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아일랜드(박영애)

등록일202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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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아일랜드(Plastic Island)

 

나: 앨버트로스와 만나던 날

번히 눈을 뜬 채 누워있으니 몸뚱이가 방바닥을 뚫고 땅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눈만 뜨면 시계부터 보던 일이, 목구멍을 넘어오는 말들을 꾸역꾸역 삼킨 채 식구들 아침밥을 준비하고 허둥지둥 출근하던 일이 수백 년 전의 일처럼 아득했다. 이제는 해가 중천에 떠도 꼭 해야 할 일도 가야 할 곳도 없었다. 그런데도 느긋해지기는커녕 내가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섬처럼 여겨졌다.

누운 채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켰다. 리비아를 떠나 이탈리아로 향하던 난민선이 전복되어 구백여 명이 지중해에서 숨졌다는 뉴스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모로 돌아누웠다. 출발지였던 리비아 해안으로 되밀려간 난민들의 주검이 나를 쳐다보며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만 같았다. 그들의 주검을 적시는 잔물결 위로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에 등장했던 르완다 난민들의 주검과 석 달째 누워 빈둥대는 내 모습이 한데 뒤엉겨 어룽거렸다. 종종 지구를 덮치는 태풍이나 지진보다 인간이 더 문제가 아닐까 싶은 순간이었다.

나는 머리맡에 있던 전병을 봉지 채 곁에 끌어당겨놓고 파삭거리기 시작했다. 쌉싸름한 파래가루가 박힌 전병이 맛봉오리들을 부풀리며 목구멍을 넘어가자 피부 아래 숨은 혈관들이 술렁거렸다. 그러자 과자봉지를 들고 퇴근한 아버지가 대문을 연 나를 번쩍 안아 올리던 일이 떠올랐다. 󰡔정글북󰡕에 나오는 늑대소년 얘기를 재잘대던 저녁이, 내가 모은 예쁜 단추들을 어머니께 보여주던 시간이 남실대기 시작했다. 그 무렵의 나는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재미를 알기 시작해서 용돈만 받으면 서점으로 갔다. 새로 산 안데르센동화책을 보듬고 집으로 뛰어가 초인종을 눌러놓고, 누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책장을 펼치면 혀가 촉촉해오면서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내가 미운 오리새끼나 백조로 변한 오빠들을 구하기 위해 벙어리 행세를 하며 쐐기옷을 짓던 엘리제공주로 변한 것만 같았다.

그러자 웬만하면 입을 다물고 지내던 날들이 떠올랐다. 네가 일찍 집에 올 생각은 안하고 밖으로 나도니 그렇지. 시어머니는 아이가 열이 나거나 집안에 언짢은 일이 생길 때면 그렇게 구시렁거렸다. 다 네 탓이야, 네 탓! 남편까지 덩달아 고함을 치며 문짝을 쿵쾅거리면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빠지기 힘든 회식이었다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그때가 언젠데 아직 이러느냐고 말할만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다들 그러니 어쩌면 내 탓인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조심하면 되겠지 싶어 하고 싶은 말도 막막한 내 감정도 숨긴 채 살아내야 했던 날들.

하필 그 무렵은 수업의 내실보다 ‘보여주기’에 혈안이 된 관리자를 만나 학교생활마저 힘들었다. 수업을 마치고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내게 퍽 소중했다. 그러나 폐품활용시범학교발표회가 끝날 때까지는 교사용지도서를 볼 여유조차 없었고, 수업시간에는 학생들과 함께 갖은 폐품으로 교실 안팎에 전시할 성과물을 만드느라 바빴다. 수업을 마친 교사들은 수천 개의 요구르트 병으로 만든 로봇에 락카칠을 하고 각종 보고서를 써내야했다. 승진을 위해 점수가 필요한 사람 외에는 다 투덜댔지만 누구도 그것이 수업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을 만큼 법석을 떨 일인가를 따지지 못했다. 뱉지 못한 말들은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며 유령처럼 떠돌았다.

낮에 그렇게 지내고 집에 들어서면 목이 메면서 내가 황금빛 락카를 뒤집어 쓴 로봇으로 변한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면 나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아무래도 엉뚱한 궤도에 들어선 기차에 올라탄 것 같았다. 하지만 펄쩍 뛰어내릴 용기는 없었다. 그렇게 소진되어가는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 힘들어 밤중에 책 속에서나마 말 같은 말을 나누고 싶었던 날들이었다. 이거나 다려라! 공부는 너거 집에서 하지 와 여서 하노? 시어머니의 그런 야멸찬 말을 들을수록 나는 제대로 된 것들과 접촉하는 기쁨을 잃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시어머니는 내가 아버지 없이 자라 본데없고 혼수마저 제대로 해오지 않았다고 대놓고 흉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만한 일로 노인네에게 대거리하는 것도, 그래서 시끄러워질 것도 내키지 않았다.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 참자 싶었지만 내가 나를 살해해버린 것 같은 모멸감은 숨길 수 없었다. 그런 내 속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사람에게 거리를 두고 사는 것은 거북했다. ……………(하략)…………………

 

□ 박영애, 1996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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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수록 문예지 : <해양과 문학> 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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