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고래의 사랑

등록일2020-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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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고래의 사랑

김부상ㅣ소설가

 

 

유즈노 사할린스크로 가는 비행기 안이었다. 7월 중순의 햇볕 아래 장비와 옷가방 등을 옮기느라 땀을 많이 쏟았지만 비행기에 탑승하자마자 몸이 상쾌해졌다. 랜딩기술은 러시아 비행사가 세계 제일이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어 언제 한 번 러시아 비행기를 타봤으면 했지만, 이번에도 서울에서 NOAA(미국해양대기청)의 해양수산국 소속 Dave W. Weller 박사를 만나 동행해야 했으므로 아시아나 항공을 이용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목적지는 사할린 북동부에 위치한 Piltun Lagoon(석호潟湖)으로 사할린에 도착해 다시 Okah 공항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 그곳에서 Piltun까지 육로로 4시간을 달려가야 하는 고단한 길이었다. 동호가 한국인으로 사할린 귀신고래 조사활동에 참여한 것은 그가 고래연구소 인턴시절이었던 2003년이었다. 데이브 박사를 처음 만난 것도 그때였다. 그 이후 해마다 그의 초청을 받아 동호는 사할린을 방문했다. 다름 아닌 미국-러시아 연합 귀신고래 서부계군 조사사업이었다.

동호와 고래와의 인연은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로부터 시작되었다. 대곡리 암각화는 대곡천과 맞닿은 하나의 거대한 수직 바위면에 집중적으로 그려져 있다. 인류 최초의 고래어로활동 그림으로 인정받는 선사시대 유물이 공식적으로 학계에 보고된 것은 1971년 12월이었다. 대곡리 암각화가 그려진 바위는 해가 뜨는 방향이 아닌 북쪽을 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연중 햇빛과 조우하는 시간이 극히 짧거나 겨울에는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햇빛이 가장 길게 머무는 시기는 6월과 7월이지만, 여름철 인근 사연댐의 수심 변화에 따라 물에 잠겼다 드러났다 하는 벽면은 언제나 어두운 먹빛이었다. 대학생이었던 동호가 암각화의 탁본이나 연구논문 등을 열심히 찾아보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동호가 고래연구에 사로잡히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고대 한국 동해안의 원주민들이 이미 신석기시대에 창을 사용하여 집단적으로 고래사냥을 하였고, 그림에 등장하는 고래의 종류만도 북방긴수염고래, 귀신고래, 혹등고래, 향고래, 범고래 등 무려 8종류였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그림의 고래잡이배에는 무려 20여 명의 선원들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졸업 후 10년 이상 바다 위를 떠돌며 고래의 흔적을 연구하고 있는 그는 지금도 반구대 암각화와의 만남이 운명적이었다고 믿고 있다.

 

- 도브로이 젠!

공항에 나와 기다린 사람은 사할린 환경단체 소속인 디마였다. 2년 전 러시아 조사요원으로 필툰 등대에 왔던 그녀는 동호와는 구면이었다. 디마가 팔을 벌려 달려들며 아직 총각인 그의 목을 껴안았다. 30대 초반인 그녀의 품은 넉넉하고 따뜻했다. 데이브는 채식주의자다. 그는 악수만으로 그녀의 환대에 답했다.

뜻하지 않게 데이브가 부친 짐이 도착하지 않았다. 그 일로 두 사람은 사할린 환경단체 사무실을 들락거리며 유주노사할린스크에서 하릴없이 3일을 허비해야만 했다. 필툰으로 가는 일에 신경이 곤두선 두 사람은 끼니때마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달리 갈만한 식당도 없어 고려인이 운영하는 한인식당을 자주 찾았는데, 김치찌개나 부대찌개거나 고기를 모두 빼달라는 데이브의 요구에 동호는 더욱 난감했다.

NGO 사무실을 가지 않을 때는 함께 호텔 앞 공원을 서성거렸다.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고래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다. 동호가 일주일 전에 찍었던 혹등고래 동영상을 데이브에게 보여주자 그의 반응이 의외로 뜨거웠다.

- 오, 놀라워라! 혹등고래는 이제 한국 연안에서 멸종된 것으로 아는데...

혹등고래는 여름에 캄챠카반도 인근에서 섭이활동을 하고 겨울에는 일본의 오가사와라 쪽으로 내려와 번식한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이것은 최근의 연구결과다. 정작 그가 놀란 것은 여름인 7월에 혹등고래가 동해 연안에 나타났다는 사실이었다. 아래턱 복부에서 항문까지 폭이 넓은 주름이 15-35개 깔려 있는 이것은 반구대 암각화에도 선명히 그려져 있었다. 등 쪽은 기저가 넓은 큰 혹 위에 등지느러미가 얹혀있는 모습을 띤다. 그러므로 미국과 러시아 학계에서 동해안으로 남하하는 귀신고래만을 한국산이라 명명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북서대서양의 귀신고래는 17-18세기에 멸종되었지만 북태평양의 그것은 학살의 시대를 지나 비록 극소수지만 아직도 생존하고 있다. 한국 연안에서 귀신고래가 마지막으로 어획된 자료는 1965년도의 5두(頭)다. 그 후 귀신고래를 보았다는 기록은 1977년 1월 방어진 앞바다에서 2마리를 목격한 포경선 대양호(大洋號) 선장의 증언이 유일했다. 그러므로 한국산 귀신고래는 멸종된 것이 아니라 한국 연안에서 사라졌다고 해야 옳다.

- Dave, 한국에서는 Grey Whale을 통상 귀신고래라 부르는데 그 연유를 아는가?

- 영국의 고래잡이들은 예로부터 ‘악마의 물고기(Devil fish)’라 불렀다. 이는 자기를 쫓고 있는 무리를 향해 가끔씩 머리를 돌려 보트를 덮치거나 선원들을 공격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지. Grey는 회색빛이 도는 몸체의 색깔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네가 알고 있는 그 연유는 뭔가?

- 예전 울산 사람들은 돌고래라 불렀다. 이는 접안하여 돌 사이로 지나다니는 습성 때문에 그렇다. 다른 한편 19세기에 한국 연안에 자주 출몰했던 미국 포경선원들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 그들이 ‘이 고래는 겁이 많고 영리하여 포경선이 쫓으면 잠수하여 수중에서 마치 귀신처럼 감쪽같이 사라져 부상 위치를 예측하지 못한다.’고 기록했거든. 또 다른 의견은 머리와 꼬리 부위에 따개비나 고래이 등 부착생물이 많아 그 모습이 기괴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고도 해. 그러나 귀신고래란 명칭은 암초가 많은 곳에서 귀신처럼 출몰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 정설이야.

- 와-우! 미스터 김, 당신을 한국 제일의 귀신고래 전문가라고 부르고 싶어.

 

공항에서 데이브의 짐을 찾아 두 사람이 프로펠라 엔진의 소형 비행기를 타고 오하로 출발한 것은 오전 10시 경이었다. 비행시간은 약 2시간. 바람이 불지 않아 낡은 엔진소음만 아니었다면 쾌적한 비행이었다. 공항에는 등대지기 할아버지 유리가 짚차를 타고 와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은 4시간이 소요되는 필툰 등대를 향해 다시 먼 길을 떠났다.

공항을 벗어나자마자 시작되는 비포장도로를 동호는 늘 선사시대로 접어드는 숲길이라 여겼다.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 오늘도 숲속 어디선가 사냥을 끝낸 고단한 짐승들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차바퀴에 짓눌려 패인 흙길이 간밤에 호랑이에 쫓긴 멧돼지들의 발자국인 양 투박하고 거칠었다. 이 길을 지날 때마다 동호는 자신이 호랑이 발자국을 찾아 극동의 타이가(원시림)를 유랑하는 외로운 사냥꾼이란 생각이 들곤 했다. 낮은 구릉을 수없이 넘으며 차창으로 스치는 여름의 숲들을 마치 사진을 찍듯 머리에 담았다. 소나무, 피나무, 굴참나무, 낙엽송, 자작나무,.. 호랑이가 지나간 습하고 어두운 오솔길. 숲이 비워둔 사냥꾼들의 야영지. 그 옆을 졸졸거리며 흐르는 시냇물. 졸음과 함께 찾아온 그의 분별없는 상념을 깨뜨린 것은 데이브였다.

- 미스터 김, 저길 봐! 귀신고래야!

그가 가리킨 손가락 끝에 한 떼의 물새들이 날고 있었고 그 뒤로 작은 물보라가 일었다. 목시(目視)거리를 감안하면 4미터 가량의 높이로 좌우로 갈라지는 풍성한 분기였다. 그 짧은 순간, 갯바위 같은 머리를 살짝 수면 위로 드러낸 유영행동까지 틀림없는 귀신고래였다.

숲길이 끝나고 어느새 푸른빛의 바다가 나타난 것이다. 목적지인 필툰 석호(潟湖)였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였다. 찻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유리가 도착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곧이어 등대 쪽에서 보트가 움직였고, 잠시 후 남녀가 섞인 세 명의 조사원들이 보트에서 내리며 환한 웃음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악수를 나눈 뒤 조사원들이 내민 보드카와 빵으로 선 자리에서 함께 축배를 들었다.

 

…………(하략)…………

 

□ 자료출처 : <해양과 문학> 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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