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등(정미형)

등록일202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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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등

 

부두 근처에 오면 생나무에서 피어오르는 기름 냄새가 났었다. 불길에 검게 그을린 듯 번질거리던 검붉은 통나무들이 그 곳에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오래전 오직 이 부둣가에서만 맡아지던 원목 냄새는 비오는 날이면 더욱 짙었다. 아주 멀리 보르네오의 열대우림 숲에서 이 나무들은 온다고 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보르네오. 기름에 절어 번들거리는 원목들이 보르네오 섬 깊은 숲에서 베어져 먼 항해를 마치고 이곳 제 3 부두 부근의 빈 공터에 부려져 있었을 때, 그때 나의 아버지는 다시 원목을 싣기 위해 동지나해를 지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원목은 이곳 3 부두 부근의 황량한 공터에서 오래 부려진 채 몇 날, 몇 달을 보내다가 다시 부둣가 철로를 따라 화물열차에 실려서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그 날이 새벽인지 깊은 밤인지 알 수 없지만 이불 속에서 뒤척이던 나의 숨 쉬는 소리가 고요해지는 어두운 밤. 부둣가 철도 레일 위를 지나가는 규칙적인 소리에 실려 원목들은 옮겨졌을 것이다. 강원도나 경북의 공장지대로. 그렇게 배웠다. 그리고 기차소리와 원목 냄새와 기름의 흔적이 바로 부둣가의 아이들이 최초로 본 풍경일거다. 원목의 기름 냄새가 익숙한 아이들. 철로를 건너 작은 학교로 이어지던 부둣가 기차 레일 위로 검은 기름 흔적들은 뚜렷했다. 화살표처럼 그것은 바다 끝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때 그 부두의 담벼락에는 알 수 없는 영문자로 어떤 금지의 가위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몰래 담을 넘어 배에 선적한 물건들을 빼돌리는 밀수꾼들을 뿌리 뽑기 위해 그렇다는 얘기를 듣고 난 뒤 오래도록 나는 그 가위표를 떠올렸다. 이후 공포 영화 속에 출연하는 전기 톱 사나이가 가진 성능 좋은 전기톱을 보았을 때도 그 담벼락 위를 감은 철조망과 가위들을 떠올렸다.

밀수꾼들이 배에서 빼돌리는 물건들은 작아도 값진 것들이 많았다. 시계나 옷감이나 화장품 같은 것들. 또 누구도 본 적 없는 아프리카에서 온 원석의 보석 같은 것도 있었다. 모두가 소문이어지만 그런 것으로 한 몫 잡은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어쩌다 가끔 원목을 통째로 도둑맞은 이야기나 화물선에 숨어든 밀항자의 이야기가 있기도 했다. 또 무수히 들고 들어오던 희귀한 열대 식물 속에 이름 모를 독이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모든 것들은 어쩌면 기억하지도 못할 어떤 어슴푸레한 형체에 대한 이야기들인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부두가로 가끔 놀러가기도 했다. 바다를 낀 도시인 이곳에서 부두는 조금 오래 걷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갈 수 있었다.

“오늘 학교 마치고 네 시 반에 모여. 정발 동상 앞에서 만나자. 부둣가에 이상한 외국 배가 들어왔단다. 아주 크고 넓어서 배 위에서 축구를 해도 될 만큼 큰 배 말이야.”

늘 배에 큰 관심을 보였던 이 애가 배를 이미 다 본 것처럼 허풍까지 치고 있었다. 학교 안에서는 좀 어리숙해 선생님께 늘 혼이 났던 그애. 공부를 잘 못해서이기도 하고 책상 위에 걸터앉아 딱지치기를 하다 걸려서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집에 부모님이 안계시다는 것이 매를 벌게 한 것이다. 그 애 할머니가 싸준 도시락에 박힌 검은 콩처럼 얼굴에 점이 많던 승완이는 배라면 딱지를 치다가도 고개를 번쩍 들고 관심을 보였다. 그렇기에 그 애는 이 부두탐방 멤버의 주축이었다. 또 한 애는 한 학년이 높은 육학년으로 길거리에서 늘 뭔가를 수집하고 다니던 애였다. 신기한 간판이나 고물상에 버려진 철제 물건들. 놋쇠로 만든 손잡이들이나 반짝이는 수정구슬 같은 그 모든 것들. 그렇기에 이 육학년 노근이는 언제나 하루에 한번 정도는 부둣가에서 가서 정박해 있는 배와 그 부근의 건물들과 물건들을 한번씩 손보고 다녔었다. 하지만 육학년 노근이야말로 그때 우리 동네에서 알아주는 부잣집 아들이었고 그 집은 보기 드물게 지프 자동차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그 애의 수집벽은 대단했다. 가방 속에도 늘 주운 물건들이 있었으니까.

나는 좀 애매했다. 오직 이들과 한 팀이 되어 걸어서 삼사십 분이나 걸리는 이 부둣가로 가는 이유를 나도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승완이 할머니가 이 동네 오래된 시장에서 두부를 팔았고 어머니가 자주 내게 두부를 사오라며 심부름을 보낸 탓이었다. 두부를 사러 다니다가 처음 승완이를 따라 부두로 간 날. 그 애가 보여준 것은 그 애의 깨진 무릎이었다. 여름날 철망을 오르다 넘어져 깨진 그 애의 무릎에 피가 비쳤는데도 그 애는 무덤덤했다. ……………(하략)…………………

 

□ 정미형, 2009년 ≪한국소설≫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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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수록 문예지 : <해양과 문학> 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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