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의 노래(남순백)

등록일2020-06-25

조회수76

 

파도의 노래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세계의 어느 국가(國歌)에도 바닷물을 앞세우는 나라는 없다. 우리 선배들은 한반도의 미래를 일찍부터 바다에 두었다. 바다는 대대로 우리의 염원이 서린 곳이다. 그래서 우리들을 향해 좁은 반도(半島)를 벗어나 그 바다를 개척하라고 명령했다. 또 그 바다를 통해 세계로 뻗어나가라고 계시를 내렸다.

 

시월이 지난 북태평양으로 난 뱃길은 춥고 파도가 높았다. 따뜻한 가족의 품을 멀리하고 떠나기 싫은 항구를 나서는 기분은 우울하고 분위기는 을씨년스러웠다. 난바다로 나아갈수록 살을 에는 찬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어 닥쳤다. 미국 서부해안을 향하여 가는 우리 배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흔들리지 않고는 도저히 배겨내지 못하겠다는 듯 배는 달려드는 파도에 몸을 내준 채 마구 요동쳤다. 자포자기를 한 듯 앞뒤로 흔들리고 좌우로 흔들리는가 하면 아래위로 널뛰기를 하듯 춤을 추었다. 키를 바로 잡았지만 키를 잡은 손도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이번 항차에는 화물이 많지 않았다. 오히려 그쪽에서 싣고 올 긴급 화물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급히 떠난 뱃길이기도 했다. 배수톤수가 이만 톤이 넘는 큰 배였지만 수심이 수천 미터에 달하는 바다 위에서는 한갓 가랑잎에 불과했다. 우리는 시간에 쫓겨 솔리드 발라스트를 적재하지 않고 출항한 것을 후회했다. 우선 발라스트 탱크에 물을 가득 채웠다. 배를 최대한 가라앉혀 배의 중심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바다의 요동은 우리의 노력을 허탄하게 만들었다.

며칠이 지나도 날씨는 좋아질 줄 몰랐고 악천후는 더 심해져갔다. 검은 하늘은 검푸른 파도와 맞붙어서 수평선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산더미같이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와 그 파도가 공중에서 부서지는 흰 포말이 눈에 띌 뿐이었다. 그 검은 파도위로 천둥소리가 요란하고 이따금 번개가 전쟁터의 포연처럼 번득이고 있었다. 높은 파도사이로 소름끼치는 바람소리와 함께 파도의 파편들이 선창을 때리고는 흩어져 내리고 있었다. 시야는 점점 어두워져 우리 배는 마치 파도의 산맥 속에 갇힌 꼴이 되었다.

아직까지 보지 못한 심한 악천후였다. 백전노장을 자랑하던 베테랑 선원들도 두 손을 들고 밥도 먹지 않았다. 구석마다 처박혀서 아랫배를 움켜잡고 토악질을 해대며 끙끙대고 있었다. 선원들 사이에도 웃음이 없어지고 냉랭한 찬바람만 돌고 있었다. 모두의 누렇게 뜬 얼굴에 진한 두려움이 배여 있었다. 항해 사십 년 차인 나였지만 더럭 겁이 나며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런 경우는 잘 없었다. 겨울의 난바다. 그것은 바로 저승사자가 활개를 치는 죽음의 바다였다. 망원경을 꺼내들고 아무리 살펴봐도 물론 육지라고는 티끌도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선박도 없었다.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픈 곳이 밤이 되면 더 쓰려오듯이 바다가 바로 그랬다. 수평선을 희끗하게나마 밝히던 짧은 겨울 해가 꼬리를 감추자 파도는 더 높아지고 바람은 거칠어졌다. 심한 추위가 마음과 몸을 쪼그라들게 했다. 선원들은 아무도 갑판으로 나가지 않았다. 흔들리는 배는 더 이상 나를 지켜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한없이 나약해지고 기댈 곳은 없었다. 나의 입에서는 저절로 기도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기도는 점점 길어지고, 간절해졌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이상했다. 바다사나이의 입에서 나약한 여인들처럼 기도소리라니? 기도는 약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제발 이번 항해만 무사하게 해 준다면, 다시 그리운 땅을 밟게 될 수 있다면 어떤 힘든 일이라도 다하며 선하게 살겠다는 맹세였다. 그건 성난 바다와 파도 그리고 그들을 굽어보고 있는 하늘에 드리는 기도 제목이었다.

자정을 넘기도록 두려움에 한잠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을 때였다. 입으로는 쉴 새 없이 내가 만든 간절한 기도가 외워지고 있었다. 이때 이상한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기도에 응답이 온 것이 틀림없었다. 갑자기 뱃전을 때리던 파도소리가 멈췄다. 선창을 문풍지처럼 흔들어대던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배의 요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어떤 음성이 나의 귀에 들려왔다. 그 음성은 쇠미했으나 분명했다. 큰 물결이 흘러가는 소리와도 같았다. 어쩌면 수많은 우레가 한꺼번에 울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어머니가 불러주는 자장가와 같은가 하면 연인이 귓가에 속삭이는 밀어 같기도 했다. 끊어졌다가는 다시 들리는 그 음성은 장엄한 오케스트라의 선율 같기도 했고, 때로는 수천 명이 함께 부르는 합창 같기도 했다. …………(하략)………………

 

□ 남순백, 2005년 ≪청람문예≫ 신인상 등단

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작품 수록 지면 : <해양과 문학> 23호

g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