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잡이(옥태권)

등록일202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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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잡이

 

혹시 ‘줄잡이’란 직업에 대해 알고 계시는가? 아무리 직업 종류가 많다지만, 줄을 잡는 게 직업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지 모르겠다. 농촌 출신일 경우 모심을 때 못줄 잡는 사람을 연상할지 모르겠으나 그건 아니다. 김달중씨가 줄잡는 것으로 밥을 먹고 사니깐, 엄연한 직업임에는 분명하다.

여기서 줄잡이란 입출항하는 배의 계류색을 잡는 소위 ‘라인맨(line man)’을 일컫는다. 우리 말로 굳이 옮기다 보니 ‘줄잡이’가 되고 말았지만, 하긴 딱히 뭐라고 부르겠는가. 배가 부두로 접안 할 때는 끝에 납덩이 추를 단 히빙라인이란 가느다란 줄을 배에다 던져, 배에서 히빙라인에다 굵은 밧줄(무어링 라인)을 묶어주면 ‘영차, 영차’하고 당겨서 부둣가의 말뚝(팟)에 걸어주고, 출항할 때는 그 줄을 풀어주면 되는 일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까짓 일’이라고 치부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세상에 돈 버는 일치고 날로 먹는 일이 어디있던가. 달중씨 표현을 빌면, 배란 것들은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 벌건 대낮에 들어오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항해사란 족속들이 배 조종을 어떻게 하길래, 입출항 시간 하나 제대로 맞추지 못 해, 일주일에 최소 두 서너 번은 새벽에 줄을 잡거나 풀어주기 위해 똥개 훈련을 해야한다는 게 중달씨의 불만이었다. 게다가 겨울철 새벽, 부두가에 시베리아에서 몰려오는 면도날섞인 칼바람을 맞을 때마다 ‘아무리 돈도 돈이지만, 이 땡새벽에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가’는 생각이 들 때는 꽉 때려 치워버리고 싶은 때도 있다는 거였다.

그러고보면 인간이란 참으로 간사한 동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달중씨는 가끔 하곤한다. 제대 후 3년 가까이 눈칫밥을 먹을 때는― 그 때는 하는 일도 없으면서 뱃 속에 무슨 거지새끼라도 들어 앉아 있는 것인지 밥 때만 되면 귀신같이 뱃가죽이 등에 가서 촥 달라 붙던지―자리만 보장되면 환경미화원 자리라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이 말이다. 모 지자체에서 환경 미화원 여섯 명 모집에 700명 가까이 몰렸는 데 그 중에 절반 이상이 전문대졸 이상의 학벌 소유자라는 멘트와 함께, 가마니처럼 생긴 걸 들고 뛰는 시험장면을 방영할 때는 가슴이 쓰리다 못해 아팠다. 한편으론, 최종합격을 한 그 친구들이 은근히 부럽기조차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다들, 학벌들은 왜 그렇게 좋고, 또 요상한 전공들은 그렇게 많던지. 달중씨가 전문대학을 들어갈 때만해도 컴퓨터과란 간판만 하나 붙이면 취직은 걱정 없다던 말을 철석같이 믿었었다. 막상 제대를 하고보니 컴퓨터과 출신들이 완전히 찬밥 신세였던 것이다. 보안 및 네트워킹 전문가와 프로그래머는 여전히 잘 팔렸지만, 만들어진 프로그램만 사용할 줄 아는 나머지 컴퓨터과 전공자들에게 더 이상 일자리는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다른 전공 출신자들도 엑셀 파워 포인트에 CAD는 물론 포토샵이나 3D까지 만지는 판국에, 컴퓨터 사용하는 것 말고는 다른 건 죔병인 달중씨같은 사람을 기다리는 업체는 없었던 것이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사돈의 팔촌까지 동원해서 가까스로 구한 자리가 이 자리였다. ‘항만노조’ 라는 이름이 좀은 꺼림칙했지만, 주변에서 보는 눈길들이 달라지자 이내 애착심을 가지게 되었다. ‘히야, 그 어렵다던 데를 어떻게 들어갔는지 비결이나 좀 알자’는 얘기를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번에 큰 신세를 졌다. 언젠가는 네가 꼭 갚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만 들었던 달중씨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란 게 하고 많은 일 중에 ‘줄잡이’라니. 하긴 줄을 제대로 던지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 줄을 잡으러 나갔을 때, 서너 번 만에 간신이 히빙라인을 배로 던져 올리자 배꼽을 잡던 노르웨이 선원들에게 쪽이 얼마나 팔렸던지, 마치 달중씨 자신이 한국인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것만 같았다. 생각다 못한 달중씨가 비번날 히빙라인을 집에까지 가져와, 하루 왼종일 연습을 한 뒤에 간신히 창피를 면할 수 있었다. 지금에야 한 번만에 간단히 던져 올려서 엄지 손가락을 세워보이는 외국 선원들이 있을 정도로 되었지만 말이다. 그럴 땐 마치 국위선양이라도 한 것 마냥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하지만, 내놓고 ‘줄잡이’입니다 할 자부심은 생겨나지 않았다. 언젠가 텔레비전에 소개되었던, ‘신문던지기의 달인’과 다를 바 뭐 있겠느냐는 자조적인 생각을 할 따름이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늘 가까운 데 있는거라고, 근엄한 목사같은 얼굴을 지닌 고등학교 윤리 선생님이 얼마나 강조 하셨던가. 그런데 선생님, 다 좋은 데 그 놈의 행복이란 놈이 최소한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나 가르쳐 주지 그러셨어요. 아무리 눈을 크게 떠 봐도, 매일 똑같은 일상의 반복만 있을 뿐인데 여기서 무엇을 어떻게 찾는단 말입니까. 연애라도 하면 괜찮을 거라구요. 서른 하고도 하나가 된 나이에, 요새 젊은 애들이 좋아한다는 ‘완소남’도 ‘훈남’도 아닌 그저 서면이나 남포동에 가다가 보면 만났는지 생각도 안나는 그런 평범한 외모에, 한국인 평균키에 평균이상의 몸매와 무게, 거기다가 ‘저 부두에서 줄잡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 어느 여잔들 좋아 하겠느가. 달중씨의 요즘 최대 고민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모처럼 휴일과 비번이 겹친터라 잠이나 늘어지게 자려고 했던 달중씨에게, 고등학교 동창녀석의 아들 돌잔치에 참석하라는 협박성 전화가 걸려온 건 바로 어제 저녁이었다. 몸살이 났다는 핑계를 둘러댈까 하고 생각 중이었는데, ‘우리 와이프 친구 중에 미혼이 절반이 넘는 다는 거 참고해라. 내가 너들 불쌍한 청춘들 구제해 주려고, 무리를 해서 해운대 호텔 뷔페를 잡지 않았겠냐.’ 동창 녀석의 설레발에 ‘혹시나’하는 마음이 뱀처럼 똬리를 틀기 시작한 거였다. ‘뭐, 특별한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라며 덜컥 약속을 해놓고는 이내 후회했다. 신부 우인들이 ‘킹카’운운하는 동창 녀석들의 말에 속은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명함을 건네 준 녀석들은 전화도 받고 더러 그렇게 해서 연결도 된 모양이지만, ‘줄잡이’라고 명함에 새길 것인가. 아니면 항만공사 소속이라고 사기라도 쳐야 한단 말인가. 괜히 잠잘 시간만 손해 보는구나 싶었다.

주말이라 밀릴 줄 알았던 차가 신기하게도 잘 빠진 바람에, 잔치 시간보다 무려 40분이나 일찍 도착을 한 거였다. 일찍 들어가기가 뻘쭘했던 달중씨, 하릴없이 해운대 백사장으로 내려갔다. 피서철이 지난데다 곧 태풍이 온다는 경보까지 방송된 터라, 반대 편에 파도밟기를 하는 서너 명의 아가씨를 제외하고는 인적조차 드물었다. 서른 한 살의 여름도 이렇게 가는구나. 밀려와서 밀려가는 파도처럼, 아까운 청춘의 시간들이 그렇게 가는구나. 가슴 한 켠이 ‘쏴’해지는 순간, ‘사람이 빠졌다’는 앙칼진 소리가 들려왔다. 파도밟기를 하고 있던 처녀 중의 한 명이 빠진 모양이었다. 일행들은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굴리고 있었다. 달중씨는 자기도 모르게 그 쪽을 향해 냅다 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지만, 거센 파도 탓에 아무도 선뜻 바다로 뛰어 들지 못하고 있었다. 뛰어 가며 생각하다보니, 자기도 수영 못하는 건 매일 반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언뜻, ‘줄’이 생각났다. 펄럭거리던 플랭카드 몇 개를 라이터불로 떼어 잇고는, 끝에 돌멩이를 묶었다. 그리고는 히빙라인을 던지던 평소의 습관대로 조심스럽게 원을 그리다 물에 빠져 허우적 대던 처녀에게로 던졌다.

‘아저씨가 던진 줄이 아니었다면, 전 아마 이 세상 사람이 아닐거에예요. 평생을 두고 이 은혜를 꼭 갚을게요.’ 한참만에 깨어난 그녀가 던진 첫마디였다. 그녀 손을 꼭 잡은 달중씨는 이 손을 영원히 놓치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런 달중씨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아가씨 또한 잡은 손에 살그머니 힘을 주었다.

 

□ 옥태권, 1994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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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수록 문예지 : <해양과 문학> 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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