금방 우리 모두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머리칼이며 얼굴, 입술, 심지어는 귓바퀴에서도 소금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사면팔방이 온통 넘실대는 물이건만 씨톨만한 목젖이나마 축일 한 방울의 물은 어느 곳에도 없었고 그나마 겨드랑이에 숨어 있던 이끼 같은 수분마저도 뜨거운 태양이 사정없이 빼앗아 가 버렸다.

모두의 얼굴은 금세 발갛게 익어 시커멓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얼굴 한번 찡그리지 못한 채 온 몸뚱아리를 그대로 태양에게 내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눈썹은 물론이고 입술 사이의 미세한 부분에서 조차 소금 꽃이 하얗게 피어났다. 나는 살짝 혀를 움직여 입술을 핥아 보았지만 혓바닥에 묻어 나온 건 짭짤한 소금꽃 여운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입술을 핥지 않았다. 그것은 목구멍에 남아 있는 습기나마 태양에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마저도 뜰 수가 없었다. 눈동자를 감싸고 있는 눈꺼풀에서도 소금꽃이 피어나와 눈알이 쓰려옴과 동시에 목구멍마저도 따가워지기 시작했다. 숨을 쉴 때마다 콧구멍으로 들어온 태양의 혀끝이 목구멍을 짓눌렀다. 모두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웅크린 채로 양팔 속에 콧구멍을 감추어 태양의 혀끝을 피하고 있었다.

중천으로 떠오른 태양이 수평선으로 넘어가면서 히므끄레한 어둠이 깃들기 시작할 때 우린 다시 항행선을 발견했지만 이 역시 우리 곁을 지나가 버렸고 우린 손하나 흔들어 보지 못한 채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우린 또 한척의 항행선을 발견했다.

이 역시 우릴 내팽겨쳐 버렸다.

완전한 어둠이 바다와 수평선을 감추고 하늘만을 나타내자 별하나 별 속속 들이에 우리의 몰골이 수없이 박히며 바로 눈앞에서 온 하늘을 뒤덮었다.

모두들 입을 활짝 벌린 채로 점차 커지고 있는 빈 하늘만을 멀거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알도 쓰리지 않아고 목구멍도 따갑지 않았다. 태양에 빼앗긴 수분을 별들에게 얻으려고 콧구멍을 활짝 열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추웠다.

따가울 정도로 뜨거웠던 낮과는 정반대로 추웠다. 구명벌에 부딪히는 잔물결들의 속삭임마저도 한기가 배어 있었다. 우린 서로의 몸뚱아리를 한껏 껴안으며 다시 한 덩어리로 만들어 굼벵이처럼 웅크렸다. 그래도 추웠다. 처음엔 발가락을 한껏 오므려 서로의 사타구니로 집어넣었고 다시 서로의 겨드랑이에 양팔을 넣어 넝쿨처럼 껴안았지만 역시 추웠다. 눈이 감겨 오기 시작함과 동시에 벌렸던 입도 저절로 닫혀졌다. 너무 추웠기 때문이다. 그리곤 턱이 달달 떨리기 시작하면서 잠이 왔다. 낮엔 온 몸뚱아리는 물론이고 목구멍마저도 토해 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밤이 되자 청하지도 않은 잠이 쏟아져 왔다. 아무리 눈을 떠보려고 해도 그냥 막무가내로 잠이 왔다. 이젠 어금니까지도 덜덜 떨리는데 눈꺼풀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번만이라도, 살짝이라도, 항해성들을 찾아 어느 바다 위쯤 떠밀려 왔는가 짐작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너무 추운 탓인지 도통 눈이 열리지가 않았다.

대신 껴안고 있던 손마디가 저절로 떨어지면서 나는 깊은 어둠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어디선가 무슨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기도 했지만 무슨 소린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아내의 속삭임 같기도 했고 딸아이의 옹아리 같기도 했다. 귓바퀴에서 살랑거리는 물결소리는 아련히 들려왔지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이젠 별 하나조차도 보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망각속의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가고만 있었다. 그저 무거운 몸뚱아리가 깊은 바다 속에 서서히 잠기면서 온몸이 솜이불에 파묻혀 있는 것처럼 아늑하기만 했다. 눈썹위로 별똥이 떨어져 스치고 지나간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손끝을 살며시 움직여 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무언가 한 움큼 잡혔지만 무엇인지 알새도 없이 곧장 빠져 나가 버렸다. 나는 다시 손끝을 움직였다. 이번에도 분명 무엇인가가 잡혔지만 곧장 빠져나갔다.

알 수도 없는 미끄러움이 손마디에서부터 온몸을 감싸 안더니 얼굴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나는 살며시 눈을 떠보았다. 그때 무언가 강한 불빛이 순식간에 지나감을 보았고 그 불빛 속에 파랑과 파광이 어우러져 반짝거림과 함께 다가옴을 볼 수 있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별빛과 파광이 어우러진 반짝거림이 강한 불빛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수평선이었다.

써치라이트(Search Light)의 강한 불빛이 별동이 되어 수평선과 함께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도 만져보고 싶었던 수평선이 이제사 별똥과 함께 다가와 나의 온몸을 감싸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두 손바닥에 힘을 주어 수평선을 한껏 붙잡아 보았다. 그러나 손바닥엔 아무것도 잡히질 않았다. 대신 어디선가 자운영 꽃향기가 날아왔다. 나는 두 손을 함께 모두어 또다시 잡아 보려 했지만 이번에도 잡히질 않았다.

대신 나의 얼굴을 만지며 품속으로 스며든 것이 무엇인지는 이제사 알 수가 있을 것 같아 발버둥을 쳐 대며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소리 대신 머리가 가벼이 젖혀지면서 나의 몸이 아주 아주 가볍게 흔들거리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것은 온 들판에 온통 하얗게 펼쳐져 있는 별같은 자운영 꽃속에서 한껏 사지를 벌리고 지지개를 켠 채로 누워 있을 때의 살랑거림과 똑 같았다.

 

□ 자료출처 : <월간 海바라기> 2018년 12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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