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도 사나(정경수)

등록일2020-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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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도 사나

 

며칠 전 부산항 5부두에 정박하고 있던 총 톤수 4,500톤급 냉동운반선 흰긴수염고래호에 이등항해사로 발령을 받은 이방인은 출항 시간을 하루 앞둔 날 취미생활을 위한 각종 릴낚시 용품을 구입하러 자갈치에 들렸다. 어선에 종사하는 부원들에게 ‘절대안전’ 또는‘안절대’라는 별명으로 불리곤 했던 그는 낚시도구 매장에서 마주친 부원들은‘헤라클레스’의 근육형 육신을 갖춘 갑고수 배태웅과 ‘헤르메스’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근육질 육신을 자랑하는 일타수 윤명혁, 그리고 언제나 ‘벙거지’ 모자를 멋지게 쓰고 다니는 역시 윤명혁과 동급의 일타수 라성환 등 몇몇인가였다. 그런데 그때, ‘헤르메스’가 그의 약혼녀 ‘소피아 로렌’을 빼닮은 설여운을 소개하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도록 했던 것은 왠지 이방인으로서 미모의 여배우 앞에서 가슴 부풀리는 행운을 얻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우연히 그런 ‘소피아 로렌’과의 만남은 인상적인 이름 그대로 유명 여배우를 뵌 것 같은 어쩌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운명적인 인연이었다고 할까.

글쎄 ‘소피아 로렌’은 낚시 마니아였다. 그녀가 객선부두 제1 터미널에서 약혼자 ‘헤르메스’와 함께 머물었던 것은 제주행 여객선의 출항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터였다. 물론 그녀의 목적지는 ‘헤르메스’와 또 한 번의 랑데부를 즐길 수 있는 곧 흰긴수염고래호가 경유할 제주도 남단 마라도였다.

그러니까 견우와 직녀와 같은 숙명적인 해후상봉(邂逅相逢)이야 아니지만 그들은 계약기간 채 1년도 되지 않은 겨우 며칠 동안에 연거푸 만날 수 있게 예정돼 있었던 셈이다. 그렇듯 그들에게 주어진 하루도 아닌 정박기간 몇 시간 동안이지만 회자정리(會者定離)와 같은 막간의 연출은 그야말로 우연찮은 대박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약속은 그 몇 시간 동안마저 순탄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흰긴수염고래호의 마라도(馬羅島) 입항 직전 인근바다에 기상주의보가 내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어도(離於島) 주변 해역에 발단된 저기압 중심권의 영향은 근원지로부터 149km 떨어진 마라도까지 폭풍 주의보의 여파가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치 못한 대단한 저기압 권이었다. 그로 인한 흰긴수염고래호의 마라도 입항은 취소 돼버리고 말았던 게 그랬다.

폭풍우를 동반한 어마한 세력의 저기압 중심권의 향방은 72시간 전 마라도 주변이었다. 물론 그곳에서 기상상태를 예의주시하면서 대기해야만 되는 피항지(避航地)로서는 비교적 파도가 잔잔한 인근의 영역이었다. 곧 흰긴수염고래호가 불시착할 수밖에 없는 뜻밖의 장소는 마라도 부두에서 가까운, 이를테면 폭풍전야의 정적 지역이었다.

하여튼 ‘소피아 로렌’과의 약속을 예정대로 지킬 수 없게 된 ‘헤르메스’는 어쩔 수 없이 정박당직사관 이방인의 선처를 우선 구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기상주의보가 내린 통제구역이지만 ‘헤르메스’로서는 흰긴수염고래호에서 마라도 부두 해변으로 은밀히 헤엄쳐 나가야만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수영만큼은 자신이 없지 않는 젊은이로서 바로 연인을 곁에 둔 채 영어의 수인처럼 무작정 선체에 갇혀 마냥 먼 산만 바라보듯 침묵만을 지켜야 되는 것일까? 차라리 긴긴 밤 잠 못 이룰 형벌을 열정의 젊은이에게 안기는 안타까운 고뇌와 고통에서 어떤 가능성만 비친다면 당장 벗어나고 싶었다. 에로스를 향한 젊음이의 패기로써 감히 십자가를 짊어질 행위를 감내하면서 파도 밭을 가르고 나가야만 될 노릇이니까.

만약 항구를 바로 앞에 둔 젊은이가 엉뚱한 제약으로 그 땅을 밟아야만 될 연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경우, 백년이란 삶을 누릴 한 평생 겨우 30년에 불과한 거친 파도 밭에서 그 한 해 동안 그나마 주어지는 기회는 결코 축복이야 아닌 불행의 연속이 아닐 수 없었다. 그야 유급휴가의 날수가 당사자에게 배제되지 않은 외려 보너스 만큼 절실해지는 그 시간이다.

어쨌든 며칠 전부터 운 좋은 기회로 점철되던 ‘소피아 로렌’과의 만남의 약속은 ‘헤르메스’의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그날 밤이었다. 만약 그 시간 ‘헤르메스’로서는 고귀하기 그지없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경우 더 무엇을 떠올리기조차 싫을 만큼 불행한 일이었다. 숫제 통제된 해상에서 제반 규칙과 질서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로써 불행은 더욱 진하게 느껴지는 고통스런 고뇌의 중첩이었다. …………(하략)………………

 

□ 정경수, ≪삶터문학≫ 신인상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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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수록 지면 : <해양과 문학> 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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